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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15 ~커피의 쓴 맛~





  B급 영화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영화에 들어가는 비용이 싸기도 하고, 촬영에 쓰이는 카메라 대수가 적기도 하고, 매우 저렴한 세트나 무명 배우만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각본도 마찬가지로 무명 극작가를 쓰는 탓인지 실패와 성공의 편차가 크고, 때로는 혼돈스런 내용일 때도 많이 있다. 대학 간의 경기에서 농구를 한다고 생각했더니, 왠지 우주인이 공격해와서 지구의 존망이 갈리는 전개도 놀랄 만큼 자주 본다.

  하지만, 그 혼돈을 좋아하는 별난 사람들은 생각보다는 꽤 있다.

  원래 영화를 보는 관점이 달라서일까? 그 사람들이 엉터리 전개를 더러운 말투로 매도했다고 생각했더니 그 바로 다음 순간, 사진 기술와 공간 연출이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그렇게 해서 배우의 연기로 이야기가 흘러가나 생각했더니, 마지막에는 엉터리 전개를 보고 크게 웃는다. 이제 뭘 평가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우와, 엄청 시시했지. 봐. 그 주인공 같은 남자가 후반이 돼서 의미도 없이 목을 잘린 장면이라니, 스태프가 무슨 표정을 하고 찍었을까?」


  나와 키리바나의 후방에서, 이즈에 선배가 신바람난 목소리로 타이시에게 말을 걸고 있다.

  애완동물 샵을 대강 만끽한 우리들은 당초 예정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확실히 전국에 널린 영화관답게 극장수가 많고, 상영 수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 이즈에 선배가 선택한 것은 「지하 300m에서의 침공」이라는, 인디 존즈의 부제가 아니라면 사양하고 싶은 영화였다.

  나와 키리바나는 둘을 따라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선배의 방침에는 거스를 수 없어서 타이시가 반대하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결과는 흔쾌히 동의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돼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본 결과가 이러하다. 타이시 자식, 「아아」라든지 「그렇군요.」라는 말밖에 못하고 있다고.


「.....감상은?」


  옆에서 난처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키리바나에게 물어본다.


「처음에는 재미없었는데, 영화라기보다는 콩트처럼 보니 의외로 보통이었어요.」

「......대체로 나와 같군.」


  이즈에 선배가 영화를 보기 전에 우리들에게 충고한 것은, 「영화를 보려고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는 동안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보통 영화 같은 기대를 하지 말고 그야말로 가족 연극이라도 보는 느낌으로 보는 게 좋다는 말이다.

  시작하고 나서 15분 정도에 나온 지하세계 사람을 보고, 처음에는 특수 메이크의 수준 낮음에 전율을 느꼈지만, 점차 익숙해지자 메이크 수법으로 생각이 미쳤다. 완성도가 너무 높으면 의문점이 떠오르지 않지만, 서투르다면 반드시 과정이나 수법에 신경이 쓰이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좋다.

  그나저나 저건 메이크라기보다는 쓰개다.


「그래도 유머는 상당히 훌륭했어요.」

「저런 분위기니까, 그렇게나 농담을 담아낼 수 있는 건지도. 할리우드 초대형작에서 그렇게 하면, 엄청 깰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B급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기분은 약간은 알 것 같다. 조잡하거나 진부하기도 하지만 그 시시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때로는 머리를 텅 비우고 즐길 수 있다.

  물론 예산이 높은 것 중에서도 그런 작품은 있겠지만, B급 영화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고 할까. 카메라가 적은 것도, 뒤집어서 생각하면 시점이 적어서 자신의 시선에 가깝다. 그런 것일 거다.

  작품에 대해서 각자 대충 말하자, 이즈에 선배가 손가락을 돌리며 말한다.


「그럼 밥 먹으러 가볼까?」


  그러고 보니 아직 안 먹었지. 영화를 볼 때는 주스를 마셨지만, 역시 약간은 배가 고프다.

  키리바나나 타이시도 배가 고팠는지, 이즈에 선배의 제안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튼, 데이트라고 하면 식사고, 식사할 때는 의외로 자란 방식이나 개성이 나오기 때문에 궁합을 파악하기 쉽다.

  미인이지만 먹는 방식이 불결하다든가, 탕수육에 파인애플을 넣는다, 키스프라이에 간장을 뿌릴까? 소스를 뿌릴까? 등등,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이즈에 선배의 센스를 기대하며 간 곳은 아담한 카페였다. 입구 부근의 벽면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하고, 그 안에는 앤틱 테이블이나 의자가 불규칙하게 늘어 놓여 있었다.

  바닥도 대리석 같은 흰 바탕에 광택이 있는 석재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신지 않았지만, 가죽 구두라면 또각또각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릴 거다.

  아니 뭐야 이건. 왜 이렇게 깨끗한 느낌이 드는 데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거지? 그보다 여기에 배를 채울만한 탄수화물이 있을까?


「여기 팬케이크가 맛있어. 키리바나는 단 거 좋아해?」


  여성진이 창가에서 새된 목소리로 스위트 설법을 꽃피우는 중, 메뉴표를 펄럭펄럭 넘긴다. 일단 타코라이스나 스파게티 정도는 있지만, 역시 메인은 팬케이크인 것 같다.


「하치만 오빠는 뭐 드실 건가요?」


  무난하게 고르자면 스파게티겠지만, 팬케이크가 좀 신경 쓰인다. 여기서 팬케이크를 먹지 않으면, 평생 인연이 없는 음식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거기에 단 게 싫은 건 아니다.


「나도 팬케이크면 돼.」


  내가 그렇게 말하자 타이시도,


「아, 저도 그게 좋슴다.」


  이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흥분됐다. 아차, 내가 팬케이크를 고른 탓에 타이시가 다른 메뉴를 먹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동안, 테이블 위에 4개의 팬케이크가 나란히 놓인다. 이중으로 쌓은 팬케이크 위에 딸기나 바나나, 블루베리가 보석처럼 박혀있다. 그리고 그 옆에 생크림이 듬뿍 담겨 있고, 그 옆에 작은 용기에 황금색 메이플 시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럼 먹어볼까?」


  먹는 건 좋지만, 어떻게 먹어야 하지? 생크림과 메이플 시럽은 처음에 얹어 먹는 건가?

  나이프와 포크를 잡은 채로 당황하고 있는데, 키리바나와 이즈에 선배는 케이크를 약간 떼어내서는 그 위에 크림이나 시럽을 적당히 얹어서 입에 넣는다.


「아! 너무 달지 않아서 먹기 쉬워.」

「그치?! 생크림도 별로 칼로리 없대」

「그건 기쁜 정보네요.」


  둘이 냠냠 먹는 것을 따라 딸기에 크림을 발라서 입에 넣는다. 키리바나가 말한 대로, 팬케이크 자체는 그렇게까지 달지 않고, 의외로 담박하다. 오히려 케이크만 먹으면 뭔가 부족할 것 같다. 그 정도로 크림을 바른 딸기에는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함이 있었다. 이번에는 메이플 시럽과 바나나를 조합해서 또 한 입 먹는다.

  이거, 의외로 상당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잘라서 먹고 있었는데, 눈앞에 앉은 타이시의 팬케이크가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아, 이 녀석. 단 것에 서투른 건가. 무리하기는.

  이즈에 선배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타이시에게 실없는 잡담을 하는 중이다. 이 사람이 깨닫지 못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적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서툴렀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안 한 타이시의 잘못이니까.


「앗, 타이시잖아. 뭐야뭐야? 데이트?」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가 가게 안에서 퍼부어진다.

  소리가 난 쪽에는 아직 앳된 얼굴을, 얄팍한 화장으로 덮어서 가린 여자 4인조가 있었다.

  그 애들은 나와 이즈에 선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리바나를 차례대로 확인하고는,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타이시에게 다가간다.


「꽤 미인이잖아. 소개해봐.」


  중학교의 반 친구일 것이다. 그 말은 키리바나와도 같은 반이라는 게 되지만, 키리바나는 신경 쓰지도 않고 팬케이크와 마주 보고 있다.

  리더격인 여자는 타이시를 놀리듯이 말하고 있지만, 나머지 세 명은 힐끔힐끔하고 키리바나를 식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반대로 리더는 키리바나를 전혀 보지 않는다.

  뭔가 납득이 안 된다.


「너희들 시끄럽다고. 자, 저쪽으로 가.」


  타이시가 약간 초조한 상태로 일어나 여자들을 쫓아내서, 그 사이에 키리바나에게 물어본다.


「야, 저 녀석들 아는 사람이야?」

「같은 중학교에요. 반은 우리들과 같고, 가끔 얘기했었어요.」


  그렇다면 왜, 키리바나에게 말을 안 거는 거지? 여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이런 곳에서도 인사하는 건 당연하다.


「저 녀석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저쪽이 조금 적대시할 뿐이에요. 전에 저한테 고백한 미사키 군, 기억하세요?」

「그 운동맨 같은 녀석이잖아.」


  우선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참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키리바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하면서, 손을 움직여서 케이크를 잘라내고 있다.


「아무래도 그 애들 중에, 그 미사키 군을 좋아하는 애가 있는 것 같아서, 미움 받았어요.」


  그렇게 말하고 키리바나는, 생크림과 시럽을 듬뿍 얹은 팬케이크를 한 입 넣고는, 얼굴을 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뭐, 자주 있는 일이다. 여자들의 우정은 왠지 룰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연애 관련이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사람을 안 상태에서 그 사람과 사귀게 되면 다음날에는 따돌림 받거나 괴롭힘을 당한다거나 둘 중 하나다.

  키리바나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결과적으로 미사키 군을 꼬신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찼으니까, 그 여자 룰에 저촉되기라도 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다 해서.


「넌 그래도 좋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 쪽이 저를 싫어하니까. 제가 이러니저러니 할 일이 아니에요.」


  역시 키리바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식사를 계속 한다.

  원래라면 그걸로 좋다. 본인이 납득했다면,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전에 키리바나에게 말했던 대로, 미사키 군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키리바나에게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의견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래도, 외롭지 않을까」


  하찮은 이유로 상대방에게 미움 받아, 가끔 얘기하던 상대와 거의 말하지 않게 되고 이렇게 차가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외롭지 않아요.」


  키리바나는 말한다. 산뜻하게.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물론, 사유물이 숨겨지거나 아플만한 행동을 당하는 건 싫지만요. 지금은 그런 것도 없으니, ......그렇다면 마찬가지에요.」

「......그건, 안 되잖아.」


  무심결에 말투가 험해지고 말았다.


「안 되지 않아요. 게다가 하치만 오빠도 자주 말했잖아요. 그 정도로 망가진다면, 분명 그 정도였던 거라구요.」


  아아, 그렇게들 자주 말한다. 여하튼 나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이치다. 좀 반한 일 정도로 인연이 끊어진다면, 미사키 군 일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인연이 끊어지겠지.


「그래선......」

「자, 거기까지. 슬슬 타이시 군이 돌아와. 계속 하고 싶으면, 이 데이트 다음이야.」


  이즈에 선배의 냉정한 목소리로, 의식에 공백이 생긴다. 시야 구석에는 마지못해 떨어진 자리에 앉는 여자들과, 여기로 돌아오는 타이시가 있었다.

  숨을 한 번 내쉬고, 같이 주문한 커피를 목에 흘려 넣는다. 단 것과 맞추려고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았던 탓인지, 강렬한 쓴 맛이 혀를 자극한다.


「미안해요. 같은 반 애들이 시끄러워서. ......무슨 일인가 있었슴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즈에 선배와 타이시의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를 BGM 삼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나는 의미도 없이 떼 지어 모이는 놈들이 정말 싫다.

  그 자식들은 자신의 약함을 감추는 주제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거짓말이나 기만으로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인간관계를 멋지다고 목청 높이며, 타인에게 그것을 강제하려 든다.

  실은 사이좋지 않은데, 표면상으로는 어울리면서 그 뒤에서 험담을 해댄다.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상처주고, 사람을 멸시해서 조잡한 허영심을 채운다.

  홀로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하는 주제에, 혼자 있는 사람을 비웃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좋다.

  혼자 있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그렇게 애매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에 기댈 정도라면, 혼자서 고독과 마주보는 편이 훨씬 낫다.

  거짓말을 하고 억지로 뭔가를 해야만 하는 친구 같은 건, 나는 필요 없다.

  .....하지만 이 녀석은, 키리바나만큼은 나와 같은 식으로 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거짓말을 하거나, 무리해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란다. 외롭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는 키리바나와 처음 말을 했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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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14 ~히키가야가의 이웃 분~




  인터폰을 눌렀더니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나며 갈색 문이 힘차게 열린다.


「어머, 히키가야 군이잖아. 왜 그러니?」


  키리바나와 매우 닮은 눈에, 형태가 좋은 입술이 특징인 여성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뒤로 묶인 것이 연둣빛 앞치마와 어우러져서 생활감을 자아낸다.

  키리바나의 어머니인 키누에 씨는 오늘도 걸 맞는 미모가 잘 어울렸다.


「아니요, 키리......아카네와 나가자는 약속을 했는데,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래? 지금 불러올 테니, 잠깐 기다려줘.」


  키누에 씨가 활짝 미소 지으며 다시 안으로 돌아가서, 한 숨을 돌리고 그 곳에 계속 선다.

  역시 키누에 씨와 키리바나는 눈매를 빼고는 별로 닮지 않았다. 차분한 느낌을 주는 키리바나와는 달리 키누에 씨는 어느 쪽이냐면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키리바나의 외모는 아버지 쪽의 피가 강한 것 같다. 나는 만난 적이 없지만, 키리바나 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와는 외모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나이 든 키리바나도 보고 싶어서, 언제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기도 하다.


「준비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려서,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려줄 수 있겠니?」


  그 녀석, 준비하는데 일부러 시간을 들이는군.


「아, 아뇨. 밖에서 기다려도 괜찮아요.」

「아니아니, 일부러 와줬으니 들어와 들어와」

 
  키누에 씨에게 등을 밀리는 식으로, 키리바나의 집으로 발을 디뎌, 열 다다미 이상은 되는 거실로 간다.

  초등학교 이래로 처음 온 키리바나의 집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상당히 많이 바뀌어 있었다.

