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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novel.syosetu.org/38226/



  그 5 ~히키가야 하치만은 얼굴을 붉힌다~


  밖에 나오자 강렬한 햇빛이 찔러들어와서, 무심코 눈을 가늘게 뜬다.

  아직 날씨는 여름은커녕 장마도 조금 빠를 정도지만, 내리쬐는 햇볕의 강렬함은 이미 여름을 방불케 한다. 오존층은 대체 뭘 하는 거냐고 생각했지만, 저건 자외선만을 차단할 뿐, 햇빛 자체와는 관계없던가. 완전히 추억보정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예전 쪽이 햇볕도 약했던 것 같다.

  아직 오전인데 햇볕의 세기가 이 정도라면, 오후에는 더워질지도 모른다.

  자전거 보관대 같은 편리한 도구가 없는 우리 집에서, 방치된 자전거에 다리를 벌리고 서자,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뜨거워져 있었다.

  역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의외로 얼굴에 맞닿는 바람이 기분 좋다. 아무래도 공기 자체는 그렇게까지 뜨거워지진 않은 것 같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자전거의 최대의 적은 바람이다. 바닷가에 가까우면 겨울에는 강바람이라 불리는 바람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휘몰아치기 때문에, 갈 때도 올 때도 역풍이 된다는 이상한 현상에 휩싸이게 된다.

  돌아올 때는 순풍이겠거니 생각해서 힘낸 끝에, 돌아오는 길도 역풍이었던 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치만 오빠 아닌가요, 어딘가 가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돌아보자, 사복차림인 키리바나가 가까이 와있었다.

  검은 스타킹과 약간 밝은 베이지색 숏팬츠의 조합, 상체는 옅은 핑크색 블라우스로 그 가녀린 몸을 싸고 있다. 어깨에 가죽제 토트백을 맨, 그야말로 외출용 차림이었다.

  무심결에 발밑으로 눈을 돌리자, 굽이 낮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아무래도 키리바나의 눈높이가 나보다 높아질 일이 없어서인지, 안심한다.


「잠시 거리에 책이라도 사러 갈까 해서」


  그러고 보니 도시와 시골의 차이점 중에, 역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를 역명으로 부르는지, 거리라고 부르는지가 있는 것 같다. 지방도시일 경우, 기본적으로 번화가가 하나밖에 없다면 역명이 시읍면명과 같아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재지에 갔다 온다고 말하는 건,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우연이네요, 저도 밖에 볼 일이 있어요.」

「뭔가 사 가려고?」

「그런 거예요. ......맞다, 쇼핑한 뒤,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키리바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봐서, 머릿속의 일정표를 열어, 오늘 예정을 확인해보지만 보기 좋게 백지였다. 그렇다고 할까 전부가 공란이라는 점에서 일정표의 의미가 없다. 이 일정표는 두 번 다시 쓸 일은 없을 테지.


「무슨 일인데?」

「가보면 알아요. 하치만 오빠에게도 관계있는 거예요.」


  쇼핑이 끝나고 집에서 빈둥거리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할까.

  그런데도 키리바나의 말이 조금 신경 쓰인다. 키리바나와는 접점이 많은 것 같지만, 집 밖에서는 거의 없다. 그 키리바나와 나와 관련된다고 한 것은, 그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생각하고, 결론을 굳힌다.


「응, 그럼 가볼까」


  그렇게 말하고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면서 걷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걸어가기에는 약간 멀지만, 어쩔 수 없다. 자기보다도 어린 여자애가 걷는데, 나만 자전거를 타는 건 확실히 보기 흉하다.


「어? 자전거 태워주지 않을 거예요?」


  키리바나가 놀란 듯이, 나와 자전거를 교대로 보면서 물어본다. 왜 그렇게 당연한 듯이 물어보는 거냐......


「너 말야, 둘이 타는 건 도로 교통법 위반이라고.」


  애초에 합법이라도 태울 생각은 없다만.


「그래요? 그럼 걸어서 가요.」


  키리바나는 조금 불만어린 표정으로, 자전거 짐받이 부분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그대로 역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 걸음은 언제나처럼,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어떤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우선 역 근처까지 가서, 주륜장에 자전거를 세운다.

  그대로 역과 복합 시설로 된 쇼핑 몰로 가서, 안내판 앞에 선다. 여기 근처는 오후에는 항상 사람으로 혼잡하지만,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통행도 적고 약간 한산한 느낌이다.

  이 정도라면 서로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제 쇼핑은 다음에 하면 되고, 우선 서점부터 가볼까요?」


  키리바나가 그렇게 말해줘서, 에스컬레이터로 3층 서점으로 간다.


「적당히 사고 있을 테니, 여기 근처라도 둘러보고 있어.」

「아니요, 특별히 사고 싶은 것도 없으니, 뒤에서 보고 있을게요.」

「마음이 산란해져, 마음이」


  그렇게 대답해도, 키리바나는 뭐가 즐거운 건지, 기분이 좋은 듯이 있을 뿐이라, 포기하고 하드 커버 코너로 간다.

  신간을 위에서 아래까지 대충 보고,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 있는지 체크하고 있는데, 키리바나가 한 권을 손에 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팎을 진지한 눈으로 보면서, 뭔가를 생각하듯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너, 그 작가 좋아해?」

「좋아한다고 해야 할지, 전에 읽었던 게 재미있어서 신경이 쓰였는데, 조금 비싸네요.」


  키리바나는 갖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인 채, 약간 두께가 있는 책을 선반에 다시 둔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지갑을 열어보는데, 히구치(5천엔)와 눈이 마주친다. 약간 미묘하군.

  키리바나는 내 동작을 눈치 채고는, 기쁜 듯이 풀어진 표정으로


「괜찮아요. 우선은 아마존 리뷰라도 보고 생각할게요.」


  이렇게 말하며, 사랑스럽게 뒷걸음으로 책장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하는 말은 별로 사랑스럽지 않다. 아니, 뭐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이지만. 그나저나 너도 아마존 쓰는구만.

  그 후 문고본과 만화를 고민한 끝에 사서, 서점에서 나올 때는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밥은 어떻게 할까?」

「저는 아침밥을 늦게 먹어서, 아직 배가 비지는 않았어요.」

「실은 나도 별로 배고프진 않아.」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가볍게 토스트를 먹어서, 아직도 내 배는 배고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럼, 잠시 문구류를 보러가도 될까요?」

「별로 상관없는데...... 너의 볼 일이라는 건 그거야?」

「아니에요. 단지 모처럼 왔으니 잠깐 보러 가고 싶어서요.」


「그럼 가볼까요?」라고 기세 좋게 말하고, 키리바나가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으므로 그 뒤를 따라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자 고운 파스텔 색으로 칠해진 가게가 환영한다.

  쇼핑몰은 층마다 특색이 어느 정도 있어서, 손님이 대충 가도, 쇼핑하기 쉽게 설계되어 있는 곳이 많다. 이 5층은 생활 잡화를 메인으로 하는지, 문방구 외에는 부엌 용품이나 100엔 샵 등이 출전하고 있었다.

  역시 정오인 탓도 있어서, 에스컬레이터 자체는 약간 혼잡했지만 막상 내리자 사람들이 뜸하다.

  아무래도 쇼핑 자체는 느긋하게 할 수 있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니, 딱히 없어,」

「그렇다면 같이 돌아보지 않겠어요?」


  순간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방금 전에 같이 있게 한 것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일단 상대가 먼저 하자고는 했어도, 여기서 따라가지 않는 건 좋지 않다.


