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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한 번밖에 입지 않았던 정장을 입고, 기합을 넣는다.
  지금부터 갈 곳은 마왕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기합 하나라도 넣지 않으면 다리가 떨리니까.
  자! 가보자! 유키노시타성으로!

  부들부들
  부들부들
  덜덜덜덜덜덜덜덜덜

  어, 어라-?
  다리만이 아니라,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합이 부족하다는 건가?
  아니, 아마 게으름뱅이인 내가 더 기합을 넣어봤자 소용없지.
  이 다리의 떨림을 멈추려면...


「...그래, 유서를 쓰자!」


  경우에 따라서는 『잘도 내 딸을!』라며 XX될 가능성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모님은 우선 어떻든 상관없으니, 코마치 앞으로 유서를 써두자.
  써두면 미련을 남길 것도 없이 옥쇄할 수 있다.
  근데 옥쇄확정이냐고.
  뭐 상관없다.
  삼가 아룁니다, 코마치에게...


  하루노 씨와 몇 번이나 일을 치른 뒤, 필로 토크하지도 없이 같이 밥을 먹었다. 아침 점심을 거르고 3시까지 해버렸으니, 그거야 아무튼 배도 고파진다. 적당히 만든 볶음밥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서로 맺어진 건 좋은데... 하루노 씨의 집을 생각하면, 쉽게 허락해주진 않겠죠.」

「으~응, 그치. 히키가야 군 얘기는 가끔 했으니까, 전혀 모르진 않겠지만...」

「하루노 씨라도 예상할 수 없어요?」

「응. 솔직히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 요즘 맞선 얘기를 계속 거절해서, 뭔가 알아챘을 거라고는 생각하는데」

「최악의 전개는 『이런 말 뼈다귀는 안 돼』라고 하는 거겠죠.」

「그치. 그 엄마니까, 나도 유키노한테도 결혼상대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으려나」

「...드럼통에 갇혀 바다에 버려질 일은, 없겠죠?」

「없어없어, 그렇게까진 안 해...... 아마도」

「아마도!? 거기는 단언해주세요!」

「음~ 엄마가 어디까지 생각하는지는 모르니까-...... 혹시 무서워졌어?」


  히죽거리며 심술궂은 미소를 띠는 하루노 씨.
  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해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전의 나로서는 몰랐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하루노 씨의 눈을 보면 안다.


「괜찮아요.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하루노 씨를 좋아하게 됐을 때부터 목숨을 걸 정도의 각오는 해뒀어요.」

「........정말, 히키가야 군은 치사해」


  조금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듯이 우물쭈물하는 하루노 씨.
  아아, 귀엽구나 하루노 씨.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윈 얼마든지 걸 수 있다.


「큰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되면 둘이서 도망치자!」

「그래요. 유키노시타가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잘 도망쳐 보일게요.」

「응! 그럼 지금 멀리 아는 사람한테 메일해둘까」

「성격이 급하시네요. ...그런데 말을 되돌립니다만, 이 뒤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 난 집에 돌아가서 솔직하게 얘기해보려고 해.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쪽으로밖에 안 갈 거니까.」

「과연, 그러네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오늘 중에는 꼭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무사를 빌게요.」

「고마워. 그럼 또 보자.」


  결국, 어제 하루노 씨가 간 뒤 폰을 계속 잡고 연락을 기다렸다가, 날짜가 바뀌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새 잠든 것 같아, 정신 차리면 아침이 되어 있었다. 자는 동안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내 마음 속에 불안한 마음이 자꾸자꾸 커져간다.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던 내게 떠오른 것은, 『유키노시타가로 간다』였다.

  반침 안에서 연말 대청소와 동시에 클리닝을 맡긴 정장을 꺼내, 익숙하지 않은 넥타이에 악전고투하며 옷을 입었다.
  일단, 하루노 씨의 폰에 『거기로 갈게요』라는 메일을 보낸다. 상대방에게 도착하지 않았을 때 되돌아오는, 영어 메일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수신은 한 듯하다. 그럼 하루노 씨는 왜 연락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이 한 층 더 부풀어 올랐다.


「좋아, 갈까」


  폰, 지갑, 시계와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챙기고 현관을 나왔다.
  시각은 오후 2시.
  여기에서 유키노시타가까지, 1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하루노 씨, 지금 갑니다...!



  집에서 나와 조금 걸어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바로 도착한 버스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승차. 버스에 흔들리기를 수십 분, 종점 2정거장 앞에서 하차. 거기부터 몇 분 정도 더 걸어서... 유키노시타가에 도착이다.

  고급 주택가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그 집은, 주변에 줄선 많은 대저택보다 2~3배는 커서 더 눈에 띄었다. 외관은 흰색을 바탕으로 한 서양풍으로, 이미 작은 성으로도 보인다.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였는데 잘 보이다니, 몇 층 건물인 거야. 보기에는 뜰도 상당히 넓은 것 같다. 과연 건축회사 사장 저택. 일반 가정 출신인 내가 보기에는, 여긴 완전히 이세계다.