  벽지는 아주 새로운 흰 직물로 바뀌었고, 전에는 손상됐던 일본식 방의 다다미는 새로 갈았고, 근처를 지나자 풀냄새가 감돈다. 브라운관 TV는 대형 액정 TV로 바뀌었으며, 데스크탑 PC는 노트북으로 교체되어 공간절약이 되어 있었다.


「그, 그럼......」


  안내 받은 소파에는 먼저 온 손님인 키리바나의 아버지가 등을 기대면서 와이드 쇼를 보고 있었다.

  나와 키리바나의 아버지 사이는 별로 나쁘지 않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고 잡담 정도는 한다. 가끔 장래 희망이나 졸업 후의 진로를 물을 정도로 딱히 사이가 나빠질 요소 같은 건 없다. 없겠지.

  다만 코마치가, 키리바나의 집에서 내 얘기가 나오면 미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진다고 말을 하니 내가 멋대로 무서워할 뿐이다.

  마침 TV에서는 20세 여배우가 속도위반해서 결혼한 화제가 한창 나오는 중이었다. 사귄지 반 년 만에 골인했다고 했나? 일이 잘 되는 시기에 이래서는 향후에 큰 영향이 있을 거라고 원숙한 해설자가 아우성치고 있다.


「오늘 어딘가 가는 건가?」


  키리바나의 아버지가 묻는다.


「영화 같은 거예요. 아니 그게 지인을 따라가는 거라고 할까요? 둘이서 나가는 게 아니에요. 듣기로는 둘 만이서는 긴장한다고 해서. 그거야 그래요. 둘 만이라면 좀 그렇죠.」


  입에서 말이 연달아서 뛰쳐나온다. 평소부터 이렇게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만, 평소부터 이런 상황이 되고 싶진 않으므로, 역시 지금 그대로가 좋을지도 모른다.

  덧붙여서 영화라는 건 완전히 거짓말이다. 오늘의 코스는 이즈에 선배가 전부 맡아서, 직전이 되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군, 둘이서는 곤란한데」

「그,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키리바나와 상가에 간 적이 있었지. 아니 여기서는 전혀 관계없지만. 진짜로.

  그렇게 해서, 원래대로라면 가족이 단란할 곳에 답답한 분위기가 내려 쌓인다. 키누에 씨는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흥얼거리며 차를 끓이고 있다. 좀 더 분위기라는 것을 읽어줬으면 한다.


「하치만 군이 집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네. 이렇게 보면, 역시 많이 자랐어.」


  차 줄기가 선 차를 눈앞에 내주고, 키누에 씨는 내 약간 옆에 앉는다. 왜 이 부부는 나를 사이에 끼고 앉는 걸까.


「역시 키는 컸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쪽이 키가 자랐겠지요.」


  받은 차에 입을 대지만, 뜨거워서 맛을 모른다.

  키리바나 부모님의 앞에서는 성씨로 부르기 어려워서, 무심결에 대명사를 쓰고 말았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꺼려지므로, 이 정도가 고작이다.


「그치. 너무 키가 자라면, 남자애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차를 한 모금 더 마시지만, 역시 맛을 모르겠다. 혹시 키누에 씨의 가사 능력이 떨어진 걸지도 모른다.


「.....바로 그 본인은 아직 안 내려오나요?」

「좀 더 걸릴지도 몰라. 모처럼 왔으니, 과자라도 먹으렴. 자, 장어파이」


  이제 슬슬 탈출해서 빨리 약속장소로 가고 싶지만, 장어파이를 주셨으므로 한 입 갉아 먹는다.

  장어파이는 자칭 밤의 과자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밤에 가족 단란용으로 써달라는 희망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어가 어떤 것을 증강하기 때문에, 밤의 과자라고 불린다. 후자는 완전히 속설이지만 왠지 믿는 사람은 많다.

  그 뒤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키누에 씨와 골치 아픈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던 때, 겨우 키리바나가 2층에서 내려온다.

  세련되고 포근포근한 검은 원피스에 얇은 핑크 자켓을 맵시 있게 입은 키리바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차분한 느낌이었다. 사복 때는 주로 스타킹을 신었지만, 오늘은 맨발을 드러내고 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가볼까요?」


  전혀 주눅 든 기미가 없는 키리바나는, 나와 그 양쪽에 앉은 부모님을 보고 살짝 웃는다. ......이 녀석, 틀림없이 일부러 늦게 왔구만.

  곧바로 인사하고 키리바나의 집에서 나오자, 「너무 늦지 말렴.」이라고 키누에 씨에게 주의를 받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이런 면을 보면 역시 어머니다.

  연상자로서 수긍하는 의미로 뒤돌아보자, 「그리고 하치만 군도 가끔씩은 코마치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와.」라고 말한다.




「......늦어져서 죄송해요.」

「너 말이다, 그렇게까지 미안하다고 생각 안하잖아. 아직 웃고 있다고.」


  모이는 장소인 역의 동쪽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역시 일요일답게, 아이를 동반한 부부가 즐거운 듯이 지나가는 광경이 흔히 보인다.

  최근 3일 정도 비가 올 법한 날씨였지만, 오늘은 선명한 파랑색이고 적란운이 치워져 있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아서인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왠지 밝아 보인다.


「카와사키 군이 전하는 말인데, 상황을 잘 봐서 빠지길 바라는 것 같아요. 듣기로는 할 수 있으면, 오늘 결정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어도, 우선 오늘 예정을 모르면 할 수 없잖아.」


  왠지 과정을 확 건너뛰려 한다고 할까, 타이시는 왜 평범하게 데이트한 다음에 과정을 밟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런 초조해하는 상태가 중학생답다는 생각도 들지만, 상대가 고등학생 3학년인 만큼,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이즈에 선배 같은 타입은 한 번 놀러 갈 정도라면 별 거 아니니까, 타이시만 너무 의욕에 넘쳐 보인다.

  10분 정도 걷자 역에 도착했으므로, 혼잡 중에서 타이시나 이즈에 선배를 찾는다. 키리바나의 집에서 시간을 소비했지만, 거의 약속 시각에 도착했으니 어느 쪽인가는 왔겠지.


「히키가야 형! 여김다.」


  체육계 사람 같은 존댓말이 들려서, 들은 적 있는 목소리 쪽으로 뒤돌아보자 타이시가 눈에 들어온다. 체육계 사람답게 짧은 바지에 디자인이 괜찮은 티셔츠를 맞춰 입었을 뿐이지만, 썬탠한 흔적도 어우러져서 꽤나 보기 좋다.


「이즈에 선배는?」

「아직임다. 아까 전부터, 이 근처를 돌아다녔는데, 눈에 띄지 않던데요.」


  아무튼 5분, 10분 정도라면 늦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걸어도 소용없으니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셋이서 기다리기로 한다.


「정말로 와주시는 겁니까? 왠지, 믿기지 않슴다.」

「안심해라, 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라도 당하지 않는 한은 확실히 올 거다.」


  타이시는, 우리들이 데이트 세팅까지 해줬다고 믿은 건지, 몇 번이나 내게 감사인사를 한다. 데이트는 이즈에 선배가 멋대로 말했을 뿐이지만, 남중생의 꿈을 부수는 것도 미안하니 그대로 둔다.

  약속시각이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멀리서 이즈에 선배가 오는 것이 보인다.

  아쿠아 블루색 플레어 스커트에, 연유색 가디건을 맞춰 입은 청초한 모습이지만, 묘하게도 이즈에 선배에게 어울린다. 스커트라지만 교복보다 길어서 무릎이 가려져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 전혀 그렇지 않슴다.」


  타이시가 인대가 손상될 정도의 기세로 머리를 흔들자, 이즈에 선배는 미소 지으며 타이시에게 손을 내민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두 번째구나. 이즈에 메구미입니다, 잘 부탁해.」

「카, 카와사키 타이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얼굴로 마찬가지로 손을 내민 타이시와 악수를 하고, 이즈에 선배는 우리들을 향하며 나와 키리바나를 본다.


「키리바나도 일부러 와줘서 고마워」

「아니요,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와서 다행이었어요.」


  날 힐끔 보고, 기분 좋은 소리로 키리바나가 대답했다.

  키리바나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그것보다도 이즈에 선배가 생각보다는 평소 그대로인 것에 놀랐다. 청초한 차림이지만, 그 표정에는 평소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가 떠올라 있다. 의외로 캐릭터를 만드는 타입은 아닐지도 모른다.


「늦은 것은 전혀 상관없는데, 오늘 어디에 가심까?」

「윈도우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할 뿐이야. 중학생이 둘 있기도 하고, 그렇게 돈이 드는 것도 싫겠지?」


  손가락을 바짝 세우며 이즈에 선배가 말한다.

  확실히 영화는 고등학생에게는 의외로 싸다. 천 팔...... 고등학생은 천 엔으로 볼 수 있으니, 섣불리 노래방에 가는 것보다 싸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고등학생 요금이라고 딱히 두 번 볼 수 있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최근에는 블루레이가 있어서, 영화관에는 가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특히 약간 한가한 때에 영화관에 가서 상영되는 것을 보는 건 꽤 재미있다. 게다가 영화는 그 어두운 공간에서 비춰지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최적의 미디어로 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우선은 영화관으로 가면서 슬슬 돌아볼까?」


  선배와 키리바나가 얘기하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혼잡 속을 빠져나간다. 지금은 딱히 막히지 않고 타이시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조금 안심한다.


「왠지 좋은 분위기네요.」

「지금은... 말이지. 선배니까 어떻게 될지 읽지 못하겠는데......」


  확실히 그 자리에서 돌아간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웃는 얼굴로 딱 잘라서 타이시를 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고, 반대로 눈치 채면 어딘가 나갔을지도 모른다.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겠지.

  근처에 있는 가게를 가볍게 둘러보며 흐느적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이즈에 선배가 한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여기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검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창문이나 벽에 귀여운 개나 고양이, 토끼 등의 사진이 실린 포스터와 간판에 쓰인 「애완동물 샵」이라는 글자가 춤추고 있었다.

  포스터로 보기에는, 애완동물이라고 해도 여자에게 인기가 있을법한 동물만 취급하는 것 같다. 새나 물고기처럼 냄새 나는 생물은 판매하지 않는 듯하다.

  흠. 누가 제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꽤 좋은 곳이군. 이야깃거리로 삼기도 쉽고, 귀여운 생물을 보면 누구라도 편안한 기분이 들 것이다.


「전 괜찮지만, 키리바나가......」

「어라? 키리바나는 동물에 약해?」

「기본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괜찮아요. 부디, 들어가주세요.」


  이즈에 선배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몇 번이나 키리바나에게 확인했지만, 키리바나가 괜찮다고 딱 거절해서 할 수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괜찮아?」

「제가 카와사키 군의 데이트를 방해하면 안 돼요. 게다가 움직이면서 울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고, 멀리서 개라도 볼 테니까 괜찮아요.」


  덧붙여서 말하자면, 키리바나는 고양이에 약하다.

  딱히 고양이 알러지가 아니고, 키리바나도 이런 성격이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움직이는 고양이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다가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개나 토끼 등은 그럭저럭 괜찮아서, 사람의 특기나 서툰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사진이라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건 괜찮다는 축에 들어가진 않겠지.

  그 때문에, 우리집에 키리바나가 올 때는 애묘인 카마쿠라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내 방으로 피한다. 대단히 분위기를 잘 파악하는 고양이지만, 누굴 닮았는지 외출하기 싫어해서 그 뒤로 당분간 내 침대를 점거하는 것이 곤란한 점이다.

  이즈에 선배를 따라 애완동물 샵에 들어갔더니 가게 안 구석구석에서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중에 섞인 고양이 울음소리에, 키리바나는 잠깐 동안만 몸을 움츠리지만, 그대로 걷는다.

  ......나 참, 싫으면 안 들어가면 될 텐데.


「어이 타이시. 우리들 강아지 코너에 있을 테니까, 선배와 적당히 돌아보고 있어.」

「네? 괜찮슴까? 그럼, 어느 정도 돌면 그 쪽으로 가겠슴다.」


  「나중에 봐」라고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고양이 코너로 가는 이즈에 선배를 배웅한 곳에서, 개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자, 가자」

「고마워요.」


  키리바나의 말을 등으로 받아들인 채, 가게 구석으로 간다.

  개 코너에는, 다양한 종류의 강아지가 우리에 있었다. 옆을 봐도 어느 정도 큰 개가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이 가게는 강아지를 주로 취급하는 거겠지.

  키리바나는 아주 잠깐 몸이 굳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강아지들을 보고 점차 얼굴이 풀어진다.


「아, 이 아이가 차분하고 귀엽네요.」


  키리바나의 시선 끝에는, 검은색과 갈색이 섞인 혈통의 영리해 보이는 강아지가 엎드린 자세로 키리바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우리에 달린 명찰에 따르면, 견종은 게르만 셰퍼드라는 듯하다. 확실히 경찰견이나 군용견으로도 쓰일 정도니, 지능이 높을 것이다.


「너, 그런 영리해 보이는 개를 좋아하는구나.」

「치와와나 마메시바보다는 좋아해요. 대화할 수 있는 느낌을 특히」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 너머로 셰퍼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역시 머리가 좋은지, 셰퍼드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키리바나가 하는 대로 따르는 중이다.

  애완동물 같은 외형보다는, 셰퍼드나 리트리버 같이 사냥개에서 개량된 견종을 좋아하는 기분은 조금은 알겠다. 우리집 카마쿠라도, 아까 전에는 건방지다고 했지만, 그 생물다움이 장점이기도 하니까.


「괜찮으시면, 안아 보시겠어요?」


  키리바나의 뒤에서 젊은 여점원이 말을 건다.


「아니요, 오늘은 사러 온 건 아니라서.」

「딱히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또 올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꽤나 당당한 점원이지만 그 만큼 우리도 사양하지 않아도 되니 손님을 대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키리바나가 잠시 우물쭈물한 뒤, 「그럼,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자, 왠지 점원은 내게 윙크를 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딱히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달라고는 안했다고.

  그런데도 강아지를 팔에 안은 키리바나가 기뻐보였기 때문에, 약간은 참견이 심한 점원에게 감사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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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13 ~러브 코미디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담임의 「수고했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오늘 하루 수업이 무사히 끝난다.