「네 뒤에서 보고 있을 테니, 적당히 돌아봐.」

「네, 감사합니다.」


  문방구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갖고 싶은 물건이 없어도 필기구나 쓸데없이 비싼 다기능 사무용품을 바라보다가, 정신 차리면 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심이 없는 호치키스라든지, 쓸데없이 멋있는 메모장이라든지, 왜 이렇게 남심을 자극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거냐. 거의 쓰지 않지만, 사고 싶어진다고.

  키리바나는 우선 필기용구 코너로 가서, 조금 고민하면서 볼펜을 고르고는, 그대로 시험 삼아 써보기 시작한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시험용으로 쓰는 종이를 봤더니 「우리들의 우정은 진짜 불멸!!」 이나 「카나야마 죽어」 라든지 「――태・극――」이라고 쓰여 있다. 이 거리의 인간관계가 왠지 불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녀석은 틀림없이 중2병이군.


「하치만 오빠, 유리 펜이 있어요.」

「응, 뭐야? 그 강도가 불안해 보이는 필기구는?」


  키리바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목을 돌리자, 반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펜이, 약간 파란 잉크와 같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군.

  재미있는 듯이 달려가는 키리바나를 따라 옆으로 다가갔더니, 아무래도 이것도 써볼 수 있는 것 같다.

  키리바나가 소유자 이름이 박힌 펜을 손에 들어, 잉크에 펜 끝을 담그고 똑바로 끌어올린다. 그러자 젖어보이던 흑색이 옆의 틈으로 스르르 들어간다.

  재주 좋게 잉크가 들어가서, 무심코 웅크리고 앉아서 보고 말았다. 원리는 잘 모르지만, 아마 어떤 압력이라도 작용하는 것이리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눈에 보이는 큰 현상을 일으킨다.

  잠시동안 투명한 유리에 칠흑이 채워져 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봤지만, 입술을 어루만지는 미지근한 한숨으로 의식이 되돌아온다.

  얼굴을 들자, 키리바나가 당장 뺨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유리 펜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할까 뺨이 붙지 않았을 뿐이지, 어깨는 맞닿아 있었다.

  키리바나는 지금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흥미로워 보이는 시선으로 펜 끝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무심코 담홍색의 요염한 입술이나, 윤기가 나는 옻나무 같은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키리바나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한숨이 얼굴에 닿아 간지럽다.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깨닫고, 펄쩍 뛰듯이 일어선다. 키리바나는 그대로였지만 이윽고 유리에 잉크가 다 스며들자, 준비된 종이에 스르륵 쓰기 시작한다.

  키리바나가 적당히 동그라미나 한자를 쓰는 동안, 찬장에 장식된 잉크 색을 보고 비교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라벨에 의하면 여러 안료를 써서 색을 낸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그마한 색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키리바나가 차분히 써서 다행이다. 이 얼굴의 열기가 가시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잠시 후 잉크가 닳았는지, 아쉬운 듯이 펜을 두고는 나를 돌아본다.


「의외로 오래 가네요. 이거라면 적당히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대로 아무것도 사지 않고, 키리바나가 출구로 바로 가길래 조금 갖고 싶어해 보이는 얼굴에 말을 건다.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안 사?」

「펜과 잉크를 사면, 그것만으로 용돈이 없어져요.」


  문구점에서 나와, 눈짓으로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묻는다.


「기다렸죠? 다음부터는 제 쇼핑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킨다. 아무래도 아래층에 유아, 아니 다른 볼 일이 있는듯하다. 아니 유아는 있겠지만.

  사람들을 헤치고 1층으로 내려간 뒤, 키리바나는 입구 바로 옆에 있는 꽃집으로 들어간다. 대강 살펴보자 다양한 색들의 꽃이 늘어서 있고, 남자가 들어가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꽃집 같은 데는 인생에서 한 번도 들어갔던 적이 없지.

  혼자서 가게 하는 것도 안 좋아서, 과감히 들어가자, 콧속을 살짝 찌르는 냄새가 떠돈다. 꽃집이라고 하면 좋은 향기려니 생각했는데, 여러 냄새가 섞여서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키리바나는 점원과 익숙한 듯이 말하고는, 이름 모를 꽃, 흰색, 노란색, 보라색 세 개를 고르고 한 다발로 포장해서 샀다.

  아까 전의 쇼핑이 너무 길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맥이 빠져버렸다.

  무거울 것 같아서 꽃다발에 손을 뻗지만 옆으로 피한다. 아무래도 자기 손으로 가져가고 싶은 것 같다.


「그럼, 가볼까요」

「아니, 어디에 가는지 듣지도 못했는데......」

「괜찮아요. 바로 알게 돼요.」


  다소 불안하지만, 입가에 웃음을 피우는 키리바나를 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곳에 끌려갈 일은 없겠지.

  얘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의외로 진지한 용건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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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4 ~소녀들의 걸즈 토크~




「그럼, 아카네랑 힛키는 소꿉친구라는 거네!」


  유이가하마가, 매우 건강에 안 좋아 보이는 색의 멜론 소다를 빨대로 얼음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대화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중이다.

  초면일 경우, 본심인지 어떤지는 둘째 치고 여자 쪽이 잘 이야기할 수 있다고 들었고, 이 중에 호전적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그 한 사람도 기본적으로는 반격 형이라, 도발하지 않으면 문제는 없기 때문에, 딱히 분위기가 나빠질 요소도 없을 것이다.


「일단 초등학생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돼요.」


  키리바나도 처음에는 조금 딱딱하기는 했지만, 바로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그 나름대로 터놓고 가볍게 농담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 키리바나와 만난 지 7년이나 됐나. 그렇게 생각하면 가족을 빼고는 가장 긴 관계가 된다. 만일 알고 지낸 연수를 막대그래프로 나타내면, 엄청 튀어나온 그래프가 완성되겠지.


「그 때는, 오빠도 귀여웠답니다. 두 분에게도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히키가야의 어릴 적이라...... 터무니없이 귀엽지 않은 아이밖에 상상할 수 없어.」


  코마치와 키리바나가 내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고도 우습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도 흥미로운 듯이 듣고 가끔 끼어들어서 즐기고 있다.

  여자들 간의 대화에는 아무래도 끼어들기 힘들다.

  애초에 화제 전개가 너무 빠를 뿐만 아니라, 패션 이야기로 막 들어간다. 게다가 난 이해 못할 외국어가 난무해서, 패션인지 해외 풍습을 말하는 건지 구별이 안 된다. 아직 세계사 인물 이름 쪽이 기억하기 쉬울 정도의 명사가 줄줄 늘어선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나는 세계사 교과서를 노려보는 중이다. 탈출은 못하지만, 구석에 있으므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아도 위화감은 없다.

  1616년, 누르하치와. 민족이 다르다고는 해도 왜 이 사람만 가타카나지? 게다가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이 기억하기 어렵고, 더 이상 쓰기 어려울 수가 없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이 세 명이지만...... 거기에 이 사람들 한 페이지에 들어가 있으니까.

  한자 쓰고 싫어서 세계사를 골랐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거냐고...... 게다가 세계사 담당은 시험에서 기뻐하며 한자 오류를 감점한다. 삼국지 전후의 시험에서 15점을 한자 오류로 틀렸을 때는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자, 여기 사진을 보세요. 정말 귀엽다구요.」


  코마치가 뭔가 불길한 제안을 한다. 내 어릴 적 사진 같은 건, 진짜 부끄러우니 그만둬. 게다가 그 뒤, 높은 확률로 졸업 앨범까지 보여줄 것 같아서 무섭다. 중학교 졸업문집 같은 건 흑역사에 불과하다.