「너, 여기에는 무슨 용무로 왔나?」


  당돌하게 말을 걸어왔다.
  소리가 들린 쪽을 보자, 정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정장 선글라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쪽에는 이미 두 사람정도, 마찬가지로 선글라스가 서 있다. 경비원인 건 대충 알겠는데, 외형이 너무 무섭다. 나 같은 치킨한테는 정신에 해롭다.


「음, 여기가 유키노시타 씨 댁 맞습니까?」
 

  가능한 한 아무렇지도 않게 위장하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떨려버린 것 같다. 어쩔 수 없잖아, 나 치킨이고.


「그 말대로지만, 너는 누구지?」

「그, 그게, 히키가야라고 합니다만, 유키노시타 하루노 씨는 계십니까?」

「히키가야...? 혹시 너, 이름이 히키가야 하치만인가?」

「네? 그, 그렇습니다만...」


  뭐야, 경비원에게 나에 대해 알려줬어?
  유키노시타인가? 이렇게 한 사람은. 아니면 하루노 씨? 어쨌든 유키노시타가의 여성은 인권이나 프라이버시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상관없는 것을 멍하니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정신 차렸더니 경비원 3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응? 난 혹시 의심스럽거나 위험인물 취급?


「아, 저기, 어떻게 된 거죠...? ㅈ, 저, 비무장인데요?」


  총을 들이민 것도 아닌데, 양손을 들고 항복 자세를 취한다. 그러자 경비원 한 명이 천천히 손을 뻗어,


「확보!!」


  라고 외쳤다.
  거기부터 순식간에 재빠른 솜씨로.
  내 양손을 잡아 등 뒤에 돌려 수갑을 채우고.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를 테이프를 내 입에 붙이고.
  또 난데없이 나온 타월로 내 눈을 가리고.
  다리, 몸통, 어깨를 각각 붙들려 아마 유키노시타가 부지 내라 생각되는 쪽으로 들려갔다. 지나친 전개에 저항할 새도 없이, 상대가 하는 대로 끌려간다.
  그나저나 당신들 솜씨 좋네.
  실은 경비원이 아니라 유괴범 아닌가? 라고 의심해버릴 수준.
  난 대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또각또각또각...

  발소리로 미루어보아 건물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통로라 생각되는 공간을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거나... 몇 번 돌았는지 모르게 되었을 즈음해서,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철컥
  끼이이

  무거운 듯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 가고 나서 또 멈춰, 뭔가 부드러운 것에 앉혀지는 형태로 내려졌다. 등에 닿은 딱딱한 느낌으로 보아, 아마 의자일 거다.

  또각또각또각...
  끼이이
  덜컹

  소리로 봐선, 경비원이 전원 나갔다.
  특유의 기척 감지로 근처를 탐색하지만, 사람이 있는 기색은 없다.
  여기, 어디지?
  그나저나 난 지금부터 어떻게 될까?

  덜컹
  끼이이
  또각또각또각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마 한 명.

  들어온 누군가는, 소리로 봐서 내 정면에 있는 의자인지 뭔가에 앉았다, 고 생각한다.
  안 보이니까 잘 모르겠다.

  스륵

  갑자기, 눈을 가리던 타월과 입가의 테이프가 떼어졌다. 순간 시야가 새하얘졌다가, 서서히 눈이 익숙해져 시야가 또렷해진다. 눈앞에 중후하고 아마추어 눈으로 봐도 품위 있는 긴 테이블이 있고, 그 반대쪽에 슈트를 입은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흘러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흑발에, 날카로운 눈동자. 유키노시타를 닮았지만, 그 외에 강렬한 안광과 위압적이기까지 한 존재감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알았다.
  이 사람이, 유키노시타 자매가 무서워하는 유키노시타 어머니라는 것을.


「히키가야 하치만 군, 이 맞을까?」


  맑으면서도, 어딘가 위압적인 목소리가 실내에 울린다. 안 그래도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쫄고 있었는데, 더 쫄아버린다. 그럼에도, 눌려 으깨질 것 같은 마음을 분발해, 마를 것 같은 목을 진동시켜서 소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하루노와 유키노의 어머니입니다.」

「그, 그렇군요.」

「바로 말합니다만... 하루노와 남녀 관계가 되었다더군요.」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말에, 조금 뒷걸음질친다. 방금 전보다, 약간이지만 안광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유키노시타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다지...」

「제 남편은 건축회사의 사장이자, 현 의회 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대로 계승되는 유키노시타가의 당주로서 각계의 영향력을 미치는 일족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

「즉, 집안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반인 입장에서 보기에는, 도저히 닿지 않을 것 같은 높은 위치에」

「...........」

「그 높은 집안인 유키노시타가의 장녀인 하루노와, 아무리 조사해도 일반 가정 출신인 일반인인 당신이 관계를 했다...」

「........그렇게 됩니다.」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제 딸과 당신이」

「......도저히, 어울리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요. 저로서는, 이번 건은 딸의 한 때의 실수로 용서할 생각입니다. 그 다음, 유키노시타가에 맞는 상대와 결혼시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얌전히 물러나서, 지금까지의 일은 잊고 일반인에게 맞는 인생을 다시 보내줄 수 있습니까?」

「..........」


  어조는 정중하지만, 그 밖의 날카로운 안광에는 『얌전히 따르세요』라는 듯한 압력이 담겨 있었다.