  단번에 풀어진 분위기와 동시에 바쁘게 교실에서 뛰쳐나가는 운동부에 섞여 교실에서 나왔더니 복도에 불쑥 튀어나온 기둥에 등을 기댄 이즈에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반은 아직 HR이 끝나지 않았는지 복도는 한산했다. 오늘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와 더불어 어둑어둑하고 가라앉은 공기가 정체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선배는 창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따분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으면 좋은 얼굴 생김새가 더 두드러져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든다.


「......오, 히키가야 군. 겨우 왔구나.」

「이런 데에서 뭘 하는 겁니까?」


  그것보다도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위층에서 어딘가의 반이 HR을 끝낸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혹시 이즈에 선배는 6교시를 땡쳤는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보니 봉사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래서 히키가야 군을 따라가려고」


  그러고 보니 자세한 장소까지는 말을 안했던 것 같다. 이래서 마이너 문화부라는 건 성가시다. 서예부나 취주악부처럼 이름과 장소가 일치하면 도움이 될 텐데.

  그러나 봉사실이 될 방이 있어봤자 기본적으로 쓰이지 않고, 쓰인다 해도 남고생의 망상 정도일 거다.


「북쪽 교사 3층, 가장 서쪽에 있는 방이에요.」

「우와! 가장 멀리 있어.」


  봉사부는 최근 신설된 동아리인 이유도 있어서, 입지 조건은 문화부 중에서도 꽤나 나쁘다. 그 탓에 매일, 필요이상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같다.

  한 번 교실 안을 본다. 유이가하마는, 아직 미우라 일행들과 얘기하는데 빠진 것 같아서 해방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대답하고 봉사부로 발길을 향한다.

  곧바로 다른 반이 간만의 차이로 HR이 끝나,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며 교내가 갑자기 활기를 띤다.

  주말 예정을 상담하는 여자. 승강구로 빠르게 걸어가는 운동부. 유행하는 연예인 흉내를 내며 요란하게 복도를 걷는 문화부. 인구밀도는 점점 더 빠르게 높아져, 곧바로 익숙한 광경이 완성된다.

  그 혼잡 중에서 하나 둘씩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일찍이 내가 받았던 시선도, 시기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호기심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것이 이즈에 선배가 아니라, 왠지 나를 향한다는 게 이상하다.


「저기, 선배는 2학년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응?」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생각하고는, 「전 남친이랑 나머지는 중학교 때 동아리 후배 정도려나? 그래서 좀 거북해」라고 가볍게 대답한다.

  ......틀림없이 그게 원인이다.

  즉, 그 전 남친이나 중학교 후배 입장에서 보면, 내가 이즈에 선배의 새 남자로 보이며, 그 남자인 내가 어떤 놈인지 흥미진진이라는 건가.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오해다.


「거북하면 여기까지 안 오면 되지 않아요?」

「그래도 전 남친을 꺼려해서 자신이 행동하기 힘들어지면 의미 없잖아? 그건 그거대로 끝난 관계고」


  이즈에 선배는 깨끗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끝난 인간관계에 휘둘려서 자신이 손해 보는 건 좋지 않다.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당당히 있으면 될 일이다. 타인을 너무 신경 쓰는 건 분명 눈치만 보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리라.

  건물을 잇는 복도를 지나, 문화동 3층으로 올라간다. 지나갈 때 왠지 커피콩 향기가 감도는 생물실을 지나고서, 바로 봉사부 문 앞에 선다.


「꽤 여러 가지가 있구나. 부럽네~ 포트도 있어.」


  아무도 없는 부실에 들어갔더니, 이즈에 선배가 부실 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커피, 홍차 어떤 게 좋겠어요?」

「그럼 커피로 부탁해, 블랙이면 돼.」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종이컵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두 잔 만든다. 설탕 3개째를 넣어, 이즈에 선배가 나를 유감스러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할 무렵,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부실에 왔다.

  유키노시타가 홍차를 2인분 만들고 전원이 손에 든 음료를 한 모금 머금자, 이즈에 선배가 말을 꺼낸다.


「......그래서,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뭐야?」


  이즈에 선배가 타이시의 지갑을 주워준 것, 그리고 그 건으로 타이시가 보답을 하고 싶다는 것을 전하자, 이즈에 선배는 떠올리듯이 흠흠하고 끄덕이고 있었다.


「타이시, 생각나요?」

「응. 지갑은 웬만해서는 못 주우니까」


  이즈에 선배는 스커트 옷자락을 정리하고는, 파이프 의자에 제대로 앉는다.

  기억난다면 이야기는 빠르다. 나머지는 적당히 어디선가 둘을 만나게 하면, 우리들의 일은 끝나게 된다. 의외로 편한 일이었군.

  유키노시타는 턱에 손을 대고 고심하고선, 뭔가 수상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그래」

「이즈에 선배는 지갑을 주운 뒤, 왜 일부러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나요? 경찰서에 보내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 생각됩니다만......」


  나와 같은 의문을, 나와는 다르게 꺼낸다.


「내 마음이 천사처럼 청순하기 때문에?」

「의논할 가치가 없어요.」


  이즈에 선배는 「난처하네......」라고 전혀 난처하지 않은 소리로 대답하고선, 우리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음미하듯이 빤히 보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기」라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발설 금지 자세를 만든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지만, 신경 써선 안 된다.


「툭 터놓고 말하자면, 지갑을 주웠을 때 학생증이 들어있어서, 얼굴하고 이름을 알았던 거야. 얼굴은 그럭저럭이어서 우선 만나볼까? 라고 생각했어.」

「우와아......」


  유이가하마가 무심결에 소리를 내고 말았다.

  즉 저건가, 타이시는 이즈에 선배의 먹이로 보기 좋게 낚였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차피 만난다면 한 번 정도 데이트해서 어떤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우와, 이 사람 빗치다.

  그건 타이시 입장에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는 것이겠지만, 이대로 넘겨도 괜찮을까? 왠지 불량품을 넘기게 된 것 같군. 이래서 서비스업이 싫은 거다.


「그건 아마 괜찮겠지만요......」

「그럼 하는 김에 하나 부탁해도 돼?」

「내용에 따릅니다.」


  어차피 변변찮은 부탁이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이즈에 선배는 의자를 내 쪽으로 향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히키가야 군, 같이 데이트할래?」

「에엑!」

「................」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게다가 입가를 야하게 일그러뜨리고는, 흘러내리듯이 우리들 한 명 한 명을 둘러보고 있다.


「왜 세 명이서 데이트해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방해입니다만.」

「맞아요! 힛키 같은 건 있어봤자 방해가 될 뿐이라구요.」


  ......저기, 자신이 방해라고 말을 했다만 힛키 같은 거라니 너무하지 않냐?


「미안, 말이 부족했네. 더블 데이트를 하자는 거야. 갑자기 둘만으로는 타이시 군도 긴장하지 않겠어?」


  어쩐지 이치에 맞기도 안 맞기도 한 듯한 느낌이다. 애초에 연상의 누나 입장에서 보면, 그 파릇파릇함이 좋다고 어딘가의 만화에서 본 것 같은데.....


「더블 데이트라니, 애시당초 전 누구와 가야 하는데요?」

「많이 있잖아?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나. ......아니면 키리바나라든지」


  왠지 키리바나의 이름만을 똑똑히 구분 짓듯이 말한다.


「......만약 제가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나와 타이시 군이 둘이서 데이트에 갈 뿐이야. 단지, 어디서 뭘 할지는 우리들 마음이지. 히키가야 군의 일은 타이시 군을 나한테 소개하는 것뿐이니까. 그 뒤에 간섭하는 건 쓸데없는 참견이야.」

「손 댈 생각 만만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게까지는 말 안했어. 다만 나도 타이시 군도 젊으니까, 넘치는 감정을 거역하지 못해서 실수가 일어날지도 모를 뿐이야.」


  이 사람, 마음껏 손댈 생각이잖아.

  그렇다고는 해도 데이트인가. 가고 싶은가 가기 싫은가로 치자면 물론 가기 싫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사자에 먹히는 토끼를 못 본 체 하는 것도 개운치 않다.

  거기에 이즈에 선배의 성격을 알고서도 타이시를 만나게 한 것을 카와사키가 알게 되면 틀림없이 카와사키에게 혼날 것 같다.

  유키노시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눈을 돌리자, 마침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친다. 몇 초 정도 서로 본 뒤, 유키노시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큰 숨을 내쉬었다.


「히키가야. 딱히 나라도, 유이가하마라도, 그야말로 키리바나라도 좋으니 따라가도 되겠니?」

「별로 상관없다만, 왜 그렇게 뜻이 담긴 말투지?」

「딱히 아무것도 아니란다. 다만 조금 여자로서도 자존심이 관계될 뿐이야.」


  즉 저건가. 내가 누구를 선택할지에 따라, 여자의 등급이 결정된다는 건가. 여자라는 건 참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남자도 그런 부분은 많이 있어서 여자만을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왠지 뺨에 여기 있는 전원이 보내는 시선이 느껴진다. 빗발이 세차게 되어, 시끄러울 정도로 창문을 때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하늘이 보랏빛으로 채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번개라도 떨어지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각자 장단점이 있어서 누구를 선택해도 그다지 차이점이 없는 것 같다. 이즈에 선배를 감시하는 의미로는 유키노시타가 가장 적합하고, 건전한 데이트 코스를 돈다면 유이가하마가 좋다. 키리바나는, ......뭐 가장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것보다도 아까 전부터 퀵 세이브 버튼을 찾고 있는데, 어지간히 안 보인다. 뭐야, 이 쓰레기 게임은.


「......키리바나한테 부탁해 볼게. 키리바나라면 타이시와 같은 반이고, 타이시도 편하겠지.」

「아무튼, 무난한 선택이구나.」

「역시 힛키는 아카네를 선택했어......」


  내 대답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각자 반응을 보였고, 이즈에 선배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럼, 결정이네. 미안한데, 타이시 군하고 키리바나한테 이 일을 전해줘.」


  역시 선택지를 잘못 골랐을지도 모른다고, 머리 구석에서 생각했다.


―――――――


「키리바나, 너 주말에 한가해?」

「특별히 예정은 없는데요......」


  두 번째로 새우에 젓가락을 뻗었을 때, 키리바나에게 물어봤다.


「좋아, 그렇다면 데이트하자.」

「네에!?」


  키리바나가 놀란 바람에, 목이 막혀서 귀엽게 기침하고 있었다.

  이즈에 선배에게 더블 데이트를 제안 받은 그날 밤, 마침 키리바나가 우리 집에 저녁을 먹으러 와 있어서 말을 꺼내봤다. 덧붙여서 우리 집 식단은 새우와 야채 튀김, 닭고기 조림, 고등어 소금구이로 저녁밥치고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기본적으로 엄마가 저녁밥을 만들지만, 그 모친 가라사대 닭고기 조림은 키리바나가 맛내기를 잘 한다는 것 같다. 꽤 맛있지만, 완전히 우리 집 맛이 되어 있어서, 대놓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어? 오빠, 무슨 일이야? 아니, 전혀 문제없는데......」

「코마치, 문제 있어......」


  흠흠하고 헛기침을 한 키리바나는,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주세요. 대체 무슨 일인 거예요?」라고 말하고는 가지 튀김을 입에 넣는다. 기분 탓인지,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이즈에 선배가 타이시와 데이트를 해주게는 되었지만, 선배를 방치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점점 납득한 표정으로 바뀌어가고, 그 행동거지에 귀찮음이 배인 키리바나는 기름 때문인지 입술이 글로즈를 바른 것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도 요염해서, 얘기하고 있으면 무심코 시선이 입술에 붙들리고 말았다.


「괜찮잖아, 같이 다녀와. 아카네 미안한데, 우리 애를 돌봐주지 않겠니?」


  그때까지 묵묵히 연근을 먹던 엄마가, 젓가락을 두고 말한다. 무뚝뚝한 말이지만, 눈초리가 약간 웃고 있다.

  덧붙여서 이 모친, 키리바나가 없을 때는 「신부로 온다면, 아카네 같은 애가 좋아.」라고 나한테 들리게 자꾸 말한다. 장래에 틀림없이 질 나쁜 시어머니가 될 거다.


「......알았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되어, 키리바나와 같이 이즈에 선배를 따라가기로 했다. 유키노시타가 말한 대로, 이것이 가장 무난한 선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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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12 ~히키가야 코마치는 당황한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중간까지 같이 돌아갈래?」


  이즈에 선배는 고혹적인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불쑥 세운다.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전력으로 거절하고 싶은 제안이었다.

  방과 후, 나는 바로 요전 날처럼 교문에서 따분하게 서 있었다. 점심시간에 흐리기만 했던 하늘은 지금 군데군데 거무스름해져서 당장이라도 주륵주륵할 것 같다.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도, 하나둘씩 손에 우산을 들면서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오늘 일기예보는 흐린 뒤 밤부터 이슬비가 내린다는 것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저녁 정도부터 내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오후 2교시를 잠과 이즈에 선배를 꼬드길 문구를 생각하는데 쓴 결과, 내 슈퍼컴퓨터가 내놓은 대답은 애드립으로 적당히 하는 것이었다. ......내 머리, 진짜 고장난 게 아닐까.

  애드립만큼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즉흥이라는 건, 숙련자가 하는 것이기에 재미가 있는 것이며 아마추어가 한 시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 단지, 제대로 준비하고 실패하면 싫기 때문에, 애드립으로 하는 것이 상처받지 않고 변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혼자서 교문에서 우두커니 서 있어도, 예전처럼 내게 눈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의 시선을 싣지 않은 바람은 기분 좋고, 외톨이에게는 이 산뜻할 때가 가장 시간을 보내기 쉽다.


「이따가 크레이프라도 먹으러 갈래? 아니면 파르페라도 좋은데」

「난 상관없는데, 카세이는 어려울지도. ......그치? 카세이?」

「알고 있어? 탄수화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아무리 단 것을 먹어도 살찌지 않는대......」

「너 낮에 주먹밥 먹었잖아......」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나서 그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저번과 같이 살짝 펌한 선배에, 이즈에 선배보다 약간 밝은 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내린 선배, 그리고 예의 이즈에 선배 트리오가 뭔가 스위트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런, 정말로 눈앞까지 닥치고 말았다. 진짜로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애초에 이렇게 매복하지 말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복도에서 말을 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거다, 저거다 생각하는 동안 선배들이 가까워진다.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해서 보고 있는데, 마침 바로 눈앞에서 이즈에 선배와 눈이 마주친다.