  이대로 집으로 몰려오는 것도 난처해서, 키리바나에게 구원요청을 한다.


「키리바나, 어떻게 못해?」


  키리바나는 내 샤프를 들고, 내 교과서에 왠지 예서체로, 『무리예요』라고 쓴다. 역시 『무』는 예서가 빛나 아름답다. 행서나 초서는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을 알기 쉽지만, 예서에는 묘한 매력이 넘친다.

  ......그나저나, 왜 말로 안 하는 거지?

  한 번 더 재촉의 의미를 담아 샤프 머리로 키리바나를 찌르자, 키리바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러고 보니, 두 분 모두 예쁜데, 애인은 없나요?」


  라며 대화를 끊어준다. 어찌됐든 무른 녀석이다.


「나? ㄴ, 난 없다고 할까-」

「나도 없어.」


  우연이군, 실은 나도 없다.


「..........」


  뜻하지 않게 우리들 사이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흐른다. 내 유리잔의 얼음이 튀어,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코, 코마치는 어때? 둘 모두 귀여운데」

「우리들도 없어요. 아카네는 많이 고백받긴 하지만요.」


  ......이상하군,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외모가 좋은 녀석일 텐데.

  옆에 있는 키리바나를 슬쩍 보니, 손등을 턱에 괴고 있었다. 중학생답게 화장기는 없지만, 속눈썹은 적당히 위로 뻗어 있고 이렇게 봐도 용모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응? 고백된 사람들 중에 누군가랑 사귀려고 생각 안했어?」


  유이가하마가 조심스럽게 묻자, 유키노시타가 키리바나를 보충한다.


「고백되었다고 해서, 누군가와 교제하려고 하는 건 경솔한 생각이야.」


  아마, 이 중에 가장 많이 고백 받았을 유키노시타의 말이니만큼 설득력 있다. 이 녀석도 그 나름대로 고백 받고, 사귀지 않을 거냐고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댄 적이 있으리라.

  그리고 들은 적은 없지만, 키리바나도 동일한 사태에는 한 번 정도는 조우했을 것이다. 연애에 얽힌 화제는 놀랄만한 속도로 퍼지고, 누군가의 대화거리가 되고 만다.


「교제하려고 생각했던 적은 없네요.」

「누군가 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 이유가 아니지만요. ......뭐라 할까, 연애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교제하고, 데이트 같은 것을 하고, 상대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그런데도 상대방을 좋아할 수 없게 된다면 왠지 미안해지잖아요.」


  그건 일전에 미사키 군에게 했던 말과는 약간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차이가 나는 말이었다. 어쩐지 이 녀석,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어 보인다.

  의외로 진지한 말이라, 유이가하마가 조금 놀란다.


「그래서 저는, 제가 좋아하게 된 사람밖에 교제하지 않아요.」

「그래도 혹시, 그 사람한테 차이면 어떻게 할 거야?」

「그 때는, 단념하고 다른 사람이라도 찾을 거예요.」


  키리바나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도 전혀 입을 열지 못하고,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다. 코마치는 평소와 변함없다.

  확실히 거북한 분위기가 된 것이 신경 쓰였는지, 키리바나는 「슬슬 밥이라도 먹을까요」라고 말하고는 벨을 눌렀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주문하고, 드라마나 최근 유행하는 이야기를 하며 먹기 시작하자, 아까 전의 분위기가 지나가고, 마음 편한 대화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 새 밤의 장막이 내려와, 마을이 인공적이고 무기질적인 불빛에 비춰지기 시작한다. 코마치도 키리바나도 중학생이라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고는 그 자리는 끝이 났다.

  계산을 마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오자, 하늘은 먹물을 흘려 넣은 것처럼 물들어 있었다.

  여기부터라면 우리 집과 키리바나의 집이 가까워서, 우선은 코마치와 키리바나를 집까지 보내고, 거기부터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를 보내주러 간다.


「힛키랑 그렇게 가까운 애는 처음 봤어.」


  내 앞을 걷는 유이가하마가, 뒤돌아보며 말을 건다.

  유키노시타는 조금 전의 신호등에서 헤어졌다. 의외로 키리바나가 마음에 든 것 같아, 또 만나고 싶다고 약간 기분 좋은 듯이 말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알고 지낸 시간만은 기니까. 코마치 2호 같은 거야.」


  왠지 코마치 2호라고 하니 우주선 같이 들리는군, 이런 말이 머리 구석에서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좀 더 학교에서 붙임성 있게 말하면 좋을 텐데......」

「그걸 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 외톨이인 거다만」


  은둔형 외톨이라도, 가족과 대화를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뭐, 그 녀석은 예외 같은 거야.」


  어렸을 적은 코마치와 한 짝처럼 인식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하는 방식이 코마치와 비슷하게 되고 만다.

  조금 의식을 너무 해서 멀어진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여동생 이하, 아는 사람 이상이라는 관계로 자리 잡았다.

  최근 조명 빛이 희미해진 편의점 앞에, 같은 고등학교 사람들이 모인 것이 보여, 유이가하마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유이가하마는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알아챘는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봐, 그런 거」


  유이가하마가 볼을 부풀리면서 걸음을 멈추고, 내 옆에 나란히 선다.


「나랑 유키농이랑, 거리에 신경 쓰고 있지? 그래도, 뭔가 얘기하고 있어도 아카네한테는 그런 게 없으니까」

「..........」

「그러니까 우리들한테도, 좀 더 사양 안해주면 기쁠 것 같아.」


  유이가하마는 그 말만을 부끄러운 듯이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또 나를 앞서가기 시작한다.

  침묵을 메울 말을 찾았지만 찾지 못한 채 그대로 밤길을 걷자, 보기 좋게 줄선 주택가로 경치가 바뀐다.


「여기까지면 돼. 바래다줘서 고마워.」


  같은 간격으로 배치된 가로등 아래를 걷는, 유이가하마의 작은 등을 가만히 바라본 뒤, 나는 그대로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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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3 ~히키가야 코마치는 환희한다~


  수학,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문 중의 하나라고들 한다.

  세상은 온갖 숫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숫자를 조합하는 식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피라미드와 그리스 조각 등에 쓰인 황금비를 봐도, 그 아름다움은 압도적이다.

  음악, 정수론, 기하학, 천문학으로 세계의 본질을 해석하려고 한 고대인의 생각에도 납득이 간다. 세계가 아름답다면, 그 근원을 이루는 수학이 아름다운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학에도 중대한 결점이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수학을 잘 하는 사람에게 말을 시켜보면, 간단한 문제는 공식을 적용시킬 뿐인 듯하지만, 애당초 적용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어딘가의 시건방진 연하녀가 말하기로는 학교 수준의 수학은 암기인 것 같다만, 공식 이외에 뭘 외워야 할지.

  키리바나가 고등학교 수학을, 공식과 예제 하나를 본 것만으로 풀었을 때는, 진심으로 세상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그 문제, 내가 5분 걸려도 못 풀었는데.

  지금까지는 키리바나의 공부법으로 어떻게든 됐지만, 요즘 수학에서 시그마랬나, 어딘가의 보스 같은 놈과 조우하고 나서,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아무래도 록맨은 이과인 것 같다.

  그런 불안을 품으며, 근처의 가스트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근방에 있는 가스트는 학교에서 걸어서 30분,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도 없고, 가기에는 차가 최적인 입지라 같은 학교 사람과 만날 걱정도 별로 없다.