  그래, 나와 하루노 씨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어디에나 있는 잡초 같은 나와는 반대로,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은 하루노 씨.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하루노 씨와는 반대로, 어디에 있어도 신경 쓰이지 않고 짓밟힐 수 있는 나.
  애초에 어울릴 리가 없다.
  그런 의미로, 유키노시타 어머니가 말하는 것은 매우 올바르다.
  그러니까 나는―――


「거절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는 분명히 말해서 일반인입니다. 용모도 스펙도, 하루노 씨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뭐죠?」

「하루노 씨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저 뿐입니다. 저는 하루노 씨를 좋아하고, 하루노 씨는 저를 좋아합니다. 서로가 그것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들였지만, 그 만큼 자신들의 마음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나도, 하루노 씨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신이 멋대로 믿어버릴 뿐이 아니고?」

「억측이 아닙니다. 단지 저를,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하루노 씨를 믿을 뿐입니다.」

「.........」

「...무리해서 유키노시타가에 맞이해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하루노 씨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습니까? 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면서,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하루노 씨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하루노 씨를, 혼자 두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하루노 씨는 지금까지 혼자였다. 부모님은 영향인지, 여동생을 위해서인지, 이유는 잘 모른다. 어느 새 몸에 익힌 마음을 닫고 미소로 덧칠해서 굳힌 가면이,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요새 같은 존재로 하루노 씨의 마음의 바깥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것이 하루노 씨를 홀로 있게 하고 있었다. 마치 바깥세상이 무서워 방안에 틀어박힌 아이처럼. 내가 왜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혹은 하루노 씨에게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접한 진정한 하루노 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했다.
  아마, 처음부터 알았던 거다.
  하루노 씨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바랐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하루노 씨 옆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던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밖에 안 보이는 하루노 씨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하루노 씨를, 따님을 제게 주세요!!」


  확하고 힘차게 머리를 숙인다.
  내 나름대로 힘껏 성의는 보였다.
  앞으로는, 그 유키노시타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다.


「......흠. 당신의 성의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어요. 츠즈키, 준비해둔 것을」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사람 기척도 느껴져 놀라서 뒤돌아보니 언제나 리무진을 운전하는 츠즈키 씨가 있었다. 빠릿하고 말끔한 자세로 서서, 양손으로 A3 크기의 판 같은 것을 들고 있다.
  그나저나 츠즈키 씨, 운전기사 일만 하는 게 아니었군요.


「히키가야 님, 여기에 서명을 부탁합니다.」


  눈앞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민다. A3 크기의 그것은 얇은 케이스 같은 것에 넣어진 서류 같아, 좌측 상부의 『서명란』이라 쓰인 공간 이외가 전혀 안보이게 되어 있었다. 아마 어떤 서류라고 생각하는데, 대체 그게 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이건 뭔가요?」

「당신의 마음이 진실이라면, 그 서명란에 싸인하세요.」

「이 서류는 무슨 서류입니까?」

「물론, 제게 형편 좋은 서류입니다.」

「......」


  유키노시타 어머니에게 형편 좋은 서류...
  설마 차용서?
  아니아니, 차용서로 얼마나 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인이 평생 벌어야 하는 금액을 단 한 달 만에 버는 그런 사람이 그런 걸 준비할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각서인가.
『앞으로 일절, 저는 따님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것.
  그렇다면 최악이군.
  하루노 씨와 함께 보내기는커녕, 만나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도망치는 것도 생각해야겠지.


「왜 그러십니까? 자, 빨리 싸인하세요. 너무 시간을 들인다면 당신의 마음을 거짓으로 여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츠즈키 씨가 내민 비싼 보이는 만년필을 받아, 할 수 있는 한 신중하게 이름을 쓴다. 조금이라도 인상을 좋게 보이는 편이 좋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게 노예계약 같은 서류라면 문제인데. 혹시 그렇다면 진짜로 도망치자. 물론 하루노 씨와 함께.

  다 끝낸 뒤, 옆에 있는 츠즈키 씨에게 서류가 들어간 케이스를 건네준다. 서명란을 확인한 뒤, 츠즈키 씨는 유키노시타 어머니 앞으로 가져간다. 유키노시타 어머니는 그것을 받고는, 어떻게 했는지 케이스를 쉽게 열고 안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진짜 어떻게 한 거지?
  저거, 얼핏 봐도 어디에도 연결고리 같은 게 눈의 띄지 않아서 용접한 것으로밖에 안보이던데.