「아아, 히키가야 군. 전에도 여기 있던데 또 누나라도 찾고 있어?」


  이즈에 선배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서서, 검지 손가락으로 엉뚱한 방향을 가리킨다.

  나머지 둘이 이즈에 선배를 따라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슬쩍 보고는 한 명은 명백하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즈에 선배를 보고, 또 한 명은 기가 막힌 듯이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잠시 볼 일이 있어서요......」


  잘 생각해 보면, 가까운 시일 내에 봉사부에 왔으면 좋겠다고 말할 뿐이다. 게다가 내 일도 아닌 타이시의 일이므로 딱히 내가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난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고, 이 사람의 소문을 고려하면 내가 고백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이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선배, 봉사부를 아세요?」

「들은 적 없는데. 너네들은 알아?」


 이즈에 선배가 묻자, 나머지 둘이 머리를 옆으로 흔든다. 아무래도 살짝 펌한 사람이 미야고, 세미롱은 카세이라는 이름인 듯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봉사부의 지명도가 없는 건 역시나군. 그나저나 이 학교는 문화부가 쓸데없이 많다. 게임 연구회라든지 생물부 등의 부원이 적은 동아리를 쉽게 승인하는 것이 원인인 것 같지만, 부를 삭감하는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공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혜택을 받는 입장에서는 뭐라 벙끗할 수가 없다.


「저기...... 그 부장이 이즈에 선배를 만나고 싶다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겠지만, 별로 상관없어. 내일 수업 끝나고 나서 되지?」

「......아, 네. 아마 괜찮아요.」


  아주 간단하게 진행되고 말았다. 권한 내가 말하는 것도 뭐하지만, 이 사람 괜찮을까.


「메구미, 이렇게 눈이 흐리멍덩한 애를 주워서 제대로 돌봐줄 수 있겠어? 어떻게 돼도 모른다구?」

「얘는 아마 괜찮아. 나쁜 짓할 배짱이 없을 것 같으니까.」


  이 사람들, 눈앞에 있는 나를 개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건가.

  그렇게 해서 이즈에 선배는 날 뒤돌아보고, 매혹적인 표정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같이 돌아갈까?」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지금으로 이어진다.

  듣기로는 이즈에 선배는 우리 집 근처의 학구에서 산다고 한다. 즉 집이 같은 방향에 있어서, 이렇게 같이 돌아가는 중이다.

  연상인 여자와 둘이 걸어가는 건, 내 인생에서는 처음이라 좀 긴장된다.

  미야 선배와 카세이 선배는 나와의 하교를 정중히 거절했다. 딱히 「절대로 싫어.」라든지 「좀 무리」 이런 심한 말을 한 건 아니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선배는 지휘봉처럼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유유히 내 옆을 걷고 있었다.


「즉, 문화적 영역 사이에서 긴장관계가 발생하면, 각각의 문화가 안으로 나아가. 다른 법칙이 끼어드는 일 없이, 그렇게 모방, 발전, 부정에 따라 문화는 성숙되는 거야. 피카소가 지금까지의 단일 초점을 부정하고 큐비즘으로 뻗은 것처럼, 존 케이지가 선율의 분해, 그리고 불협화음을 도입한 끝에 『4분 33초』에 도달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건 문화 영역을 좁히는 거야.」

「하아... 그런가요......」


  연상의 선배와 교복차림으로 돌아가는 건 남자의 로망이다. 해질녘에 실없는 얘기를 하며, 약간 갈팡질팡하면서도 거리가 가까워지면 더 좋다.


「부정을 이해하려면 전례가 필요하게 되겠지? 예술이나, 서브 컬처. 기본적으로 현대의 창작 작품은 감상자에게 전제 지식을 요구하고 있어. 그래서 이론이 발전함에 따라 문화는 세분화되어 대상은 적어져. 그게 지금의 다양 사회의 일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만, 이 얘기는 대체 뭐지? 적어도 하교 도중에 고등학생이 할 만한 얘기는 아닐 거다. 왜 하교하면서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거냐고......

  둘이 같이 돌아가는 건 좋지만, 이야기의 시작점을 찾을 수 없어서 이즈에 선배에게 주도권을 줬더니, 어느 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저기, 좀 더 알기 쉽게 얘기해주세요.」

「『*나Tueee』가 유행하면, 다음에는 최약계 주인공이거나 전생해도 능력이 초라하다든가 그런 게 나오지?」

※ 나Tueee : 온라인 게임의 속어로, 실력에 한계를 느낀 유저가 초보 방에 들이닥쳐서 학살하고는 나 졸라 쎄! 하고 의기양양하는 것을 나타냄.


「확실히 그런 게 있죠.」

「그래도 그 타입은 『나Tueee』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각보다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말이야.」

「알기 쉽습니다만, 그 비유는 그만두세요.」


  생각보다 여러 방면으로 적을 만들 거라고.


「아, 그래? 그럼 왜 내가 너희들의 동아리에 불렸는지 알려줄래?」


  이즈에 선배는 일단 멈춰 서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어본다. 조금 거리가 줄어드니, 단정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 들어온다. 그 눈은 뭔가를 간파한 듯이 보여서 어딘가 마음이 불편하다.


「딱히 큰일은 아니에요. 약간의 연애 상담 같은 겁니다.」

「흐응, 혹시 히키가야 군의 연애상담이기도 해?」


  마지못한 듯이 미소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렇게 겨우 얼굴을 멀리 떼놓고는, 몸을 돌려서 거침없이 걷기 시작한다.


「......아니요. 이즈에 선배와 좀 연관된 일이 있어서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에요.」

「그래, 그건 기대되네.」


  그리고서는 잠시 동안, 교내의 연애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즈에 선배는 왠지 학년을 가리지 않고 연애에 관해서는 잘 안다. 누구와 누가 화해했고, 3학년 여자가 하야마에게 고백하고 넌지시 차였다든지, 아무개가 양다리를 걸치다가 부모에게 들켰다든지, 그렇게 쓸데없는 정보뿐이었지만, 꽤나 재미있다.

  또 이즈에 선배의 말솜씨가 대단하다. 단순히 사실만을 뿌리는 게 아니라, 사건을 과장되게 얘기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드라마라도 보는 기분이 든다. 왜 아까 전에 이렇게 말할 수 없었던 건지 캐묻고 싶다.


「뭐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시네요.」

「응. 아무튼, 실익을 겸한 취미 같은 거고.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르쳐 줘도 좋은데?」

「그렇다 쳐도, 미야 선배와 카세이 선배는 괜찮겠어요? 아까 전 디저트를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너, 말을 돌리는 게 서투르구나......」


  참으로 그렇다.

  슬슬 내가 사는 학구로 들어가려던 때, 앞 방향에서 코마치와 키리바나가 걷는 게 눈에 들어온다.

  둘은 사이좋게 얘기를 하고 있어서, 나를 알아차린 기색은 없다. 저 녀석들, 이렇게 멀리서 보면 정말로 자매처럼 보이는군. 키 차이가 너무 크다.

  그대로 아주 가까이 접근하나 생각했는데, 키리바나가 목을 돌리는 찰나에 정확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키리바나는 처음에는 희귀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옆에서 빙글빙글 검지 손가락을 돌리는 이즈에 선배를 확인하고서는 뭔가 납득이 된 표정을 짓는다.


「그 애들 아는 사람? 그보다 큰 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여동생과 그 친구입니다. 큰 쪽은 전에 저와 같이 있던 애죠.」


  크다든지 커다랗다든지, 본인에게 들리지 않는 말을 제멋대로 하는 우리들이었다.


「어느 쪽이 여동생?」

「작은 쪽입니다.」

「그렇구나」


  여기서 얘네들을 이즈에 선배에게 소개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평상시라면 틀림없이 지나가겠지만, 타이시와 관련된 일도 있다.

  키리바나의 시선에 이끌려 코마치가 이쪽을 눈치 챘으므로 할 수 없이 각오한다. 우리들이 타이시에게 이즈에 선배의 인상을 말하는 것보다는 코마치와 키리바나가 말하는 편이 좋겠지.

  걷는 박자를 빨리 하고서는, 「오, 소개해주는 거야?」라는 기쁨어린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이즈에 선배, 생각보다는 소란스럽구만.


「거, 거짓말. 오, 오빠가 예쁜 사람이랑 같이 있어!」


  코마치가 과장되게 허둥대며 이즈에 선배를 향해 눈을 반짝반짝한다.

  일부러인 듯한 어중간함이, 이즈에 선배에게는 즉효였던 것 같다. 뭔가 눈을 반짝이고 있다.


「......우와, 저 애 귀여워. 있잖아, 히키가야 군, 얘 내 여동생으로 해도 돼?」


  될 리가 없잖아.

  코마치와 이즈에 선배가 신바람 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곁눈질하며, 키리바나가 다가와서는 작은 소리로 기가 막힌 듯이 얘기한다.


「어떻게 하면 연애 상담 대상과 같이 돌아갈 수 있어요? 정말이지 어디의 소녀 만화예요?」

「부실에 와 달라고 부탁했더니, 왠지 같이 돌아가게 됐어.」


  만약 소녀 만화라면 중개하는 동안 이즈에 선배를 좋아하게 되고, 어느 새 이즈에 선배도 같은 마음이 되는 거겠지. 그것을 숨기며 타이시와 얘기하는 동안 머지않아 죄책감에 견딜 수 없게 되어, 타이시에게 진실을 고한다. 당연히 나와 타이시는 단절되지만, 그 뒤 타이시는 상심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는 줄거리일 거다.

  음, 소녀 만화라는 건 여전히 카오스다.


「그 쪽 애는 두 번째구나. 오랜만이야, 이즈에 메구미입니다.」

「키리바나 아카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응, 잘 부탁해. 모처럼이니 너희들도 같이 돌아갈래?」


  코마치와 키리바나가 내게 눈으로 물어서, 양손을 바깥쪽으로 젖혀서 항복 포즈를 취한다. 오늘은 내 위치가 낮아서 아무래도 거절하기 어려워서이다.

  게다가 이즈에 선배가 한 말을 생각해보면, 선배의 집은 여기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편하다.

  그렇게 해서 거의 초면인 이즈에 선배를 중심으로 한 쿼르테트가 완성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세 명의 뒤에서 대기할 뿐이라 실질적으로는 트리오지만.


「아카네랑 코마치는 남친 같은 건 없어?」


  역시라고 할까, 여자들이 하는 얘기의 주제는 연애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요즘 중학생의 연애사정에 대해 대충 물은 이즈에 선배는, 마지막으로 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들은 없어요.」

「어머, 그래? 둘 다 인기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선배가 미소를 지으며, 둘을 향해서 검지 손가락을 돌린다.


「전 떠오르지 않아요. ......앗, 굳이 말하자면 오빠일까요. 우와, 지금 코마치한테 포인트 높을지도 몰라요.」


  오빠 입장에서는 기쁜 말을 해주는군.


「저도, 떠오르지 않네요. 그것보다 이즈에 언니는 어때요? 남자친구 같은 건 없나요?」


  키리바나가 자연스럽게 애인의 유무를 묻는다. 정중하게 물으면 뭔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슬쩍 물으면 이즈에 선배에게 어필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에게 주는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애, 애인은 있습니까?」를 남자가 말하면, 틀림없이 연애 경험이 없는 놈이 보기 흉하게 물을 뿐이라, 여자가 질색할 가능성이 높다(쇼타는 예외다). 그러나 여자가 물으면, 동경하는 사람에게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서 수줍게 묻는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엄청나게 귀엽다.

  이즈에 선배는 놀란 듯이 자신을 가리키고는 그대로 손을 옆으로 흔든다.


「나? 지금은 없어. 신경 쓰이는 남자애도 없다고 할까...」


  우선은 전망이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뒤, 다시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면서, 이즈에 선배는 둘과 메일 주소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이 사람 굉장해. 만나고 난 지 10분 정도 만에 여중생의 메일 주소를 입수했어.

  조금 걸어서 갈림길이 나오자, 이즈에 선배는 손가락으로 우리 집과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응, 우리 집은 여길 돌아서 나오는 데라서 여기까지야.」

「그래요? 그럼 또 내일, 잘 부탁합니다.」

「응, 수업 끝나고 갈게. 또 봐.」


  그렇게 말하고 이즈에 선배는 푸른 가로수를 향해 사라져갔다.


「어쩐지 생명력이 굉장한 사람이네.」


  코마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에 무심결에 납득하고 말았다.

  생명력이 너무 있어서, 나한테서 뭔가를 흡수해간 것 같다. 어깨를 덮치는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다.

  하늘은 자꾸자꾸 어둡게 되어가고, 점점 비 냄새가 올라온다. 아스팔트 위를 청개구리가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참새들은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쉬게 하는 중이다.

  이제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http://novel.syosetu.org/38226/



  그 11 ~이즈에 메구미의 이름은 유명하다~


『사랑의 빛이 없는 인생은 무가치하다』


  독일의 사상가인 시라아의 말이며, 연애의 격언으로서도 유명한 문구다.

  사랑이라는 것은 인생을 색칠하는 것이며, 사랑 없이는 아무리 유복한 생활을 해도 무가치하다는, 육체를 주체 못하는 현대의 젊은 아내가 들으면 불륜에 좋은 핑계가 될 법한 문구다.

  다만 시라아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남녀의 연애만이 아닌 이웃사랑도 가리킨다. 결코 「젊음은 빨리 지나간다, 사랑하라 소녀여」 같진 않다. 왜 시라아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서양의 시인은, 형제 같은 말을 너무도 좋아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제 4악장의 『환희의 송가』에서도, 「혼을 나누세, 형제여!」 같은 말을 하니까. ......『시간이여 멈춰라, 그대는 너무도 아릅답다!』는 괴테였지.

  연애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그런 자칭 사랑이 많은 소녀처럼, 연애를 특별시하는 풍조는 지금도 뿌리 깊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성(性)과 연애와 결혼이 분리된 현대에서는, 연애나 사랑 같은 것은 유행가의 일부로 다뤄지고, 단순한 오락으로서 소비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라아의 말은 지금은 통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애가 취미가 되어버리면, 그 대체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설렘을 갖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되고, 유사적인 연애 체험을 하고 싶다면 미연시를 하면 된다. 성욕을 채우고 싶다면, 그야말로 유흥가라도 가면 된다. 연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니, 전부 거짓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연애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연애관계는 사람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에, 의견의 충돌을 낳는다. 양다리에서 칼부림으로 확대되거나 「나, 그 사람하고 잤어......」라는 말을 듣고 따귀를 날려 친구관계가 파탄 나거나, 치정의 뒤얽힘이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예를 들어보면 끝이 없으리라.