  아무튼, 저거다. 유이가하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원래 나는 혼자 공부하는 편이 아마도 효율이 좋으니 어쩔 수 없다.


「어라? 오빠?」


  대충 20분 정도 걸었을 무렵, 천사 같이 귀여운 목소리에 불려서 발을 멈췄다.

  뒤돌아보자 역시, 천사처럼 귀여운 소녀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천사라고까지는 말하진 않지만, 조금 덧없는 미소녀가 꼿꼿이 서 있었다.


「그래, 코마치였어? 뭐야, 저녁밥 안 만들어?」

「오빠가 밖에서 먹으면, 우리들도 외식하려고 해서」


  뭔가, 오늘은 아이가 없으니, 집안 부부끼리 먹자는 것 같은 이야기구만.


「시험도 가까워서 하는 김에, 밥 먹고 나서 공부하려고 한 거예요.」


  코마치의 이야기를 키리바나가 보충한다.

  과연, 학생이 생각하는 건 대부분 같겠지. 기본적으로 시험 기간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학교에서도 같은 시기에 치러진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시험 기간 중의 저녁에는, 맥도날드나 스타벅스에서 학생이 공부를 하는 모습도 드물진 않다.


「그래? 그러면 같이 먹을까? 가스토에 가려고 했는데......」

「가자가자! 역시 오빠! 저기, 뭐 먹을까?」

「제철 과일 파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네요. 누군가가 낸다면, 아마도 굉장히 맛있을 거라 생각해요.」


  오늘 밤 메뉴를 기쁜 듯이 얘기하는 코마치와 키리바나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그대로 가스토로 향한다.

  코마치와 키리바나와 같이 먹으면, 내 식비가 생계에 영향을 미칠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나나 엄마나 아빠도 키리바나에게는 무르다. 아들에게는 엄하지만. 그렇다면 같이 먹지 않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내가 한 턱 내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잖아.


―――――――


「있지, 아카네」

「응?」

「이거, 알려줘」


  쓴 맛이 강한 커피를 입에 대면서, 여자 둘이 얼굴을 바싹 옆으로 대고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키리바나가 어른스러운 건지, 아니면 코마치의 키도 어우러져서 어리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있으면 사이좋은 자매로 안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안 돼. 여동생을 정신없이 봐서 공부에 손이 가지 않다니, 마치 시스콘 같잖아.


「저기 하치만 오빠, 빤히 보면 공부하기 어려우니, 그만해주시면 좋겠어요.」

「미안, 코마치를 봤다.」

「우와... 속으로 생각한다면 모를까, 확실히 입으로 말하면 깨네, 오빠......」


  속으로 하면 허락해주는 부분이, 하치만한테 포인트가 높지만 말로 꺼내면 코마치의 호감도가 내려가서 그만둔다.


「그나저나 오빠, 동아리 안 가도 돼?」


  코마치가 노트와 눈씨름을 하며 물어본다. 아무래도 고전하는 듯하다.

  얼굴을 뻗어 들여다보니, 2차함수를 하고 있었다. 남매가 모두 수학이 약한 건, 부모가 서툴러서 그랬을 거다. 그러니 우리들이 수학을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원래, 봉사부라는 건 뭘 하는 곳인가요?」


  그에 반해 키리바나는 자신의 교과서를 거의 안 보고, 카페오레를 마시며 코마치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히 여유 넘치는 녀석이다.


「뭘 하는 곳인가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상담해주는 곳 같은 느낌이야.」


  애당초 상담은 두 건 정도밖에 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다. 평소에는 책만 읽을 뿐이고.

  키리바나는 할 말을 생각하듯이 입술에 손을 대고는


「과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라고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말한다.


「어이, 내가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고 말하는 거야?」

「아니아니 아카네, 오빠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할까 빨리 누군가가 보살펴 주지 않으려나~」


  전업주부 희망인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부양받을 생각으로 가득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할 수 있으면 길러줬으면 한다.

  다만, 오빠를 조금만 더 평가해줘도 좋지 않겠니? 코마치 양.


「그나저나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활동 같은 건 안 해. 틈만 나면 남의 약점을 찌르는 녀석이나 자각 없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녀석이라든지, 그런 녀석들뿐이다.」


  그렇다고 할까 그 둘 뿐이지만. 원래 저 녀석들에 대해서 둘에게 말했던가? 동아리에 들어간 것까지는 말한 것 같은데.


「어머, 나는 사실을 말할 뿐인데, 히키가야」


  어라라? 이상하다. 여기에 없어야 할 유키노시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흠칫흠칫 얼굴을 들자, 실망한듯한 표정을 짓는 유키노시타와 어색한 듯이 쓴 웃음을 짓는 유이가하마가 눈에 들어온다. 일단 머리를 눌러 콧날을 살짝 문지르고는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환각은 아닌 것 같다.


「너희들, 사이제 간 거 아니야?」

「아니, 사이제는 사람 많아서......」


  왜 둘을 피해도, 만나게 되는 걸까.


「오빠~아, 저기, 누구! 누구! 오빠 아는 사람?」


  코마치가 몹시 기쁜 듯이 일어서서는 사회인이냐고 말하고 싶어질 만한 저자세로 둘에게 인사하러 간다.


「항상 오빠가 신세지고 있어요. 네, 히키가야의 여동생인 히키가야 코마치예요.」


  뭐야, 그 자기소개는. 그대로 명함을 건네줄 기세잖아.

  코마치의 기세에 조금 압도되면서, 약간 당황하던 유키노시타였지만, 바로 표정을 되돌린다. 코마치와는 텐션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유이가하마는, 어쩐지 하고 싶은 말을 잘 못해 보이는 상태로, 코마치에게서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키노시타 유키노입니다. 히키가야와 같은 봉사부에 있습니다.」

「처, 처음 봬요. 힛키의 반 친구인 유이가하마 유이예요......」

「처음 봬요......?」


  왠지 유이가하마의 자기소개에 고개를 갸웃거린 코마치였지만, 잠꼬대처럼 「처음 봬요?」라고 몇 번 중얼대고는 납득한 듯이 표정을 활짝 폈다.

  야, 뭐에 납득한 거야?


「처음 뵙겠습니다. 그럼 자~자~ 앉아주세요.」

「......어이, 우선 너도 인사해둬」


  입을 열어, 멍 때리는 키리바나를 재촉한다. 키리바나는 봉사부 둘과 나를 교대로 보고는 코마치처럼 일어나서 봉사부 둘 앞으로 뛰쳐나갔다.

  ......둘에게 놀랐는지, 키리바나의 동작이 평소보다 느릿느릿한 게 신경 쓰인다.


「......코마치의 친구인 키리바나 아카네입니다.」


  키리바나가 약간 소극적으로 자기소개를 하자,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도 동요한 듯이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린다.


「엄청 귀엽네.」 「귀엽네.」 「상상 이상이었어!」 「그래, 설마 이런 애가 히키가야의 여동생이었다니......」 「어? ......그 쪽?」 「......다른 거니?」 「아니, 그게! 아카네 쪽」 「그녀는..... 귀엽다기보다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어른스럽지」 「확실히, 중학교 3학년이랬지?」 「왠지 어른스러움에서도 진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유이가하마」 「......유키농!」 「어른스러움만이 여성의 매력은 아니란다.」 「부정해주지 않아!」


  ......이 녀석들, 목소리 음량을 줄일 생각이 전혀 없다. 눈앞에서 그런 얘기를 해서, 키리바나가 약간 거북한 듯이 눈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건 이거대로 드물어서 좀 재미있다.