「...글씨는,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글자는, 조금 비뚤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글씨는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예상 밖의 말에, 엉겹결에 굳어진다. 의외, 라고도 할까. 하루노 씨나 유키노시타의 얘기를 들었던 것만으로는, 좀 더 기계적인 사람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 발언을 듣고서, 조금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다.


「츠즈키, 이것을 금고에 보관해둬.」

「알겠습니다.」


  츠즈키 씨는 서류를 공손하게 받고는, 투명한 케이스에 넣어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금고가 집안에 있는 건가. 아마 내가 아는 금고보다 큰 게 있는 걸까.


「그런데, 히키가야 하치만 군. 앞으로에 대해 뭔가 질문은 있습니까?」

「...앞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까?」

「.....이미 서명도 했고, 지금쯤 금고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그 서류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혼인신고서입니다.」

. . .
. . . . . .
. . . . . . . . .

「예?」

「그러니까, 혼인신고서입니다. 어떤 건지는 알겠지요. 과연 바로 결혼시킬 수는 없습니다만,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면 당장이라도 맞이합니다.」

「........................저기, 누구와, 누구의 혼인신고입니까?」

「물론 당신과 하루노입니다.」

「저와 하루노 씨의...?」

「예, 그렇습니다. 본래라면 하루노는 유키노시타가에 어울리는 집안의 남성과 결혼시킬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하루노는 당신이 없으면 안될 것 같아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

「무슨 일입니까. 뭔가 불만이라도?」

「어, 아, 아- 아뇨... 뭐라고 할까, 그게...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쉽게...? 우수한 딸이 숙고해서 당신을 선택했는데, 그것을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뇨, 그럴 생각은... 단지 제가 생각했던 건 『너 같은 말 뼈다귀가!』나 『일반 서민이』 같은 반응을...」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루노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게다가 하루노가 남아도는 재능을 힘껏 발휘하면, 결혼상대가 집안이 좋은 남성이 아니어도 문제없습니다. 뭐, 유키노에게도 해당되겠지만요.」

「......우선, 어떻게 기뻐해도 좋을지 몰라서, 하루노 씨를 만나게 해주셔도 될까요?」

「그렇습니까. 츠즈키」

「예.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어? 츠즈키 씨 어느새 돌아왔지? 그 사람은 닌자인가 뭔가야? 그보다 이미 기색 안 느껴지는데. 인간의 영역을 넘었잖아.

  덜컹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의자에서 일어서서 뒤돌아보니, 가슴 근처에 뭔가가 뛰어 들어왔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감촉과 향기로 바로 그것이 하루노 씨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하루노 씨...!」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뻐서 무심코 꼭 껴안았다. 하는 김에 쓰담쓰담도 했다.


「하루노 씨, 괜찮았어요?」

「...응, 괜찮아. 괜찮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으~~, 치욕이야~~」

「치, 치욕?」

「...저기」


  얼굴을 들어 천장 구석을 가리킨다. 거길 보니, 감시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다. 받침대  뿐만이 아니라, 전 방위 합계 8대.


「.........뭐야, 이건」

「별실에서 네 용감한 모습을 보기 위한 감시 카메라야.」


  귀에 익은 소리에 문 쪽을 보자, 거기에는 유키노시타가 있었다. 그 옆에는 온화해 보이는 댄디한 아저씨가. 집사인가? 아니, 그런 것보다 날 보고 있었다니...


「즈, 즉, 이 방안의 대화를 다른 방에서 감시 카메라로 보고 있었다고...?」

「그렇게 되네.」

「아니아니 뭘 하고 있어?!」

「뭐라니, 널 시험했을 뿐이야. 향후에 도망칠만한 남자인지 아닌지를. 그리고 이 카메라는 증거촬영을 위한 거야. 이걸로 너도 도망칠 수 없겠지?」

「아니아니, 이제 와서 도망치진 않을 거라고!!」

「그래? 그럼 괜찮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꽤 좋은 장면을 보게 해줬어요. 그렇죠? 아버지.」

「아아, 그래. 젊은 애들은 정열적이라 좋구나.」


  집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유키노시타의 말에 대답한다. 외형 그대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근데 거기 집사 같은 사람, 장인어른이었나!!
  아, 얼떨결에 장인어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인신고서 썼으니 딱히 상관없나.
  그렇다는 건 저기의 대마왕도 장모님이...