  ......그런데, 슬슬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점심시간의 부실은, 침울한 분위기가 내려 쌓여 그 안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 부실의 색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하늘은 회색으로, 그 앞에 있는 푸른 하늘을 덮은 듯이 흐렸다.

  타이시의 짝사랑 상대가 이즈에 메구미 선배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이틀 정도, 우리들은 이즈에 선배에 관한 정보를 각자 모으고 있었다.

  유이가하마는 지인에게 평판을 묻고, 유키노시타는 교사의 평판을 탐문하고 그리고 나는 교내를 돌아다녔다.

  사람의 이야기는 과장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말을 반 정도만 들으며 모은 정보를 오늘 점심시간에 정리한 결과가 이와 같다.

  남자의 소문에 의하면, 귀엽다. 나한테도 상냥하다. 딱 한 번 만이라면 데이트해준다. 남자를 이것저것 번갈아 바꾼다. 재녀. 붙임성 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즐겁다.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싶다. 빈유. 빗치 등등

  여자의 소문에 의하면, 보통. 미인이지만 바보. 방화계(사건을 만든다). 뭔가 시끄럽다. 재미있다. 자신에 도취해 있다. 그보다 미인이 아니다. 글로리어스(glorious). 맹금류. 불판을 쿡쿡 찌른다. 친구로서는 괜찮다. 남친을 뺏겼다. 걔한테는 먹혀도 좋다, 기타 등등.

  덧붙이면 학년이 내려갈수록 평가가 나쁜 경향이 보였다.

  A4용지에 출력된 명조체들을 한 번 더 위에서 아래까지 보고서 무심결에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왠지 굉장하네, 이즈에 선배」


  유이가하마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는지, 뺨이 약간 경직돼 있었다.

  아니 뭐, 초면인 나나 타이시에게 그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할 수 있다니, 상당한 천연 혹은 노리고 하는 건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이런 평판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유이가하마의 중학교 선배에게 들어보니, 의외로 평판이 좋았다는 거네.」


  방금 전의 「미인이지만 바보」라는 건 유이가하마의 선배가 한 말이다. 어제 방과 후에 이야기를 들으러 갔지만, 그 선배는 깔깔하고 재미있는 듯이 웃으면서, 이즈에 선배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다만 세세한 부분에는 접하지 못하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든지, 보면 재미있는 애라든지 이렇게 대강으로밖에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슬슬 히키가야에게 일을 맡겨볼까?」


  내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유이가하마가 이 분위기에 질려서 스마트폰에 손을 뻗었을 무렵, 유키노시타가 제안했다.


「응? 일이라면 이걸 타자로 친다거나 했잖아.」

「더 이상의 현실도피는 그만두렴. 히키가야, 이즈에 선배와 약속(アポ)을 잡아줘.」


  요전부터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된다.

  습기 찬 공기 탓인지, 아니면 이 날씨에 끌린 건지, 약간 수그러들었던 교내의 어수선함이 한 층 더 의식된다.

  이미 세 명과의 점심식사는 여기서 끝났다. 어떻게 잘 질질 끌 수 없을까.


  「어포라는 건 appointment의 약자겠지. 그리고 appointment는 appoint를 명사화한 거고. 거기서 난 항상 생각해. ment를 뒤에 붙였을 뿐인데 존재감이 너무 강하지 않아? 형용사화하거나 부사화할 때는 수수하게 추가되는데, 왜 그것만 본체를 잡아먹을 정도가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 안 해?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히키가야?」


  유키노시타가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단 눈 안쪽이 묘하게 빛나고 있다.


「이즈에 선배와 만날 약속을 성립시키렴.」


  마침 뒤에서 기다려 마지않았던 벨이 울린다.

  유키노시타는 중간에 이론을 둘 여지를 일절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힛키? 내가 먼저 이즈에 선배한테 얘기해 볼까?」


  유이가하마가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본다.


「아니, 사양해둘게......」


  벨 소리가 끝날 때까지, 나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좋게 납득시킬만한 문구를 계속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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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번역한 미우라 SS가 제가 도저히 하루에 할 양이 아닌데 하루에 다 끝내고 탈력감에 빠져서 좀 늦었습니다;



  그 10 ~이즈에 메구미는 붙임성 좋은 미소를 뿌린다~




「앗, 형님! 여깁니다.」


  방과 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귀가부에 섞여서 정문 앞에 키리바나와 타이시가 멍하니 서 있었다.

  애들이 있는 데로 가서 근처를 둘러보지만 이 녀석들 외에 중학생은 아무도 없다.


「코마치는 어디 있어? 걔도 온다고 아침에 말했었는데」

「코마치는 수학 보충수업에 잡혔어요.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오빠로서 좀 걱정되는 정보였다. 그 녀석, 고등학교 수험은 소부고로 볼 거라 말했는데 과연 합격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나도 중학교 때 수학 때문에 보충수업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유전자라는 것은 상당히 영향력이 강한 듯하다.

  거무스름한 응회석으로 쌓아올린 담벼락에 등을 기대며, 강물의 흐름처럼 늘어가는 인파로 시선을 자유롭게 이리저리 옮긴다. 「꽤나 안 오네」라고 타이시가 유감스러운 듯이 중얼대고 있는데, 흘러내리는 듯한 흑발과 경단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오는 게 너무 빠르다구, 힛키」

「너희들이 늦어. 항상 잡담하면서 왜 방과 후까지 남아서 얘기하는 거냐......」


  귀가부 여자 그룹은 왠지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서 수다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라면 그렇게 해는 없지만, 교실 청소할 때까지 눌러 앉는 게 성가시다. 저 녀석들, 내가 책상을 옮기려고 하면 엄청 싫은 표정을 한다. 게다가 다른 반 녀석이.

  이걸로 일단은 전원이 모인 셈이다. 카와사키(누나)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쉬는 시간에 들었다. 아무튼, 남동생의 연애상담 도움 같은 건 브라콘 누나라면 받고 싶지는 않겠지.


「.....좋아, 다섯 명이서 붙어도 의심받을 뿐이고, 남자와 여자로 나눌까」

「그렇게 하면 제가 온 의미가 완전히 없어지는데요......」


  키리바나가 툭 중얼거린다.


「멀리서 그럴듯한 사람이 오면, 바로 합류하면 되잖아.」


  사실을 말하자면, 방금 전부터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인다. 키리바나와 타이시도 중학교 교복을 입은 채라서 여기에서는 매우 눈에 띈다.

  그 두 명이 우리들과 같이 있고 슬쩍 보기에는 딱히 아무것도 안 하고 말하고 있으니, 약간은 의심받겠지.


「그걸로 좋슴다.」


  주최자라고 할까 클라이언트의 의향에 의해, 두 패로 나뉘는 게 가결된다.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이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들 남자 진영이 교문에서 조금 떨어져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위치로, 키리바나 일행이 교문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근처에 심어진 방풍나무에 기대어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김에, 자연스럽게 물어본다.


「아무튼, 저기. 코마치는 학교에서 어때?」


 키리바나에게 가끔 듣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코마치와 친하기 때문에 약간 떨어진 시점에서 듣고 싶었던 거다.


「히키가야 말임까? 보통으로 인기 있슴다. 다정하고, 귀여워서 중심임다. 중심」


  무심코 안심한다. 코마치의 성격상, 잘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런데도 지뢰를 밟을 가능성은 항상 있으니, 약간 불안했던 것이다.


「......키리바나는 어때?」

「키리바나도 보통으로 인기 있슴다. 다만, 아름답고 어른스러워서 가끔 쩔쩔 맵니다.」


  ......보통인가, 아무튼 괜찮겠지.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와 얘기하는 키리바나를 본다. 어깨에 살짝 걸친 산들산들한 흑발과 높은 허리의 위치를 볼 때, 중학교 교복만 입지 않는다면 유키노시타 또래와 같은 나이로 보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연하로는 안 보이니, 타이시 나이 대 애들이 보면 많이 어른스러워 보이겠지.


「그렇게 치면, 너의 누나 쪽이 무섭잖아. 카와사키에 비하면 키리바나는 그렇게 엄청나진 않지.」

「아니아니, 누나는 무뚝뚝할 뿐임다.」

「......그런 건가」

「그렇슴다......」


  결국,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평가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나도 코마치의 장점과 같을 정도로 단점도 안다. 합치면 평가가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

  특별히 얘기할 거리도 떨어져서, 하교하는 학생들의 대화를 BGM 삼으며 다시 인파를 관찰한다.

  이러니저러니 충분히 보고 있었지만, 타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가끔 남학생이 지나갈 때, 키리바나 일행을 눈치 채고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게 눈에 들어온다.

  소부고 교복이 군청색을 바탕으로 한 블레이저 코트인 것에 반해, 키리바나는 흰색에 짙은 녹색을 조합한 세라복이다. 타이시는 아직 *가쿠란이라 우리들과 섞여서 그렇게 눈에 띄지 않지만, 아무래도 키리바나의 교복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 가쿠란 : 검은색에 단추만 박힌 형태의 남자 교복. 애니에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 녀석, 중학교 교복이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키리바나의 스타일에 중학생 전용의 디자인이라니, 아무래도 서로 맞지 않는다. 말투가 나쁘지만, 왠지 코스프레를 하는 것처럼 짝이 잘 맞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지적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서 키리바나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어느 쪽이냐면, 소부고처럼 정숙한 복장이 키리바나에게 어울릴 것이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키리바나는 세련된 색을 입는 때가 많았지.


「앗......! 아마, 저 사람임다.」


  타이시가 멀리 가리킨 쪽에 셋이서 걷는 여자 집단이 보인다. 멀리 떨어져서 얼굴까지는 잘 안 보이지만, 그 중 한 명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머리스타일과 체형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점심시간 정도.


「그 중간에 있는 짧은 머리 맞지?」

「그렇슴다. 틀림없어요.」


  노골적으로 보지 않게 조심하면서, 다섯 명이 얼굴을 맞대며 집단을 본다.

  가까워짐에 따라 얼굴이 확실하게 보이게 되자, 아까 전에 본 이즈에 메구미 선배라고 판별할 수 있었다. 역시 타이시가 만난 사람은 이즈에 선배였던 것 같다.

  3인조 가운데에서 즐거운 듯이 얘기하는 선배는, 조금 앞에 있는 나나 타이시를 눈치 챘는지 붙임성 좋은 미소를 듬뿍 실어서 손을 흔들어온다.


「지금 쟤네들, 아는 사람이야?」

「아니, 한 번 만난 적 있을 뿐이야.」

「또 그런 짓하고 있어......? ......너, 언젠가 찔릴 거야.」


  그대로 다른 화제로 넘어가며, 선배들은 내 앞을 지나간다. 같이 있던 살짝 웨이브한 여자가 흥미로운 듯이 우리들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선배들의 가녀린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타이시가 칠칠치 못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등을 두드려서 제정신으로 되돌린다.


「어떻슴까? 누군가 아는 사람 없슴까?」

「히키가야 군, 어떠니?」


  유키노시타가 나에게 묻는다.


「이즈에 메구미. 아마 3학년이고 다른 건 몰라.」

「하치만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키리바나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이야. 그것보다 유이가하마는 몰라?」

「본 적은 있을지도. 그래도 잘은 모른다고 할까. 다른 사람한테 물으면 알지도 모르는데......」


  뭐, 이즈에 선배는 3학년이니 유이가하마가 모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게 되면, 우선은 착실하게 정보수집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즈에 선배와 타이시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선배와 직접 얘기할 마음은 안 들지만.

  진짜 성가시다. 뭐가 성가시냐면 이렇게 되면 유이가하마의 힘에 전부 기대게 된다는 게 이미 좋지 않다.


「메구미 씨임까...... 좋은 이름이군요.」


  타이시가 넋을 잃고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다. 하지만 그 이름, 전국에 많이 있다고 생각해.


「우선 얼굴과 이름은 파악했어. 나머지는 본인에게 넌지시 확인하거나 소문을 들을 수밖에 없구나.」

「그렇군요. 죄송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은 해산?」


  유이가하마의 말에 유키노시타가 끄덕인다. 본인도 눈앞을 지나가버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다 해도 방과 후라면 사람이 적어서 듣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키리바나가 진짜 헛걸음을 하고 말았군. 오라고 한 게 나라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타이시는 카와사키와 돌아간다고 하고 메일을 쓰기 시작했으므로 키리바나 일행들과 마주본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는 가는 길에 쇼핑을 같이 할 거라고, 우리들에게 인사만 하고 먼저 돌아간다.


「......키리바나는 안 가?」

「조금 전에 코마치에게 출소했다는 메일이 와서, 보호 관찰이라도 할까 생각해서요.」


  왜 그렇게 재수 없는 비유를 하는 거냐.

  곧바로 카와사키가 타이시에게 와서, 유키노시타 애들과 같이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우리들 둘이 남겨진다.

  하교의 흐름이 일단락됐는지,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없다. 조금 전까지 이 근처를 지배했던 소란은, 멀리 들리는 운동부의 구호에 쓸려갔다. 더 있어도,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겠지.


「......돌아갈까」

「네, 돌아가요.」


  신록이 물든 가로수 길을 빠르게 걷는다. 이미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하늘은 물에 주홍색을 푼 듯한, 저녁노을이라고도 푸른 하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키리바나는 코마치에 비하면 걷는 속도가 빠르다. 그렇다기보다는 보폭이 나와 비슷한 탓인지,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하다.

  어렸을 때부터 코마치와 걸을 때에는 걷는 속도를 맞추라고 교육을 받아왔지만, 그런 점에서는 매우 편하다.


「카와사키 군과 언니, 사이가 좋네요.」


  우리들이 초등학교 무렵부터 있는 오래된 막과자가게를 지나갈 즈음에서 키리바나가 먼 곳을 다정하게 보며 말을 건다.