  그나저나, 중간부터 만담으로 바뀌었잖아.

  대충 자기소개가 끝나자, 코마치가 키리바나를 원래 앉았던 자리의 반대――즉 내 옆으로 밀어 넣고는, 테이블에 널린 공부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 여기요. 모처럼 이니까 같이 얘기하자구요.」


  코마치도 그렇게 말하고는, 이쪽 편 테이블로 온다.

  키리바나가 자리에 앉을 때, 내 귀에 손을 대고 속삭인다. 키리바나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귀에 닿아, 약간 간지럽다.


「뭔가, 대단히 아름다운 사람과 대단히 귀여운 사람이네요.」


  부정도 긍정도 하기 어려워서 침묵을 지킨다. 키리바나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그대로 자리에 앉는다.

  원래부터 테이블석이라 세 명이 앉을 수 있지만, 확실히 좁다. 키리바나의 팔꿈치가 몸에 때때로 닿는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도, 서로 눈을 맞대고는 자리에 앉는다. 아무래도 돌아가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오른쪽을 보자 창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음, 오늘도 활기차게 눈이 썩었군. ......정면을 보자, 유이가하마가 약간 기분이 안 좋은 듯이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키리바나가, 홀짝홀짝 카페오레를 마시고 있다.

  왠지 경찰차로 연행되는 기분이 들어, 의미도 없이 텐션이 내려간다. 뭐, 탄 적은 없지만......

  이렇게 둘러싸이면 이유 없이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선 키리바나가 일어서 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키리바나에게 말을 건다.


「저기, 나, 이제 돌아가도 돼?」


  키리바나는 코마치부터 시작해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그리고 나를 천천히 돌아본다.


「......그 쪽에 유리창이 있지 않아요?」

「그래, 있는데」

「돌파해 보시겠어요?」


  굉장히 뒤숭숭한 제안이 미소와 함께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가게 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할리우드 같이 돌아가야 하는 건데?」


  지금 가볍게 두드려 봤는데, 이 유리창 상당히 두껍다고.

  그런 식으로 키리바나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중, 코마치와 유이가하마가 이쪽을 가만히 보는 것을 깨달았다.


「오빠-아, 아카네-에. 장난치는 건 거기까지야」

「역시 사이가 좋아......」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점원이, 봉사부 둘에게 물을 주러 와서 키리바나와 얘기하던 것을 멈춘다. 점원은 몹시 정중하게 물을 두고,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는, 그대로 떠난다.

  ......반대 입장이었으면 틀림없이 나도 저주했겠지.



  그 2 ~유이가하마 유이는 동요한다~


「슬슬 중간고사인데, 벌써 공부 같은 거 하고 있어?」


  유이가하마가 홍차에 숨을 후후 불면서, 말을 건다.

  숨이 닿은 홍차가, 수면에 연달아 물결을 만들어, 하얀 김을 흩뜨리기 시작하고는, 바로 사라져간다.

  창문에서는 5월 치고는 약간 뜨거운 바람이 흘러들어와, 커튼을 끊임없이 펄럭이면서 우리들의 뺨 근처에 와 있다.

  유이가하마가 의뢰하러 와서, 그대로 봉사부에 들어왔지만, 이미 상당히 친숙해진 것 같다. 이처럼 평범한 이야기도 하고, 방과 후 당연한 듯이 얼굴을 내민다. ......친숙해졌다고 할까, 나와 유키노시타가 길들여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도 공부를 하기 때문에, 시험이 다가왔다고 해서 특별히 공부를 하진 않아.」

「아하, 역시 유키농이야. 힛키는?」

「수학 이외의 과목이라면, 공부 안 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거의 손대지 않았어.」


  국어나 영어는, 평소의 수업을 들었으면 평균 정도는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만일을 위해, 시험 전 쉬는 시간에 단어나 한자를 확인하면, 우선 낙제점을 피할 수 있다.

  수학은 기본 공식만 외워, 처음의 간단한 문제에서만 점수를 벌어서 회피한다. 애당초 점수를 얻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의외로 어떻게든 된다.


「어머, 히키가야. 현실도피는 안 된단다. 자랑의 국어는 공부하지 않는 거니?」

「어딘가의 국어 1위가, 성격이 못돼서 말이지. 1위가 되어 성격이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공부에도 손이 안 간다고.」

「그럼, 나도 3위가 되지 않게 조심하겠어. 눈이 썩고 싶지 않은 걸.」


  ......상당한 반격을 받고 말았다.

  유키노시타는 나를 이겨서 기분이 좋은지, 입가가 조금 풀어져서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 그래도 말야. 나라든가, 언제나 낙제점 빠듯해서, 유키농이나 힛키가 부러워.」


  유이가하마가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지만, 그대로 유키노시타에게 돌린다. 유키노시타는 기가 막힌 듯이 한숨을 쉬고, 유이가하마를 바라본다.


「원래 학교 시험은, 최소한의 점수는 확보하게 만들어지니, 요점을 파악한다면, 낙제점을 받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러고 보니 키리바나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 코마치가 공부하는 옆에서 만화를 읽는 것을 보고 뭐라 했더니, 「왜냐면 시험이라는 건,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거잖아요.」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덧붙여서,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면서 학년에서 수석을 차지했던 적이 없는 것을 야유를 섞어 물어봤더니, 키리바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애초에 80점을 받는 공부와 100점을 받는 공부는 완전 달라요. 대체로 공부량의 차이로는 2배 정도일까요. 그러니, 이렇다 할 목적이 없다면, 80점을 받는 공부를 하는 쪽이 현명해요.」라는 건 키리바나의 말이다. 무심결에 납득하고 말았던 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머리가 이상한 애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못하니까, 난처한 건데. 저기, 유키농. 오늘 이따가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힛키도」

「나는 상관없어.」


  의외로 유키노시타가 바로 동의한다.

  의외로, 유키노시타는 남을 잘 돌봐주지. 유이가하마에게 요리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힛키는 어때? 아- 그래도, 실은 시험 같은 건, 없는 게 가장 좋지.」

「아아, 완전히 그 말대로다.」


  무심결에 동의하자, 유이가하마가 눈을 둥글게 뜨고, 나를 본다.

  그것에 반해 유키노시타는 전혀 놀라지 않고, 봄 날씨와 같은 사악...... 어흠 따스한 미소를 띠고 있다.


「히키가야는 학원생활에 좋은 추억이 없는 거네.」

「애초에 시험 같은 것에 싫은 생각밖에 안 들지. 생각해 봐, 저거다. 평소 거의 말한 적이 없는데, 시험 전에 갑자기 시험범위를 물어보는 놈.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경우가 있지. 시험범위를 타인에게 묻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람은 제법 있어. 보통으로 물어본다면, 가르쳐주겠지만 왠지 그런 말을 들으면 가르쳐줄 기분이 들지 않게 돼.」

「아하하... 난 그럴 때가 있어서, 좀 찔리는데」


  1년간 시험 전밖에, 얘기한 적 없는 놈이 몇 명이려나. 그보다, 시험범위를 누군가에게 듣는 것을 전제로, 빠뜨리고 못 듣는 게 애당초 잘못됐잖아.

  잠깐 쓴 웃음을 짓던 유이가하마였지만, 깜짝하고 무언가 생각난 표정을 짓는다.