「하치만 군, 뭔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아아아아뇨! 딱히 아무것도!!」


  아뿔싸. 역시 유키노시타 자매의 어머니다. 초면인 내가 생각하는 걸 읽다니 역시 엄청나다. 그보다 난, 지금부터 독심술 쓸 수 있는 여자 둘과 가족이 되는 건가. 프라이버시 제로 생활의 시자이다. 뭐, 하루노 씨와 함께 되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큰일은 아니.......겠지. 힐끔하고 대ㅁ... 커흠커흠, 장모님을 보면, 방금 전의 위압적인 오라는 어디로 갔는지. 온화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어떻게 봐도 어머니의 얼굴로, 나는 더더욱 『유키노시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노. 슬슬 준비해두렴. 나가자꾸나.」

「응? 어디에?」

「물론, 하치만 군의 친가야. 혼인신고서를 썼으니, 인사하는 건 당연하잖니?」

「...........」


  응? 우리집에 인사?
  이 장모님이, 무슨 말을 한 거지?


「유키노, 하치만 군의 여동생에게 연락은 했니?」

「네, 이미 했어요. 지금은 부모님과 같이 집에서 기다린다고 해요.」

「알겠다. 자, 하루노. 멍해 있지 말고 빨리 준비하렴.」

「.........」


  벌어지는 일을 머리가 전혀 따라가지 못해 보이는 하루노 씨. 뭐, 나도 전혀 못 따라가지만. 그나저나 유키노시타, 친가와 사이 나빴던 게 아니었나. 절묘한 연계 플레이로 우리들을 완전 포위했잖아. 어떻게 봐도 사이좋은 부모 자식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히키가야 구-운...」

「...뭔데요」

「우리들, 결혼하는 것 같네...」

「...그러네요.」

「왠지 이렇게, 여러 가지로 너무 쉽게 돼서...」

「...이제 이대로 흐름에 몸을 맡겨 봐요.」

「...그러자-」



  그 이후의 전개는 순식간이었다.

  우선은 우리 집에 유키노시타가 모두와 함께 방문. 엄청 기뻐 보이는 코마치와 상황을 잘 모르는 부모님에게 약혼 인사. 부모님은 코마치에게 조금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지만, 하루노 씨 같은 초절미인을 데려올 뿐만 아니라 약혼까지 했다는 건 티끌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 시종일관 망연해 있었다.
  뭐, 사교성 높은 코마치라면 몰라도 나 같은 커뮤장애인이 애인을 만들 거란 상상은 못하겠지. 게다가 상대는 이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집안이고. 아버지는 끝까지 의심스러운 듯한 눈초리였다. 안심해, 미인계 같은 게 아니니까. 결국, 망연자실한 부모님의 케어는 코마치에게 휙 던져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친가 방문 뒤, 벌써 해가 지고 있어서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낯선 맨션으로 날 데려갔다. 유키노시타가 자취하고 있다는 곳과 마찬가지로 큰 맨션.


「오늘부터 당신과 하루노가 살 맨션입니다.」


「「네?」」


  엘리베이터로 위층에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들었다.
  어? 갑작스럽게 둘이 삽니까?
  너무 급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혼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 마음을 읽지 말아주세요.」


  그대로 20층까지 가서, 방으로 안내된다. 방은 4LDK 로 목욕탕 화장실 별도(당연한가)에 시스템 부엌 탑재. 조금 둘러봤지만, 방 하나 크기가 어떻게 봐도 내가 살던 곳보다 넓어 보인다. 둘이 살기에는 너무 넓지 않습니까?


「계속 둘이서만 사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그러니까, 제 속을 읽지 말아달라고요.
  그보다 거기까지 상정하셨습니까.


「그럼, 우리들은 슬슬 돌아가죠. 내일은 당신들의 짐이 도착할 테니. ...그리고 가끔 보러 올 테니, 너무 놀라지 않도록」


  그렇게 말하고 나와 하루노 씨를 남기고, 유키노시타가 사람들은 돌아갔다.


「「.......」」

「...우선, 밥부터 먹을까요?」

「...그래」



  저녁은 배달피자로 했다. 냉장고 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환경은 정돈했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하라는 거겠지.

  저녁을 먹은 뒤,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을.


「후우......」


  목욕탕에 잠겨, 피로와 함께 숨을 내쉰다.
  그나저나 이 집, 목욕탕도 넓구나.
  성인 둘이 나란히 발을 뻗을 수 있는 욕조는 처음 봤다.


「이야~ ...대단한 하루였지?」

「그러네요...」


  자연스럽게 옆의 하루노 씨를 봤더니, 약간 늘어진 듯,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김빠진 느낌의 하루노 씨가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

  ...응? 왜 같이 목욕하느냐고?
  먼저 목욕탕을 서로 양보한 결과가 이거야!
  꺼림칙한 기분은 어디에도 없다.
  진짜라고, 하치만 거짓말 안 해.