「카와사키도 브라콘이지만, 타이시도 꽤나 그래 보이던데.」

「카와사키 군도 학교에서는 그런대로 견실하게 행동하지만요. 그래서 좀 재미있고, 보기 좋았어요.」


  손을 뒤로 끼며 경쾌하게 걷는 키리바나의 표정은, 그 말대로 부드러웠다.

  다만 키리바나라 해도, 그 견실한 타이시에게 어른스럽다고 들었으니 그다지 변함없는 거겠지.


「뭐, 누이와 동생 사이가 좋은 건 다행이겠지. 만약 코마치에게 반항기가 오면 진심으로 울 거다.」


  실제로 아버지에게는 반항기는 오지 않았지만 권태기는 이미 왔으니까.


「둘은 충분히 사이가 좋으니 괜찮아요.」

「그래...」

「거기에 나는 코마치와 하치만 오빠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는 건 굉장히 좋아해요.」

「...............」

「아, 부끄러워요? 얼굴이 빨개요.」


  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아 가는 중, 키리바나는 짓궂은 표정을 띠며 웃고 있었다.

  석양 탓으로 하려고 그대로 입을 다물자, 키리바나도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걷는다. 이따금 그 표정을 들여다보고, 뭐가 즐거운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세계가 주홍색으로 전부 물들 때까지 키리바나의 표정이 바뀌지 않고, 나는 부끄러운 생각을 하며 귀로에 발자국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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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9 ~히키가야 하치만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태평한 학교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이 축포처럼 흐른다.

  판서하고 있던 가네다가 의외라는 듯이 시계를 올려다보고, 몇 명 정도가 벌써 필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가네다가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하자, 토베가 활기차게 호령하며 우리들에게도 점심시간이 온다.

  조금 전까지의 정적이 거짓말같이, 떠드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고등학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끄럽다. 대학생처럼 「웨이~」라고 하는 원시인 같은 대화는 없긴 하지만, 어쨌든 목소리가 크고 화제가 끊임없이 쏟아져서 언제까지나 메아리친다.

  여자가 세 명 모이면 떠들썩하다고 자주 말하지만,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남자 쪽이 크다. 그것이 한 방에 남녀가 섞여 40명이나 있으니, 그거야 시끄럽게도 될 거다.

  단지 이런 바보 같은 대화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각각의 그룹이 마구 큰 소리로 얘기하는 모습은, 어딘가 세력권을 두고 다투는 새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룹끼리 확실히 거리가 벌어진 것이 우습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스트가 높을수록 소리의 크기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인간은 아직 동물의 본능에서 해방되지는 못한 듯하다.

  살그머니 교실에서 탈출하고 평소 점심을 먹는 곳으로 가서 도시락을 펼친다.

  평소라면 냉동식품의 진화에 감동하면서, 한가롭게 뜨뜻한 점심을 즐길 때지만, 오늘은 기술의 진보를 즐기지 않고, 바로 위 속으로 흘려 넣는다. 평소보다 빨리 점심식사를 끝내고, 다시 교내로 돌아가서 교사를 산책하기로 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 적당히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후보일 것 같은 곳을 표시해두는 편이 좋다.

  다만 뭐라고 할까, 타이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시 남자는 단순하다. 하지만 창작물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느낄수록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로 돌아오니 아까 전까지의 햇볕이 사라져서 살짝 어둡다. 창문이 많은 것치고는 의외로 햇빛이 잘 안 들어오게 만든 건물은 의외로 많다.

  아직 교복을 입고 있을 1학년들의 층을 돌아다녔지만, 그럴 법한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황갈색 머리카락의 1학년이 조금 가까워졌지만, 그 사람은 머리 모양이 세미롱이었으니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그 귀여운 발랄함은 일부러 꾸민 거잖아. 어떻게 생각해도 약삭빠르다.

  어차피 돌아올 거니까 마지막에 2학년을 둘러보려는 생각으로 승강구에서 가장 가까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년마다 쓰는 계단이 올라가는 시스템이지만, 아무래도 이건 학교마다 다른 것 같다. 3학년이 1층, 2학년이 2층, 1학년이 3층이라는 식으로 학년이 오를 때마다 승강구에 가까워지는 시스템도 있는 것 같다.

  입체적인 위아래에 상석·말석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3학년이 되어 아침에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솔직히 부럽다. 익숙해지면서 시간관념이 없어지는 것은 어딜 가도 적용되는 규칙이다. 나도 앞으로 1년 지나면, 지금보다 빠듯한 시간에 등교하게 되겠지.

  3학년 층은 느긋한 분위기로 가득 찬, 반 정도 열린 창을 통해 5월의 따스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그것만으로 우리들 2학년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1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감을 내게 호소한다.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복도를 걸으며, 교실을 지나가면서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엿본다. 쇼트 컷을 표적으로 삼아서 찾아봤지만, 미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 누군가 찾고 있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뒤돌아봤더니 훌륭한 쇼트 컷 미인이 보기 좋게 서 있었다.

  세련된 브라운으로 물들인 머리카락과, 기복이 적은 몸매. 어딘가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교복을 일부러 흩뜨린 탓인지 친밀감을 준다. 이 층에 있다는 건 3학년이라는 걸까.

  그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어, 딱히 나를 의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왜 나한테 말을 걸었지?


「피, 피가 이어지지 않은, 생이별한 누나를 찾으러......」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적당한 말을 엉겹결에 하고 말았다.

  ......난 거짓말이 서투르구만.

  미인 선배는 이상하다는 듯이 교실 안을 보고,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 번 더 내 얼굴을 본다. 가느다랗고 고운 검지손가락이 사랑스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매우 신경 쓰인다.


「생이별했구나.」

「그래요, 어렸을 때는 자주 놀았는데, 누나가 이사를 가서. 크면 결혼하자고, 약속했지만요.」

「그랬구나. 그럼, 그 애의 이름을 알려줘, 이름. 난 아는 사람이 많아서, 들으면 소개할 수 있어.」

「......이름 말인가요?」

「그래, 이름. 결혼 약속했다면 기억하고 있겠지?」


  이름 같은 건 모른다고.

  적당히 이름을 생각하는 동안, 선배의 검지손가락이, 점점 동그라미를 그리는 움직임으로 바뀌며 내 눈앞까지 올라온다. 무의식중에 빙글빙글 도는 손가락을 쫓아서 시선이 이리저리 돌고 말았다.

  그 자세 그대로 잠시 동안 있었지만, 우리들 사이에 쌓이는 침묵과 훈련받는 개와 같은 기분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에요. 특별한 의미도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응. 아무튼 알았지만」


  꽃 피는 듯이 밝은 미소로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손가락을 제자리로 도로 돌리고는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 옆에서 손가락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 검지손가락으로 노는 게 버릇인가.

  한 번 더 선배를 봤더니 역시 타이시가 말한 특징에 부합한다. 어두운 갈색 머리에, 상대방을 많이 긴장시키지 않는 다정한 말투, 이런 사람이 둘 정도 있다면 이 학교의 여자 레벨을 수정해야 한다.


「응, 뭐 자세한 이유는 안 들어도 괜찮아. 그건 다음 기회에 들으면 되기도 하니까.」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한 발짝 다가와서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는 이즈에 메구미입니다. 당신은?」

「히, 히키가야 하치만입니다.」

「잘 부탁해, 히키가야 군」


  매끈매끈 고운 손을 뻗어왔지만, 그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고 말았다.

  머릿속의 천사가 엄청난 기세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아니아니, 절대로 이상하잖아. 이런 일로 하나하나 이름을 듣는다면 어딘가에서 스토커를 당할 거다.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내 손을 본 이즈에 선배는 천천히 뻗고 있던 손을 되돌린다. 그렇게 왠지 납득한 표정으로 수긍하고는, 다시 내 눈을 본다.


「저기, 왜 제게 말을 걸었습니까?」


  우선 목례만 하고 냉큼 떠나려고 했지만, 약간 신경 쓰여서 물어본다.


「음, 특이해서...... 아니, 썩은 눈을 가진 애가 살금살금 교실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선 말을 걸어 봤을 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심한 말을 들었다.

  말을 한 그 본인은 태연한 얼굴로 검지손가락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랄한 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하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으면 잘 부탁해.」


  내가 떠나기 전에, 이즈에 선배는 손을 흔들고 두 번째 교실로 유유히 들어간다.

  ......여기 당신 반이잖아.

  왠지 여우에게 홀렸다고 할까, 지나가는 비라도 만난 기분이다. 큰 피해는 없지만, 뭔가 마음에 항상 붙어 다니는 의미로.

  이대로 남은 교실도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이즈에 선배를 한 번 더 만나는 것도 싫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일단은 목적을 완수했으니 더 이상 움직여도 소용없다.

  교사가 낡아서인지 단차가 높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리를 딛고는 그대로 도서실로 향한다. 뭔가 읽을 건 아니지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도서실이 딱 적당하다.

  오래되어 잘 움직이지 않는 문을 열고 도서실로 들어가자, 공동 책상에서 조용히 독서하는 유키노시타가 눈에 들어온다.

  교내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처럼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도서실 안에서 책을 읽는 유키노시타는 아름답고,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휘감고 있다. 그 때문인지 큰 책상에는 빈 자리가 있는데도 유키노시타에게 가까운 사람은 없다.

  이 녀석, 점심시간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거였나. 역시 친구 없구만.

  어디에 앉을까 약간 고민했지만, 마침 보고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므로 유키노시타와 대각선상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억지스럽지 않다고 할까, 역시 나와 유키노시타는 이 위치관계가 가장 편하다.


「무슨 용무니?」


  유키노시타가 얼굴을 들어올리고 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여기에 왔더니 네가 있어서, 어제 건으로 마침 얘기하고 싶은 게 생겼어.」

「카와사키 군의 짝사랑 이야기?」

「짝사랑이라고 할까, 한눈에 반했지.」

「어느 쪽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잖니.」


  유키노시타는 읽다만 책에 꽃무늬 책갈피를 넣고는, 나에게 시선으로 계속 말하기를 재촉한다.

  닫힌 책 표지를 눈으로 쫓으면, 『걸리버 여행기』라고 쓰여 있다. ......흠, 영국 문학 중에서도 상당한 명작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림책에서의 『걸리버』에서는 소인국, 추가로 거인국까지를 그린 게 많다. 하지만, 스위프트의 원작에서는 앞의 둘에 더해서 천공의 나라와 그 제국, 그리고 높은 지성을 가진 말이 지배하는 나라를 방문한다.

  이 작품은 풍자 소설로서 당시의 영국에 대한 비판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뭐니뭐니 해도, 라퓨타의 원래 소재가 존재하니까.

  유키노시타의 눈이 점점 험해지는 것을 깨닫고, 남은 생각을 끊었다. 무심코 시타가 내려오는 장면까지 재생하고 말았다.


「방금 전의 일인데, 타이시가 반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만났어.」

「그래, 어떤 느낌이었니?」

「아마 계산으로 하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좋더라. 초면인데 나한테 말을 걸다니, 보통은 있을 수 없잖아.」


  초면 혹은, 이야기했던 적이 없는 여자에게 상냥하게 대해진 적은 초·중 합계 다섯 번 있다. 그 모두가 벌게임 혹은 깜짝쇼라는 결말이었지만. 즉 통계상, 친절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말을 거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어째서 히키가야 군이 말하면, 이렇게나 설득력이 있을까?」


  유키노시타는 기막히다는 듯이 숨을 내쉬고, 머리에 손을 대며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실제 체험이다...... 뭐 그러니, 역시 상대는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 이즈에 선배에게 애인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이시가 꽤나 반하지 않은 한은 사랑은 물거품이 되어 바로 스러지게 될 거다.

  뭐, 실연하게 돼도 그건 그거대로 타이시가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배워서, 어른으로 가는 계단을 한 발짝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약간은 동정을 금할 수 없다.


「그 부분은 지금 생각해서는 안 되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어느 쪽이든, 움직이고 난 뒤에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겠네.」

「뭔가, 흘러가는 대로구만」

「임기응변이라고 말해주렴.」


  잠시 침묵한 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벨이 울려 도서실내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먼저 실례할게. 또 방과 후에 만나자.」


  유키노시타도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뭔가 생각난 듯이 멈춰서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유이가하마가 분명히 5교시는 체육이라고 말했는데, 히키가야는 괜찮겠니?」

「......앗」


  5교시까지 남은 시간은 약 5분. 그 안에 나는 교실로 돌아가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까지 내려가야 한다. 대충 잡아도 7분 정도는 걸릴 거다. 그리고 옆에 있는 창문을 통해 교정을 들여다보니, 담소하면서 슬슬 나오는 하야마 그룹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무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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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8 ~카와사키 타이시의 만남~




「아, 오빠~ 여기야 여기!」


  사이제리아에 도착했더니, 종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린다.

  석양에 비치는 가게 안을 보면, 수업이 끝난 대학생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일을 땡땡이친다고 생각되는 샐러리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혼잡하지는 않다.

  다가온 점원에게 카와사키의 이름을 말하자, 납득한 표정을 짓고는 안쪽 테이블 석으로 안내했다.

  우리들을 알아차린 코마치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키리바나가 머리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지만, 예의 카와사키의 남동생은 우리들에게 등을 돌려서 앉아 있었다.


「그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코마치와 키리바나에게 대답하자, 카와사키의 남동생이 뒤돌아보고 일어선다.

  중학생답게 약간 짧은 머리에, 카와사키와 닮아 보이는 약간 기가 센 눈이 인상적이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친절한 분위기를 내는 꽤나 호청년이다. 이 상태라면, 숙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형님과 누님들임까? 불러내서 죄송함다.」

「누가 형님이냐, 죽인다.」


  무심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도 난 나쁘지 않다.


「야! 우리 동생한테 무슨 말이야?」

「그, 그래. 미안......」


  정정, 내가 나빴다.

  시선이 느껴져서 무심코 좌우를 보자, 카와사키 남매 이외의 시선이 얼굴에 꽂혀서 따갑다. ......아니, 유키노시타가 혼자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피식하며 웃고 있다.

  저런 모 런쳐 씨 같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보면, 사과할 수밖에 없잖아.


「자, 타이시도 제대로 자기소개 해.」

「아, 맞다. 카와사키 타이시임다, 히키가야와 키리바나의 반 친구입니다.」


  ......굉장해, 카와사키가 제대로 누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코마치는 제대로 맞는 발음으로 불리는구만......