「마, 맞다, 힛키. 메, 메일주소 알려줘. 자, 같은 반이고, 시험 범위 같은 거 못 들었으면 물어봐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고, 액세서리 투성인 핸드폰이라고 할까, *마리모 같은 것을 짤랑짤랑 울리며 꺼낸다.

※ 마리모 : 해초의 일종

  그건 이미 쓰기 어렵다는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


「뭐...... 상관없는데. 자, 이 스마트폰으로 주소를 주고받은 적이 없으니, 미안하다만 네가 해줘.」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밀어서 미끄러지게 한다. 생각보다는 세게 밀었지만, 정확히 유이가하마의 눈앞으로 잘 미끄러져 들어갔다.

  유이가하마는 눈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쭈뼛쭈뼛 만지고는, 흠칫흠칫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만지고 나서 말하기도 좀 그런데, 폰 봐도 되는 거야?」

「어차피, 여동생이나 아마존에서만 오니까. 딱히 누가 봐도 곤란한 건 없어.」


  조금 전까지는 요즘 실적이 나빠진 대형 햄버거 체인점 메일 매거진 등록을 했었지만, 지금은 해제했다. 월요일 수업 중, 신상품 이름을 보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점심시간에 먹으러 가고 싶어지잖아.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던 중 마침, 내 스마트폰이 화려하게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보다 말하던 중에 딱 맞게 울렸고. 그나저나 착신음이 웅장해!」

「『운명』의 제 4악장 서두네. 의외구나, 히키가야에게 그런 교양이 있었다니」

「옛날에 메일이 올 때 기뻐서 말이지. 메일이 오자마자 알 수 있게 했는데, 오지 않는 착신음만이 남았다.」


  다스 베이더의 테마나, 비장하게 바꾸는 것도 몇 번인가 검토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슬퍼서 각하했다.


「아무튼, 별 볼일 없는 메일일 테니, 그냥 내버려둬」

「음...... 그게...」


  뭔가 미묘하게 반응이 나쁘다.

  유이가하마는 내 스마트폰을 불안하게 보는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스마트폰을 약간 세게 잡는 게 내 눈에 비친다.


「저기, 힛키 폰에 여자애한테서 메일이 왔어......」


  유이가하마가 보인 화면에는, 「키리바나 아카네」라는 글자와 최근 본문에 『오늘 저녁밥 뭔가 먹고 싶은 거 있어요?』라고 쓰여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엄마가 늦는다고 아침에 말했었지. 그 말은 코마치와 같이 밥이라도 만든다는 걸까.


「아- 걔는 여동생의 친구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


  그렇다고 할까, 이런 메일 같은 건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올지 말지 할 빈도다. 어떤 의미로는 정시 보고 같은 거라서, 다가오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아, 그래도, 보통 친구 오빠한테 밥 만들어주진 않잖아, 유키농」

「그러네, 히키가야, 자백한다면 지금이야. 협박을 한 거니? 아니면 돈을 줬어? 지금이라면 평생 경멸하는 정도로 봐줄 테니까」


  뭔가 심한 오해를 받는 것 같다.

  특히 유키노시타는, 평소의 점잖은 표정이,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창문에서 봄의 따스한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유키노시타의 주변은 지독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무언가가 감돈다.


「아니, 오히려 약점 잡힌 쪽은 난데」


  어울린 날짜를 고려해보면, 키리바나는 내가 발광할만한 추억을 꽤 많이 안다. 놀렸다가는 자칫, 3배 이상으로 되돌아오므로 나와 키리바나 사이에는 상호 불간섭이 체결되어 있다.


「그보다 저거다. 이 메일을 무시하면, 저녁밥이 내가 싫어하는 것 투성이가 되니까.」


  전에 한 번 메일을 방치했더니, 그 날 저녁식사가 전부 버섯이나 토마토를 쓴 요리가 됐다. 게다가 가늘게 썰어 요리에 섞어서, 그것만을 피할 수도 없었다.

  어쩐지, 여동생의 친구라기보다는 시어머니와 싸우는 신부 같은 느낌이다. 물론 시어머니는 나다.


「어머, 연하의 여자애에게 그런 취급을 받다니, 역시 히키가야네.」


  역시 유키노시타 님은 매우 기쁜 듯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입 언저리가 올라가 있잖아.


「여, 여동생은 몇 살이야?」


  유이가하마가 물어본다.


「......올해로 중학교 3학년이 된다.」

「주, 중학교 3학년한테 요리로 졌어......」


  책상에 푹 엎드린 유이가하마가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애수가 감도는 등을 보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뭐, 연하에게 진다는 건 우리들 나이에서는 꽤나 뼈아프지.

  유키노시타도 조금 불쌍히 여겼는지, 시간을 들여 말을 고른 뒤에 말한다.


「유이가하마, 사람에게는 적성이 있어. 그러니 중학생인데 요리를 잘하는 아이가 있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

「신경 쓰인다구. 그나저나!」


  유이가하마는 기세 좋게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가리킨다.


「그 아카네하고 사귀는 거야? 힛키?」


뭐야, 그런 거였나.


「너 말이다, 나한테 여친이 있다면 유키노시타에게 성대하게 자랑하고, 깔보는 발언을 고치게 할 거라고.」

「확실히 히키가야에게 여친이 있다면, 그 정도는 할 것 같네.」


  자신이 말하는 것과 남에게 듣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그보다, 유키노시타의 눈이 미묘하게 웃지 않는 게 꽤 무섭다. 혹시 깔보면서 말해도, 무언가 보복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 진짜로 여친 없어?」

「아까 전에도 말했잖아. 그렇게 훌륭한 게 있으면, 냉큼 자랑했다.」


  애초에 친구가 없는 놈이 여친을 만들 수 있을까? 앗, 네네 양이 있었나......


「그래? 그렇구나......」


  유이가하마는 안도한 듯이 숨을 내쉰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따스했기 때문에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내 스마트폰을 마주 본 유이가하마는, 약간 쓰기 어려운 듯하면서도 자신의 주소를 입력하고 메일을 보낸다.


「자, 이게 내 주소니까, 메일하면 꼭 답장해주기야.」


  그렇게 말하고 유이가하마의 연락처에 실린 내 이름을 기쁜 듯이 보여준다.

  빛이 비치는 탓에 약간 보기 불편한 화면에는, 별명 투성이로 전혀 판별할 수 없는 중에 「☆★힛키★☆」라는 글자가 춤추고 있다. ......그 관리법으로는 5년 정도 뒤에 다시 봤을 때 누군지 모르게 되어, 「어라? 이 누룩, 그 누룩 맞지?」이런 식으로 난처해질 거다.


「슬슬 수다는 마치고, 공부를 하자.」


 유키노시타가 나무란다.


「어? 공부는 사이제 가서 하려고 했는데」


  나왔다, 사이제. 왜 고등학생이란 것들은 카페가 아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는 걸까. 게다가 저 녀석들, 게임부터 숙제까지 전부 한다.

  나도 예전에는 사이제를 이용했던 적이 있었지만, 우연히 들어가는 타이밍이 같았던 2인조 여대생과 같은 그룹으로 오해받아 그 2인조에게 「뭐? 기분 나쁜데」 이런 시선에 노출되어 게다가 자리가 옆이라, 엄청 거북스럽게 식사하고 난 뒤로는,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집중할 수 없지 않겠니?」

「괜찮다니까, 오히려 모르는 게 생기면 묻기 쉽고, 힛키도 갈 거지?」


  솔직히 말해서, 딱히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지만, 이대로 코마치와 키리바나의 밥을 먹는 것도 평범해서 재미가 없다. 이렇게 말해도, 이 녀석들과 공부하는 것도 어딘가, 긴장되겠지.