「왠지, 의외였죠.」

「그러네. 엄마가 그렇게까지 히키가야 군을 인정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아니 정말, 유서를 준비할 정도로 결사적으로 각오했는데 맥 빠졌어요.」

「유서 썼어? 히키가야 군 답구나~」

「그래도 안 하면, 유키노시타가 같은 마왕성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구요.」

「으~응, 그 마음은 모르는 것도 아니려나. 나도 어제 집에 돌아갔을 때, 갑자기 유키노한테 붙잡혀서」

「유키노시타한테? 그나저나 하루노 씨가 붙잡히다니 의외네요.」

「모르는 사이에 유키노가 팔을 올리고 있었어. 순간의 틈을 찔려 수갑을 채우고...」

「...역시 유키노시타. 언니가 상대라도 주저 없군.」

「진짜 그렇다구. 그 탓에 히키가야 군한테 연락할 수 없었던 거야.」

「아아, 그래서...」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잘 됐어.」

「맞아요. 이제부터 여러 가지로 큰일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기대돼요.」

「후후후... 맞아. 엄청 기대돼.」


응- 하며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는 하루노 씨.
동시에 흔들리는 큰 가슴에, 무심결에 두근거리고 말았다.


「그렇다 해도 히키가야 군, 멋있었다구. 설마 엄마에 대해 알고서도 당당하게 말하다니... 다시 반해버렸어.」


  날 보며 부끄러운 듯이 웃는다.
  어딘가 아이 같은 그 표정에, 고동이 방금 전보다 더 빨라진다.


「그 때는 하루노 씨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그 만큼 부끄러웠다구. 유키노가 히죽히죽하며 날 봐서...」

「진짜 그랬어요? 그 녀석도 성격 나빠졌구만.」

「왠지 이미, 히키가야 군하고 사이 좋아지고 나서 유키노한테 계속 놀림 받는 기분이 들어. 약점 들킨 느낌」

「놀림 받는 하루노 씨도 귀여워요.」

「으-, 히키가야 군까지 그런 말하고-」


  뾰로통해져선 고개를 돌린다.
  그런 하루노 씨도 귀여워서, 무심코 평소의 쓰담쓰담을 하고 말았다.

  스윽스윽...

  바로 기분을 풀어준다고 생각했지만, 당분간 쓰다듬어도 하루노 씨는 고개를 돌린 채 반응해주지 않는다.
  고집이라도 부리는 걸까?
  흠, 그렇다면...

  확

  쓰다듬고 있던 손을 어깨에 두르고, 조금 억지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귓가에 입을 대고,


「하루노」


  라고 속삭였다.


「후앗!?」


  귀여운 소리가 하루노 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나를 보는 그 얼굴은, 마치 머리에 피가 오른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가, 갑자기...」

「아니, 이제부터 부부가 될 거니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정도는 당연하겠죠. 아니, 경어도 이상한데. 그런 이유로 경어도 그만두겠어.」

「어, 어, 저기...」

「자, 하루노. 나도 이름으로 불러줘. 아마 데릴사위가 될 테니, 조만간 히키가야가 아니게 될 거고」

「저, 저기... 하치, 만...」

「잘 안들려. 한 번 더」

「하, 하치만!」

「잘했습니다.」


  다시 쓰담쓰담한다.
  그러자 하루노는 새빨간 얼굴로, 빤히 흘겨봤다.


「...애 취급하지 말아줘.」

「응? 안 돼? 그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아?」

「물론, 이런 느낌으로」


  그렇게 말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술을 내 입술에 겹쳐왔다. 그것에 반응해 꼭 껴안자, 동시에 하루노도 안겨온다. 서로 꿈 같은 행복을 확인하듯이, 몸과 몸을 서로 겹쳤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은 바뀐다고 이따금 듣지만, 사실이었다. 1년 정도 전까지의 내게 가르쳐 주고 싶다. 엄청 예상 밖인 곳에 미래의 반려가 있다고. 뭐, 나니까 『있을 리 없다』라고 부정하겠지만.

  뭐 어쨌든.

  지금은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아직 보지 않은 희망으로 가득 흘러넘친 미래를 생각하면서, 이 행복을 하루노와 같이 나누자.


「하치만」
「하루노」


「「사랑해」」

 



  모사에 대해서




  이 항목에서는 「모사(模写)」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표본이 되는 프로의 문장을 일언일구 그대로 베껴 쓰는 것으로, 문장에 숨겨진 기술을 깊숙이 해독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습 방법입니다. 「쓰는」 작업을 통해 「읽는」 것이 주된 목적이므로, 베껴 쓰는 방법은 자필도 타이핑도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
  모사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단계에서도 실천 가능하지만, 필요 불가결한 연습은 아닙니다. 문장 연습의 숨 돌리기로써 특수한 연습법을 소개한, 예외 편처럼 생각해주세요.