  비어 있는 자리에 적당히 앉아, 드링크 바 4인 분을 주문하고 각자 좋아하는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 숨 돌린다.


「자, 그러면 카와사키 군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유키노시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말을 꺼냈다.

  타이시는 빨대를 입에서 빼고, 긴장한 얼굴로 등을 펴고는 「그렇슴다」라는 잘 모를 대답을 한다.

  왠지 모르게 옆에 앉은 키리바나의 얼굴을 봤지만, 흥미가 없는 듯이 컵 표면에 생긴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태로 보건대, 코마치와 키리바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히키가야와 키리바나는 알 거라 생각하는데, 소부고등학교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싶슴다.」

「그건, 너의 누나에게 들었어. 우리들이 알고 싶은 것을 자세한 사항이야.」

「아, 그렇군요.」


  그로부터 타이시가 말한 내용을 정리하면, 요컨대 이런 것 같다.

  요전 날 동아리를 마친 타이시는, 평소 다니던 통학로가 아니라 우회해서 돌아간 것 같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아, 아무튼, 서점에 가려고 했슴다.」라고 말을 흐리면서 대답했으니, 아마 그런 일이겠지.

  그리고 아무 일 없이 쇼핑을 마친 타이시는, 이미 해가 떨어져 군데군데 조명이 끊어진 가로등에 비치는 길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거기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둘러서 왔던 길로 돌아가봤지만, 이미 밤의 장막이 쏟아진 보도는, 가로등 빛만으로는 발밑을 보기에 충분치 못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서점까지의 길을 걸어갔다는 듯하다.

  서점도 가까워져서, 결국 타이시가 포기할 무렵, 타이시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쇼트 컷 여고생을 발견했다. 소부고 교복을 입은 그 여자의 손에는, 타이시의 지갑이 들려 있어서, 타이시는 바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놀란 듯이 타이시를 마주보고는


『다행이야. 여기에 떨어져 있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어.』


  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타이시에게 지갑을 전해줬다고 한다.

  그대로 타이시에게 등을 돌린 여자는, *뒤돌아보는 미인처럼 뒤돌아보고는, 『다음에는 잃어버리지 말고, 응?』이렇게 말하고, 타이시가 돌아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는 듯하다.

*뒤돌아보는 미인 : 일본의 그림.
http://www.tnm.jp/modules/r_collection/index.php?controller=dtl&colid=A60


  ......아무튼, 즉


「즉, 너는 그 여성에게 한눈에 반했다, 는 말이네.」


  유키노시타가 내 생각을 대변해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단지, 제대로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할까......」

「그렇다면 고등학교를 아니까, 정문에서 매복이라도 해서 감사의 말을 하면 되잖니?」


  유키노시타와 타이시가 서로 말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생각한다.

  뭐라고 할까,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할까, 이후에 뭔가 익살스럽게 끝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 여자가 실은 남자였다든지.

  무엇보다도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무는 여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


「저기, 키리바나. 너 이 얘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했어?」

「『네』 나 『아니요』라면 『아니요』인데, 『YES』나 『NO』라면 『YES』같은...」


  약간 멍한 상태로 키리바나가 대답한다.


「......그 속은?」

「본심은 상대의 변덕, 대항은 새로운 방식의 미인계, 예상 밖의 괴담이라는 거예요.」

「우연이군, 나도 미인계라는데 3천점 정도 걸겠어.」


  즉 나나 키리바나 둘 다, 타이시 쪽에 전혀 싹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아, 그래서 얘가 지루해보였던 건가.

  유이가하마는 허둥지둥, 카와사키는 기분이 나쁜 듯하고, 코마치는 재미있게 타이시의 변명을 듣고 있었지만, 마침내 타이시가 백기를 들었는지, 풀썩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렇슴다...... 할 수 있으면 이름과 남자친구가 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슴다. 그리고 좋아하는 타입이라든지」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는 게 좋았단다.」


  유키노시타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품위 있게 홍차에 입을 댄다.

  ......이 녀석, 중반부터 즐겼구만.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말을 흐리는 타이시도 잘못한 점이 있지만.


「찾는다고 해도 어떻게? 학년 같은 건 몰라?」

「어른스러웠슴다. 그리고 키는 누나 정도에, 약간 밝은 갈색 머리였습니다. 그리고 미인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같구나.」


  유키노시타가 말하는 대로다. 미인의 기준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눈이 현기증 날만한 금발이나, 불타는 듯한 적색이라면 찾아내기 쉽지만, 갈색 머리에 쇼트 컷이라는 건 해당되는 인물이 비교적 많다.

  게다가 그 여자를 찾아냈다 해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을 좋아하게 된 중학생이 있는데, 남자친구가 있는지 가르쳐 달라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우선, 카와사키 군에게 우리 학교 교문 앞에서 그 사람을 특정하게 해. 문제는 그 뒤야.」


  문제라는 건, 방금 전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거리낌 없이 애인의 유무나 좋아하는 타입을 묻는 건 뭔가 이상하다. 나와 유키노시타는 애초에 교우 관계가 전무하고, 유이가하마라 해도 다른 학년까지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턱에 손을 괴고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유키노시타는, 타이시를 위에서 아래로 뚫어지게 보고는, 혼자서 수긍한다.


「그리고, 몇 개 정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겠니? 카와사키 군에 대해 모른다면, 우리들도 어떻게 공격해갈지 결정할 수 없으니까. 아무튼 가치관 체크 같은 거야.」

「옙, 뭐든지 물어주세요!」


  타이시는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고, 손을 무릎 위에 둔다. 그거야, 유키노시타가 보면 긴장도 된다.

  그렇게 해서 간단한 문답이 시작된다. 유키노시타는 취미부터 시작해서 휴일을 보내는 방식, 장단점, 가족구성,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몇 촌까지인지 꼼꼼하게 물어간다.


「앗, 저도 괜찮아요?」

「상관없어, 부디 좋아할 대로」


  키리바나의 부탁에, 유키노시타는 부담없이 응했다. 물론 타이시에게는 확인을 하지 않고. ......그 키리바나에게 하는 배려를, 좀 더 주변에 나눠 달라고. 예를 들면 나라든지.


「복권에서 1억 엔에 당첨되면 어떻게 할 거야?」

「어이, 그거 필요한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적당히 떠오른 거잖아.

  그렇다 해도 복권을 사러 가는 아버지의 등은, 몇 번을 봐도 가슴에 꽂히는 게 있다. 만약 당첨됐다고 해도, 그 대부분은 대출을 갚는 것으로 나가는 것이 특히 슬프다.

  확실히 우리들은 꿈을 샀을 터인데, 실현된 뒤에 등장하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다.


「아니, 돈의 사용법이라는 건 생각보다는 사람의 성격이 많이 나오지 않나요?」


  무심코 납득해 버렸으므로, 그대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백만 엔 다발이 백 개 있는 것을 상상하는 한 편, 타이시는 비교적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답을 냈다.


「우선 집을 삽니다, 집. 그리고 외제차도 갖고 싶슴다.」


  꽤나 꿈에 흘러넘치고 있다. 역시 꿈의 이름을 쓰고 있을 뿐이다.

  키리바나는 천장을 보며 생각한 뒤, 웃음 띤 얼굴로 내게 손바닥을 향한다.


「참고하는 정도로 하치만 오빠 부디」

「우선 내게 백 만, 코마치에게 백 만을 나누겠지. 그 뒤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금하고, 주부 일을 하면서 사치한다.」

「여전히, 너는 변함없구나.」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집의 대출금은 아버지가 일해서 갚게 한다. 괜찮아, 앞으로 20년 정도 일할 뿐이니까!

  그 뒤에도 몇 개 정도 질문이 계속됐지만, 대부분이 집에 관한 화제였다. 아니, 중요하다면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걱정할 단계를 너무 건너뛰었잖아.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전부 대답한 타이시는, 녹초가 된 모습으로 테이블에 푹 엎드리고는 그대로 축 늘어진 채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무리임다. 세세한 종파까지 기억할 리가 없어요......」

「아무래도 신변에 이상한 건 없어 보이네. 누군가와 달리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머지는 상대방 나름일까?」

「저기, 제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필요한가요?」


  역시 키리바나도 궁금했는지 끼어들었다.


「어머, 친족 문제라는 것은 중요해. 본인들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렵고, 인연을 끊으려고 생각해도 금전이 관련되어 있어서 어려워.」


  확실히 그렇다. 가족이라는 것은 최소이자 최초의 사회 단위이기 때문에, 그 이상은 나눠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산 상속에는 가족이 가장 우선된다. 비록 서로 무관심해도, 사회가 인연을 만들어내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쐐기가 박힌다. 그것이 가족이다.

  키리바나가 「그렇군요. 고부문제에서도 타인을 마음대로 가족으로 연결시키니까 벌어지는 그런 문제겠네요.」라고 납득한 듯이 대답하자, 유키노시타가 좋은 제자를 둔 교사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런 키리바나의 머리가 좋은 점을, 유키노시타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다. 파장이 맞는다고 할까, 유이가하마와는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기 즐거운 타입인 것 같다.


「조금 전에도 말했는데, 우선 내일 방과 후에 소부고까지 와 줘도 괜찮겠니?」

「넵, 잘 부탁드립니다.」


  카와사키는 누나로서 끝까지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불만스러운 표정인 채로 의논은 결정되었다. 뭐, 동급생이라면 몰라도, 모르는 고등학생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말해봤자, 응원하기 어렵겠지.

  뜻밖의 의뢰인만큼, 왠지 귀찮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할지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면, 더 우울해진다.


「......맞다. 야, 너네들도 도와. 너희들이 말려들게 했잖냐.」

「아무튼, 그 말을 들으면 찔리니까......」


  코마치와 키리바나의 협력을 얻어낼 때 쯤 해서, 이 회합이 끝난다.


「소부고는 여자의 레벨이 높슴까? 누나야 어쨌든, 두 사람 모두 굉장하네요.」


  갈림길로 가는 도중, 여성진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후방에서 보고 있는데 타이시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건다.


「코마치, 키리바나와 같은 반인 시점에서, 남의 말이 아니잖아.......」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는 부가 같아도 반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면, 코마치, 키리바나와 같은 반이 귀중하다.


「게다가 그 분도 있고, 전 절대로 소부고에 들어갑니다.」


  뭔가 할 의욕이 넘쳐흐르는 타이시에게서 눈을 돌리고, 유키노시타 일행의 옆모습을 들여다본다.

  ......뭐, 비교적 여자 레벨은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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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7 ~히키가야 하치만은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다~


  세계가 한들한들하고 흔들린다.

  반투명한 얇은 막이 사이에 있는 것처럼 시야는 뿌옇고, 보이는 것을 잘 인식할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이름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

  어딘가에 내던져져서, 의식이 혼탁해진 것 같다.

  애매한 세계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완전히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전혀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 계속 있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말았다.

  마치 무너져 내리는 동화 세계에 있는 것 같다.

  모순점을 알아차릴 수 없다, 의문점이 떠오르지 않는다, 위화감이 소실되어 있다. 망가지기 시작한 인형처럼, 사라질 때까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모르는 채 계속 춤출 것이다.

  ......아아, 그래. 이런 현상을 꿈을 꾸는 거라 했었지.


―――――――


  갑작스럽게 의식이 되돌아와서 깨어난다.

  갑자기 의식이 돌아온 탓인지 몸이 튀어 올라, 책상을 흔들고 말았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음이 부실 내에 울려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아, 힛키 일어났어?」

「정말이지, 부 활동 중에 자다니 결국 머리까지 활동하지 않게 된 거니?」


  ......잠에서 막 깨어날 때 차가운 물을 퍼 맞은 기분이 되었다.

  한 번 머리를 흔들어, 의식을 깨운다. 희미해진 시야가 선명해져서 사고도 뚜렷해진다. 그렇게 해서 다시 얼굴을 들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평소처럼 보내고 있었다.


「일하지 않는 건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토츠카 이후, 아무도 상담하러 오지 않았잖아.」


  단지, 평소처럼 보내는 이유는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도 홍차를 훌쩍거리며,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의뢰가 없다는 건, 평화롭다는 증거야. 오히려 기뻐하렴.」

「아니, 그런 자취 생활하는 딸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해도......」


  연락이 없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딸에게 당하면 틀림없이 타격받는다고 생각한다.

  토츠카가 상담하러 오고 나서는, 뻐꾹새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너무너무 한가해서 손에 든 책을 다 읽자마자 졸려졌다.

  5월이 끝나서 낮은 벌써 더위가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저녁에는 4월의 향기가 남아, 얕은 잠을 자기에는 딱 좋을 정도의 기온이 되어 있다.


「그래도, 좀 그러네. 간단한 고민이라도 좋으니까, 상담하러 와주면 기쁠 텐데...」


  유이가하마가 번둥번둥하고 먼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다. 깨끗하고 맑게 갠 푸른 하늘은 평온 그 자체로, 어쩐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창을 통해서 침입하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취주악부가 연주하고 있을 관악기음이 한산한 교사 내에 울려 퍼진다. 확실히 이 광경은 평화 그 자체다.

  뭔가 방과 후에 홍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보내는 부로 변했다. 봉사부라고 하지만, 오히려 우리들이 학교에서 봉사되는 것 같다.


「애초에 지명도가 너무 낮잖아. 히라츠카 선생님의 소개만으로는 수가 너무 적어.」

「그럼, 포스터 같은 거 만들어보자! 뭔가 귀여운 거」

「포스터라......」


  머릿속으로 선전 포스터를 마음에 그려보지만, 마구 팝 같은 글씨체로, 「최근 난처해하는 당신!」이나 「고민해결!」이라든지 「신이 사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이런 어쩐지 수상쩍은 건강식품이나 종교 권유 같은 표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담하러 올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원래 봉사라는 것은, 말 자체로는 자원봉사 쪽 의미에 가깝다. 그것이 교외활동이 아니라, 학생을 돕는다는 건 이름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흔든다. 그 미묘한 표정을 봐서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만둘까. 아까 유키노시타가 말한 대로, 상담이 없는 게 제일이야.」


  게다가 상담이 오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다. 그렇다면 다소 한가한 정도가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네. 이 건은 일단 보류해두고, 또 필요해지면 꺼내기로 하자.」

「그래? 그래도 상담이 안 오는 건 좀 외롭네.」


  유이가하마가 안타까운 듯이 말하자, 대화가 끊겨 정적이 찾아온다.