「난 사양해둘게.」

「으~음, 다음에는 셋이서 공부하자. 그럼 되잖아, 힛키?」


  솔직히 말해서, 다음에도 사양하고 싶으니, 말끝을 흐려두자.


「뭐..... 생각해볼게.」

「그럼, 다음에는 같이 공부하자! 유키농, 그럼 사이제 갈까?」


  유이가하마가 활기 띤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선, 스마트폰을 꺼내서 코마치에게 『오늘 저녁밥은 필요 없어』라고 보낸다. 어차피 코마치와 키리바나는 같이 있을 테니, 전해지겠지.

  시험이 가깝고, 나도 앞으로 좀만 이따가, *가스토에 가자.

※ 가스토 :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

http://novel.syosetu.org/38226/



 

  히키가야 하치만

  그 1 ~키리바나 아카네는 납득하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생물이다.

  주변에 휘둘리고, 분위기에 흘러가고, 물에 흘려지고, 시간에 쓸려간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도둑질을 해서 보도되거나, 「어라? 그거 될 것 같은데?」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고백을 하고 옥쇄한다. 괴롭혔던 놈이 성인식 때, 멋대로 과거를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친한 척하거나 하며, 매일 계속 흘러가게 된다.

  그 후에 누구나 생각한다. 「아아, 그 때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즉 휩쓸린다는 것에는 후회가 항상 따라다니며, 씁쓰레한 추억이 되어 남아, 10년 정도 지나면 어렸을 때의 치기로서 만담의 대상이 된다.

  아무튼, 인간이 사회를 형성――Yetzirah――하는 이상, 화합을 존중하고, 주변에 맞추는 것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무슨 일에도 흘러가서는, 불이익을 뒤집어 쓸 뿐이다. 때로는 상대에게 『No』라고 들이대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나도 그렇다.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물리적으로 휩쓸리게 되면서, 봉사부라는 잘 모를 동아리에 끌려가, 더군다나 강제적으로 입부당했던 것이다. 소부고의 교풍인 『자유를 구가한다.』라는 말은 대체 어디에 가버렸을까. 아니면 그건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고, 히라츠카 선생님은 은근히 내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No』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혹시 지금과는 다른 세계선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미소녀와 둘이서 부활동이라고 말하면, 왠지 허둥지둥할 법한 소리지만, 실제로는 그리 좋은 건 아니다. 이따금 대화 정도는 하지만, 결함이 발각되고 매도되고는 그 외는 서로 책을 읽을 뿐이다. 가슴이 아파질만한 전개는 없고, 아파진 것은 위뿐이었다.

  우선 내일 동아리를 빼먹는 것부터 생각해야한다. 우선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처럼 행동하면 되려나.

  그렇게 뒤가 켕기는 생각을 한 탓인지, 여러 가지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차를 운전하는 샐러리맨은 이후에 산더미 같은 업무가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고, 아까 전에 엇갈린 밴드맨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입에서 게거품을 뿜는 것처럼 보이며, 세탁물을 거두는 주부의 그림자에 모르는 남자의 그림자를 환시하고 만다.

  거기에 조금 앞의 T자 도로 앞쪽에서, 「나와 사귀어 주지 않을래?」라고 필사적으로 고백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그건 분명 차이겠지.

  그나저나, 길 한복판에서 고백하는 건, 과연 어떨까. 그런 곳에서 고백하면 누군가가 들어버릴 텐데. 이를테면 나라든가. 이것이 다른 사람이라면, 사진 찍혀서 소셜 미디어에 투고되어, 다음 날에는 반 전체에 들키는 게 대부분일 거다.

  정말 다행이구만, 우연히 지나갔던 사람이 나라서. 나이기에, 쌍방의 얼굴을 보고, 못생겼으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고, 미인이라면 「차여라」라고 저주를 보낼 뿐이다. 뭐, 여자에게 차이는 것도, 청춘에 붙어 다니는 거니까.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면서, 담벼락에 손을 대고, 소리가 나는 쪽을 들여다본다. 까칠까칠한 촉감과 동시에, 모르타르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우선 처음 보는 모르는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온다. 남학생복을 입은 너머로 보니 어깨 폭이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운동이라도 하는 거겠지.

  상상 이상으로 체격이 좋은 탓에, 상대 편 여자의 얼굴이 전혀 안 보인다. 단지 남자 다리 틈새로, 짙은 감색 스커트와 윤기가 나고, 잘 뻗은 다리가 보인다. 멀찍해서 그것밖에 안 보이지만, 그런데도 다리만으로 미인이라는 느낌이 온다.

  조금 더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여자의 앞모습을 확인한다.

  생각보다 허리 위치가 높구만. 키는 남자 쪽이 크지만, 그것보다도 허리 위치가 높다. 스커트 자체는 조금 길게 입었지만, 그런데도 다리까지 고려하면, 짧게 입은 것처럼 보인다.

  천천히 위로 시선을 향하자, 옷으로 가려져있지만, 형태가 좋은 가슴이 살짝 솟아있다. 이 느낌이라면 C정도는 되려나. D라면 꽤 큰 이미지가 있으니, 아마 C겠지. 뭐 상상이다만.

  그렇게 해서 겨우, 목에 가까스로 도달한다. 어깨에 가볍게 걸친 정도의 매끄러운 흑발이, 태양 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뭐야, 이 녀석인가...... 일부러 하반신부터 관찰하지 말걸.

  무심코 얼빠져있던 중에, 키리바나 아카네와 눈이 마주친다.

  그 녀석은 생긋 웃고는, 몸 앞에서 깍지 끼던 손으로, 4개의 숫자를 만든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려서 『3』, 엄지만을 세운 『1』, 새끼손가락만 세운 『1』, 새끼손가락만 세운 『1』.

  어릴 때 만든 암호를 해독하면, 『기다려(待て)』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다.

  ......솔직히 말하면 귀찮다. *브레이크 등을 다섯 번 깜박인 거라면 기뻐할 수라도 있지, 이런 건 단지 성가실 뿐이다.

※ 브레이크 등을 다섯 번 깜박이면 모르스 부호로 '아이시테루 → 사랑합니다'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 표정을 무심결에 드러내고는, 바로 후회한다. 이래서야 싸인을 해독할 수 있었던 게 들킨 거잖아.

  그 자리에 머물지 어떨지를 생각해보지만, 이후에 집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을 생각하면, 도망쳐도 쓸데없다고 판단해서 그대로 눌러앉기로 한다.

  단지, 문득 자신의 상황을 찬찬히 뜯어보면, 파릇파릇한 중학생 남녀를 구석진 곳에서 보는 남고생. 어떻게 생각해봐도, 스토커로밖에 안 보인다......


「할 수 있으면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데......」

「아, 응, 그러네. 미안. 잠시 멍했어.」


  오오, 고백받고 있는데 멍 때린 시점에서, 벌써 대답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런데도 키리바나는, 남자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평가하는듯한 눈으로, 끄덕이면서 둘러본다. 아무래도, 그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답은?」

「......미안, 미사키 군은 싫어하지 않지만,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전 휘청휘청 걸으면서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전혀 관계없었지만, 어쩐지 미사키 군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그래...... 어딘가 내가 나쁜 부분이 있었어?」


  아무래도 미사키 군은, 꽤나 용감하고 끈기 있는 성격인 듯하다. 다만, 왜인지, 그런 미사키 군을 보고 있으면, 지뢰벌판에 필사적인 표정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만다.