  그런데. 모사는 바꿔 말하면 타인의 글을 한 번 자신의 안에 넣고 나서, 자기 글 능력 향상의 힌트가 되는 것을 찾는 작업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흐르듯이 읽어버리지만, 자신이 작자가 됐다는 생각으로 주의 깊게 베껴 쓰는 것으로 숙독 이상의 분석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표본으로 선택하는 작품으로는, 자신이 터득하고 싶은 기술이 특히 발휘된 것을 고르도록 합시다. 정통파 글쓰기 기술을 갖고 싶으면 문학 작품을, 캐릭터 간의 관계를 배우고 싶으면 그런 장면이 있는 작품을 선택하면 효과적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사는 자칫하다간, 타 작품의 모방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꽤 위험한 행위이므로, 할 때 특별히 조심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표본 글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결코 흉내 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사를 통해, 표본과 꼭 닮은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훔친다」 「흉내 낸다」가 아니고, 「공부한다」 「기술을 분석한다」라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만약 모사를 한 뒤, 자신의 글 속에 표본 글의 버릇이나 독특한 문구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봉인해주세요. 기술을 배우려고 한 나머지, 창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잊는 건 본말전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적이 모방이 아니고 공부인 것을 잊지만 않는다면, 모사는 유효한 연습 방법이 되겠지요.

  그러면 여느 때처럼, 모사의 장점과 단점을 아래에 열거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모사는 상당히 위험한 연습 방법입니다.
  전부 납득하고서 「나라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분만 도전해보세요.


☆ 모사의 장점

・소설의 기초 구조를 배울 수 있다.
・어휘를 늘릴 수 있다.
・정보를 전하는 데 적절한 순서, 연출을 배울 수 있다.
・타 작품에 대해 문장 단위로 아는 것이 공부가 된다.


★ 모사의 단점

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② 작풍까지 무의식중에 흉내내버린다.
③ 결점까지 공부해버린다.
④ 눈동냥이기 때문에, 본 것밖에 파악할 수 없다.


  단점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모사는 숙독의 상위호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꿔서 말해보면, 숙독과도 같은 것을 신중히 하고 있을 뿐이므로, 약간 효율이 나쁜 면도 있습니다.
  특히 장편 소설을 통째로 모사하면 상당히 공부가 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 걱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모사의 표본은 단편소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단편이면 이야기의 구조가 치밀하게 뭉쳐있어서 구성면에서의 공부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작풍까지 무의식중에 흉내내버린다.

  이건 처음에 설명한 대로, 모사하는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모사를 한 직후 뭔가 글을 쓰면, 손버릇으로 멋대로 표본 글을 흉내 내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것을 「글이 능숙해졌다!」라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든 거기서 멈추고 자숙해주세요. 일견 능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글이 매우 좋아하는 표본의 어휘와 문장 리듬, 문체로 쓰인 것을 닮았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이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확실히 붙들어 매는 게 중요합니다.

  ③ 결점까지 공부해버린다.

  장점과 단점을 분별하지 않은 채, 모사를 하면 타인의 글을 통째로 삼켜, 단점까지 장점이라 착각한 채 배우고 말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합니다.

  ④ 눈동냥이기 때문에, 본 것밖에 파악할 수 없다.

  작가의 문장은 작가의 머릿속에 축적된 데이터 중에서, 엄선한 한 패턴을 선택 추출해서 쓰입니다. 그러나 그 추출된 문장으로는, 그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다른 데이터나, 문장 선택 프로그램의 구조까지는 모릅니다.
  모사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추출된 글」 뿐이며, 아무리 모사를 반복해도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다른 데이터와 프로그램」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왜 이 장면에서 저런 표현을 썼는지 몰라」가 됩니다. 그럴 때는 스스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프로 작가의 문장 선택 프로그램을 추측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면, 우선 무리겠지요......
  문장을 고른 「작가의 두뇌」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으면, 막상 자신의 글을 쓸 때 응용이 안 될 때가 많아질 것입니다.
  이 데이터와 프로그램은 작자의 감성과도 연관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서 시행착오하며 경험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모사에서도 센스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 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역시 자신의 원고를 많이 써서 단련해주세요.
 

  ○ 정리!

  모사는 잘 사용하기만 하면 유효한 연습 방법입니다.
  혹시 자신의 글에 벽을 느꼈을 때는 타개책이 될지도 모릅니다.
  단 이용은 계획적으로!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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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화 【초등학교편⑧ 전편】


  ◆


  소독액이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냄새에 싸여, 나는 얕은 잠 속에서 계속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꿈을 꾸지 않는 잠은 오래간만이다. 마치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것 같은 깊은 평온함을 느끼며, 느긋하게 잠을 계속 탐낸다.


「......그래서, 사오리 아가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전화로는 문제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안심해주세요. 용태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검사 결과, 뇌나 뼈에 이상은 없었습니다. 단지 알려드린 바와 같이, 우폐가 손상되어 3시간 전에 긴급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는 안정, 그 밖의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은 마취 효과로 자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신 긴급 처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멀리서 들리는 소곤소곤하는 말소리.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여자의 목소리――성인 여성이라는 느낌이 나는 침착한 분위기――와 어머니의 목소리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격함이 느껴졌다. 마치 분노를 숨긴 듯.