  ......종이컵에 따라진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약간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아니면 미지근해져서 단 맛이 강해졌는지, 씁쓸한 단 맛이 계속 입 속에 남고 말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한가하다. 장마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약간 습기 찬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우리들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가, 봉사부라는 데 맞아?」



  지루함을 주체 못하고 다시 꾸벅꾸벅 졸려던 참에, 어쩐지 나른하면서도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흘러내릴 것 같은 흑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그 여자는, 봉사부내를 바라보고는, 야무져 보이는 눈으로 나를 힐끗 본다.

  ......그런데, 플리츠에서 쭉 뻗은 다리는 다소 본 기억이 있지만, 누구지?

  어디선가 만났을지도 모르지만, 내 착각이라면 엄청 쪽팔리니, 모르는 사람으로 친다.


「맞는데, 무슨 용건이니?」


  우리들을 대표해서 유키노시타가 대답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누구지? K로 시작하는 이름인 것 같은데. 카와사키......는, *매의 프린스 이름이고, 카와바타는 문필가이군. ......카메로는 원래 외국인이니까 아니다. 그보다 카메로는 첫 글자가 C였지. 나는 정신적으로 전혀 향상심이 없는, 바보일지도 모른다.

※ 매의 프린스 : 한 일본 야구선수의 별명


「카와사키잖아! 무슨 일이야?」


  처음에 생각난 게 정답이었나...... 다만 이름을 알았을 뿐, 어디서 만났는지는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다.

  난 이 학교 사람 대부분을 만난 적은 있지만,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로.


「유이가하마, 네가 아는 사람이야?」

「힛키, 카와사키. 같은 반이야......」


  카와사키에게 안 들리게 작은 소리로 묻자, 유이가하마가 기가 막혀하는 소리를 낸다.

  당연히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이다.


「너, 반 친구 정도는 기억해두렴......」

「저 쪽도, 날 기억 못하니 문제없어.」


  아직도 내 이름이 맞게 불린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선생들도 가끔 「히, 히키타...... 히키가야, 여기 읽어봐」라고 말하는 처지다.


「잘 노는 중에 미안한데, 상담할 게 있어.」


  놀란 나머지, 무심결에 셋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유키노시타도 약간 놀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유키노시타는 유키노시타대로 지루했던 것 같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건, 이것이다.


「어떤 상담이니?」

「아... 그, 그게, 뭐라고 할까......」


  카와사키는 조금 어색한 듯이, 눈을 돌리고 우물거린다.

  처음의 지기 싫어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어딘가 매우 망설이는 말에 위화감이 든다. 어떤 성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시원스럽게 말하는 성격이라 생각한다.


「남동생이 사람을 조사했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남동생?」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표를 띄운다.


「그래서, 그 동생은 어디 있니?」


  유키노시타가 은근히 왜 남동생 본인이 오지 않았는지를 물어본다. 확실히 본인이 오지 않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조금 몸을 내밀어서 카와사키의 뒤쪽을 봤지만, 물론 아무도 없다.

  역시, 그래서 미묘하게 서먹서먹한 거였나. 자신의 용건이라면 몰라도, 남동생의 대리라면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중학생이라서 지금은 여기에 없어. 일단 만나려고 하면, 바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휴대폰을 꺼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카와사키. 30년 정도 전이라면 엄청 긴 스커트를 입을 것 같은 외모와는 정반대로, 누이와 동생사이는 좋은 것 같다.

  다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라고 할까, 의뢰주가 중학생인 시점에서, 이 건의 흑막이 보인 것 같다. 그 여자애 둘이 비웃는 소리가 먼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그럼, 연락을 해줄 수 있겠니?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우리들이 뭘 해야 될지 몰라.」

「그래. 그럼 전화해볼게.」


  카와사키는 두 번 버튼을 누르고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전화하기 시작한다.

  그 조작 횟수가 적은 것을 봐서는, 남동생의 번호를 단축키에 넣었거나 이력이 맨 위에 있는 거겠지.

  ......이 녀석, 브라콘이군. 나도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어서 잘 안다.


「야, 유키노시타. 이 의뢰 받을 생각이야?」

「몰라. 그건 만나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어.」


  턱에 손을 대고 생각하는 유키노시타를 보고, 약간 안심한다. 샘플이 너무 적어 판단하기 곤란했지만, 아무래도 뭐든지 부탁한다고 맡는 건 아닌 듯하다.


「응. 그럼, 거기 사이제에서」


  통화하는 입에서 새어나온 소리를 생각하면, 카와사키의 남동생과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카와사키는 그 뒤에 한 두 마디를 하고는, 조심해서 오라는 주의를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외로, 누나 역할은 제대로 하는 것 같다.

  몸을 돌린 카와사키는, 나를 힐끗 보며 입을 연다.


「그럼, 준비하고 와줄 수 있겠어?」

「그래, 그럼 가볼까?」


  유키노시타는 티 컵에 남은 홍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서 나와 유이가하마에게 권한다.

  나도 유이가하마도 유키노시타를 따라 서둘러 홍차를 다 마시고는, 컵을 정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할 수 있으면 가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나중에 저 녀석들의 잔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연관되는 편이 마음도 편하고, 의뢰를 거절할 때도 이유를 갖다 붙이기 쉽다.


「그리고, 히키가야랬지? 너의 여동생들도 같이 있는 것 같던데」

「............」


  이 순간, 내가 카와사키의 남동생과 대면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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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6 ~둘의 성묘~
 

  어렸을 적의 이야기이다.

  서로의 딸 사이가 좋았던 히키가야가와 키리바나가는, 쌍방이 맞벌이라는 이유도 있어, 어느 한 쪽이 바쁠 때는 다른 한 쪽 집에 아이를 맡겼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는 코마치와 같이 키리바나의 집으로 가서 그대로 밤까지 보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 때 때때로 근처에서 상태를 보러 와서 우리들의 상대를 해 준 분이 있었다.

  키리바나의 할아버지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시간을 주체 못하는 노인답게,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거나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온화한 분이었다.

  코마치와 같이 놀러가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손주가 셋이 되어 곤란하다고 웃으며 우리들 셋을 돌봐주었다.

  나와도 가끔 오목을 두며 놀아주셨지만,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할아버지의 서재에 늘어선 장서였다. 여덟 다다미 정도 큰 방의 한 쪽을 다 메우던 책은, 본인이 이르길 아직 반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아이였던 나는 작은 도서관처럼 생각했고, 서재 문을 열었을 때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좋아서, 가끔 빌리러 와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하나라도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단다. 그러니 좋아할 대로 읽고, 자유롭게 즐기려무나.」 이렇게 할아버지가 한 말에 영향을 받은 나는, 그 이후로 더 혼자서 책을 읽게 되어갔다.

  ......뭐, 할아버지 탓에 나의 외톨이화에 박차가 가해진 건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런데도 친 조부모님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나와 코마치에게는 제 3조부라고도 할 수 있었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지금, 찬 무덤 아래에서 편히 잠들어 있다.


――――――――


  고운 쇄석이 깔린 길을 걸어가니, 자갈을 밟아서 나는 불협화음이 근처에 공허하게 퍼져나간다.

  그대로 문을 빠져나가 경내로 들어가자, 신불 상의 색을 바탕으로 한 포장과 신록의 대조가 어우러져, 왠지 그것만으로 조금 평온해진다.

  역에서 도보로 우리들 집 방향으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그 묘지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묘하러 간 적은 별로 없구나. 조부모님은 건강하시고, 키리바나의 할아버지 말고는, 가까운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추석에, 누가 잠들어 있는지 모르는 무덤에 가는 정도다.


「코마치는 안 불러도 돼?」

「코마치와는 가끔 가요. 그래서 오늘은 하치만 오빠가 참배하러 갔으면 해서」


  그대로 경내를 걸어갔더니, 곧바로 부지가 묘지로 변해간다.

  키리바나는 익숙한 손짓으로 국자와 통을 빌려서 통에 물을 채워간다. 약간 무거웠는지, 키리바나는 통을 들어 올리고는, 조금 휘청거리고 나서 통을 다시 한 번 둔다.

  할 수 없이 키리바나에게 국자를 빼앗아, 통을 오른손으로 들어 올린다.


「감사합니다.」

「왠지 익숙해 보이는데, 자주 와?」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떠오르면 할 수 있는 한 가고 있어요.」


  키리바나가 걷기 시작했으므로, 뒤따라간다.


「그렇다기보다는 싫은 거예요. 기일이나 무슨 주기나 추석, 그렇게 판에 박은 듯이 만나러 간다니, 왠지 불성실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떠올랐을 때 만나러 가는 편이, 기뻐해주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다지 넓지 않은 묘지라, 바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역시 자주 오는 기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몇 조 정도의 가족동반과 마주쳤지만, 경내는 조금 한산하다. 뭐, 성묘하러 가는 것이니, 이 정도로 조용한 게 딱 좋겠지.

  키리바나가의 무덤은 조금 오래돼서, 원래 있던 광택이 사라져 퇴색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주지 스님이 청소해줘서 그런지, 전체적인 더러움은 눈에 띄지 않고 제대로 손질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기억나?」


  문득 신경 쓰여서 키리바나에게 묻는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과연 사인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이 옳다면 80세가 되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을 테니, 노쇠하기에는 빨랐으리라.


「확실히 폐렴이라고 생각해요. 무슨 이유로 입원해서, 바로 그대로 돌아가셨으니」


  둘이서 묘석에 물을 붓고, 꽃 통에도 물을 따른다.

  그러고 보니 묘석에 물을 부을지 여부는 종파나 집안의 관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다만 무덤 위부터라고 해도, 고인의 머리에 물을 붓기가 꺼려지는 건 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사 온 꽃을 꽃 통에 세우고, 한 숨 돌린다.


「그나저나 향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제대로 가져왔으니, 괜찮아요. 여기 성냥도」


  키리바나는 토트백에서 향과 성냥을 꺼내고는, 조금 자랑스러운 듯이 보여준다.

  준비 만반이잖아......


「그럼, 이쪽이 주된 볼 일이었던 건가」

「그래요, 원래 성묘하려고 해서, 거리에서 꽃을 사서 가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마침 하치만 오빠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랬다니, 나도 키리바나와 마주쳐서 다행이다.

  2년이나 3년 정도지만, 많이 신세를 졌던 분이다. 그럼에도 참배하러 간 적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 뿐이다. 이런 기회가 없다면, 좀처럼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향에 불을 붙이자, 그 독특하고 건조한 냄새가 떠돌아 와, 어딘가 어릴 적을 생각나게 한다.

  그 후에는 둘이 앉아서, 손을 모아 합장한다.

  실없는 얘기를 할아버지에게 하고 얼굴을 들자 키리바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도 조금 빠르네요. 좀 더 오래 살아도 벌은 안 받을 텐데」

「그래도 귀여운 손주 같은 게 둘이나 늘어났잖아. 행복하지 않았을까?」

「......귀여운?」


  키리바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귀여웠단 말이다, 옛날에는.


「아무튼, 행복했었는지는 모르지만, 큰 불행은 없어서 다행이에요.」

「무슨 말이야?」


  조금 신경 쓰여서, 되묻는다.

  키리바나는 나를 향했던 얼굴을 정면으로 되돌리고 나서, 막힘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 지론입니다만, 사람은 행복을 얻는 것보다도 불행하게 되지 않는 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모두 행복해지는 데는 정원이 있어서, 모두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어요.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행복을 추구하면, 꿈이 깨져서 절망하거나 가난을 계속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일도 알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노미적 자살이네요.」


  키리바나는 한 숨 돌리고, 장식된 꽃 한 송이를 손에 든다.


「그래서, 누구나 타협을 하는 거예요. 멋진 사람과 결혼하기를 포기하거나, 뮤지션이 되기를 포기하고 회사원이 되는 것도 그 하나의 예에요. 좋아하는 게 없어도 참을 수는 있지만, 병들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참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불효라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지요. 나쁜 짓 같은 건 안 했는데, 불합리하게 죽는 일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우선, 이런 때는 불효가 되지 않았던 것을 기뻐하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살 수 있었던 게 고귀한 일이라는 것을, 전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키리바나는 묘석을 보는 채로 이야기를 끝내고, 말한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당분간 그대로 있자, 키리바나가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쩐지, 분위기를 무겁게 해서 미안해요.」

「뭐, 무덤 앞이니 어쩔 수 없잖아.」


  그 후, 향이 넘어지지 않게 깊이 넣고, 누구랄 것도 없이 일어서서 국자와 통을 돌려주러 간다.

  돌려주다가 가사를 입은 아저씨와 엇갈려서 우선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


「......저기, 그 사람은 스님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여기의 주지 스님이에요.」

「머리를 안 깎았네......」


  사원의 스님은 누구나 머리카락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뭔가 위화감이 든다. 종파에 따라 다른 건가.

  절 문을 빠져나와, 시계를 확인했더니 오후 2시가 다가오려는 중이었다.

  서로 특별히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는 길을 따라 걷는다.

  역시 오후의 햇볕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강렬해서, 5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열기가 자욱하다. 좀 더 엷게 입어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참, 그 꽃 얼마였지?」

「앗, 괜찮아요. 이번에는 제가 끌고 간 거고」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지.」


  그렇다고 할까, 만약 키리바나가 돈을 낸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것을 코마치가 알게 되면 진짜로 혼난다. 거기에 나도 상식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 다음에 참배하러 갈 때는 얘기할 테니까, 그 때는 하치만 오빠가 꽃을 사주세요.」


  키리바나는 마지못해하며, 그렇게 제안한다.

  지금 여기서 돈을 내는 것과 별반 다름없어 보이지만, 그게 좋다면 어쩔 수 없다.


「......그 때가 되면 코마치도 부르자.」

「그러네요. 셋이서 가요.」


  그렇게 말하고 키리바나는, 평소처럼 내 앞을 걸어 나간다.

  ......할아버지의 성묘를 한 탓인지, 어릴 적이 생각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키리바나에게 들었던 그 날, 나는 키리바나가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전혀 슬픈 내색 없이, 어딘가에서 흘러넘쳐 떨어진 것처럼, 단 한 방울만 눈물을 흘린 키리바나는 내가 알려주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이후로, 키리바나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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