「특별히 없는데...... 단지 미사키 군과 사귀고, 소녀처럼 사랑하는 모습이, 어떻게도 상상할 수 없는 것뿐이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할까......」


  그렇게 말하며 키리바나는, 손가락에 아랫입술을 끼운다. 모양이 좋은 입술이 일그러져서, 새빨간 혀가 약간 들여다보였다.


「아무튼, 내 이상이 높다고 생각해. 아마 그게 맞을 거니까」

「......」

「아, 아니, 정말로 싫지 않아. 단지, 뭐라고 할까」


  당황하고, 미안해보이는 목소리가 땅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만, 뭐라고 할까 지금은 추가타를 넣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차인다면, 깔끔하게 차인다. 그것이 가장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다.


「......그래, 일부러 붙잡아서 미안했어.」


  미사키 군은 그대로 무거운 걸음으로 떠난다. 농담 반으로 엿봤지만, 왠지 죄책감이 솟아오른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겨울이 마른듯한 목소리가 들려서, 담벼락에서 몸을 뺀다.

  만일을 위해, 한 번만 더 주변을 둘러본다. 고백한 아이가, 그 후 모르는 남자와 만나다니, 나라면 여자를 믿지 않게 되어, 그 녀석의 악평을 퍼뜨릴 레벨이다.


「......뭔가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어?」

「아뇨,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키리바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원래 왔던 길로 되돌린다. 여기부터라면 나와 얘가 돌아가는 길은 같으므로, 걸으면서 말할 생각 같다.

  나도 이 녀석과 같이 걷기 시작하자, 이 녀석의 머리 위치가 내 머리보다 조금 낮아진다. 밖에서 별로 만났던 적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지만, 이 녀석 키가 크구나. 내 키로 짐작해보면, 165정도는 되겠지. 힐을 신으면 내 키보다 커질지도 모른다. 휴일에는 만나지 않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마지막에 같이 있던 때가, 얘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니, 그야말로 2년만일지도 모른다.


「왠지 너, 많이 컸구나」


  그러자 키리바나는 걸음을 멈추고, 유감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기, 그건 남자가 여자에게 하면 안 될 말이에요. 좀 더 말을 부드럽게 해주세요. 예를 들면......스타일이 좋아졌구나, 라든지」

「왠지 너, 스타일 좋아졌구나.」

「......미안해요, 역시 무리였어요. 왠지 성희롱 같아 보여요.」


  키리바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껴안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건 나한테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래서,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뭔데?」

「그랬죠.」


  그렇게 말하고는, 대화하던 거리를 한 걸음 좁혀서 나를 조금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내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이런 행동은 코마치와 사이가 좋은 탓인지, 많이 비슷하다.


「저기, 남자라는 건 왜 저렇게 쉽게 고백하는 거예요?」


  뭔가, 심오하다고 할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왔군. 애초에 반하면 고백하겠다만.


「그보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아니아니, 오타가야 선배의 소문은, 전해 들었어요. 어떤 고백에도, 대 베테랑이라고」


  무시무시하게 싫은 추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 녀석의 표정을 보면 생각보다는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 같다, 농담하는 듯한 말투에 비해서는, 입가는 웃고 있지 않다.


「흠, 그렇군. 하나 묻겠는데, 넌 미사키 군과는 뭘 했어?」

「그러니까, Line으로 자주 대화하고, 자리가 가까웠으니까 자주 이야기하고, 코마치하고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자고 들어서, 같이 돌아가거나 했어요.」

「좋아, 너에 대해서는 어떻든 상관없다. 세 번째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라」


  그 중대사건은 대체 뭐야? 만약 실제로 손을 대는 무리가 있으면, 나도 무력개입을 해야 한다.


「다른 남자 중에서 코마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으니, 안심해주세요. 그것보다도, 자. 계속을」

「그런가, 그렇다면 됐어. 거기에 하나 더, 너 미사키 군을 좋아하는가 싫은가로 말하자면 어느 쪽이야?」


  그러자 키리바나는 멀리 보이는 타워 맨션을 노려보듯이, 눈썹을 바싹 옆에 붙이고는


「그 둘 중에서 말하자면 좋아해요. 다정하고, 이야기도 재미있으니까」


  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정말로 자각이 없는 것 같다.


「확실히 말하겠어. 이번에는 네가 나쁘다.」

「아니, 그렇지가 않은데요?」


  키리바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바로 옆으로 온다.


  「저기 말이다...... 남중생은 기본적으로 단순해. 이성의 호의와 우정으로서의 호의를 전혀 구별하지 못해서, 조금 상냥한 대우를 받으면 『어? 날 좋아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고, 상대를 의식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이번의 경우, 거기까지 생각하는 척한 네가 반성해야 해.」


  키리바나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을 멈춘다. 이 교차점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키리바나의 집, 똑바로 걸어가면 우리집으로 이어진다.


「아니, 그런 정도로 좋아하게 되어도, 기쁘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게 싫다면, 행동을 조심하라는 거야.」

「뭔가 납득할 수 없지만, 조금 조심해 볼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녀석은 그리 간단히는 고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이 딱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자신에 대해서는 어딘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키리바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도움이 됐어요.」


  그렇게 감사하지 않은 것 같이 사무적인 말로 인사하고, 키리바나는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아서 뒤돌아보지 않고 간다. 아무래도 오늘은, 코마치와 집에서 놀 약속은 안한 것 같다.

  조금 불쾌한 듯이 어깨를 흔들며 걷는 키리바나의 등을 보면서 생각한다.

  역시 이 녀석은, 어딘가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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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봉하지 않은 편지~



  삼가 아룁니다. 매화 향이 감도는 계절이 더욱 더 번창해서 기쁠 따름입니다.


  우선은 이와 같은 형태로밖에, 사죄할 수 없는 것을 사과드립니다. 원래라면 얼굴을 맞대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당신과 정면에서 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습니다. 당신을 앞에 둔다면, 제 입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시작하겠지요. 그 때문에,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분명, 이 편지를 보내는 일 없이, 단상의 장롱 서랍에 넣어두고 말겠지요.

 

  정말로 폐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이 종이도, 이 잉크도 당신이 벌어 온 돈으로 산 것입니다. 단지, 당신도 아시는 대로 이런 성격이므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 없이, 이런 나이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맺어지고 나서, 당신은 서투르게나마 호의를 표현했지만, 그런데도 저는 마음속에 당신을 둘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다정함도, 따스함도, 매우 귀중해서 얻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그것을 사랑하는 것만은, 아무리 하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라면 이런 가면을 쓰고, 부부를 연기해서는 안 되었지요. 당신의 호의를 뿌리치고, 혼자 살아가는 게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불행하게는 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상당히 고생하고, 궁핍한 생활을 보냈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면, 지금도 오싹오싹 공포가 치밀어 오릅니다.

 

  정말로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저는, 자신의 마음의 평온을 위해, 당신의 상냥함을 이용했습니다. 당신에게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받았는데, 그것을 돌려주지 못하고, 그리고 사례조차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저는 겨우 당신을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기쁘다기보다도, 마음의 짐이 줄어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도 기쁩니다.

 

  이런 저에게서, 당신을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이런 저를, 혐오하지 않게 된 것에,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부디 남은 인생을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주세요. 저는 부디 잊고, 다른 누군가와 멋진 여생을 보내, 평온한 생을 보내주세요.

 

  그것이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말입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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