「우선, 신에자키 사오리 양은 타박에 의한 긴장성 기흉이었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태였으리라 추측됩니다. 리사이클 센터에서 보고를 받아 여기에 차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26분. ......결론으로서는, 미지의 의사에 의한 빨대를 쓴 긴급 처치가 없었다면 지극히 중대한 결과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 정도였습니까...... 처치는, 선생님의 눈으로 봐도 문제가 없었다고요?」

「예...... 문제 없... 아니요, 오히려 훌륭한 처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단, 몇 가지 납득이 안 되는...... 네,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지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겠다. 마치 먼 외국말처럼 밖에 들리지 않는다. 포근포근하고 편안한 잠에 빠진 채, 멍하니 그 소리를 계속 듣는다.


「우선 무엇보다도, 환자――사오리 양――을 방치하고 자취를 감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 생명의 위험이 있는 환자를 방치하고 사라졌는데 수술은 했다는 것은 같은 의사로서 믿기지 않습니다. 혹시 용태가 급변했다면...... 왜 수술을 했으면서 자취를 감췄을까요?」

「학교 선생님...... 즉 마을 어른들에게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저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긴급 처치의 도움을 아키라――제 아들입니다만――초등학생에게 시켰다는 점입니다. 아키라의 왼쪽 어깨에 남은 환자의 손톱자국으로 보아, 흉강천자 시에 사오리 양의 몸을 억누르는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만」

「예, 아키라 군. 한 번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매우 성실한 소년이라 생각했습니다. 피로로 잠들어 있다고 들었는데, 아가씨를 도와 주셨군요...... 그것이 문제라는 건?」


  어머니의 목소리에, 역시 노기가 조금 섞여 있다. 평소 나나 사쿠라에게는 결코 내지 않는 목소리.
  항상 미소 짓던 어머니가, 이렇게 무서운 소리를 내다니......


「이것은, 제가 부모이기 때문에, 냉정한 판단이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초등학생에게 시킬 정도면, 왜 어른을 부르게 하지 않았을까요? 근처 시설에 학교 선생님들이 계셨는데요. 구명,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게다가 눈앞에서 수술까지...... 살아났으니 다행이지, 만일의 경우 아들은...... 아키라는 평생 후회하게 되었겠지요. 자신이 동급생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고. 도움이라고는 해도 아이에게 안이하게 생명을 짊어지게 하다니......」

「......그 점으로 봐서도 방금 전 같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의 어른과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의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도 용서할 수 없다?」

「예. 무슨 이유가 있어도, 꺼져 가는 생명보다 자신의 사정을 우선하다니. ......다만, 긴급 구명 기술의 우수함은 인정합니다. 불안정한 곳에서의 수술, 게다가 마취도, X-ray도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혈관이나 신경 등에 상처를 내지 않고 최소한의 절개를 했습니다.」


  어디선가 감도는 커피 향. 따뜻한 시트에 싸여, 나는 여전히 얕은 잠속에서 떠돈다.


「틀림없이 베테랑 의사라는 말입니까?」

「예, 틀림없습니다. 여기, 이 좁은 곳인데...... 제2 늑간 쇄골 중선으로 전혀 빗나가지 않고 한 번에 접근했습니다. 성인이라면 몸도 커서, 뼈의 틈새가 넓기 때문에 조금은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에자키 사오리 양은 발육이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 성인보다 매우 좁은 늑골 틈새에, 타 조직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빨대를 넣었습니다. 오한이 날 만큼 탁월한 수술 기술...... 굉장히 경험이 풍부한 외과의입니다. 그 정도인데, 그런 인물이 환자를 방치하고 떠난 건.....」

「......그렇군요.」


  잠시 동안의 침묵. 내 귀에 닿았던 소리는 그치고, 답답한 무음이 지배한다. 그러나, 몇 분 뒤......그 침묵을 찢고, 어머니가 아닌 쪽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이 일은 비밀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상황을 볼 때, 사오리 아가씨를 조치한 사람은, 전 신에자키가의 의사, 친부인 테츠오 씨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에자키가가 의뢰한 흥신소에 의하면, 5년 전에 신주쿠에서 확인된 이후, 발견되지 않은 것 같지만요.」

「아니요,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친이――아무리 긴급 처치를 했다고는 해도――친딸을 방치하고 사라질 리가......」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건 신에자키가의 문제입니다. 관여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거북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가벼운 헛기침을 한 뒤, 여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지만 지금, 신에자키가 당주님――사오리 아가씨의 어머님――은 재혼 준비로 매우 바쁘십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불씨를 지필 여유는 없습니다. 이번이 만일 테츠오 씨의 처치는 아니었다 해도, 재혼이 정식으로 결정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풍파는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즉, 이 긴급 처치를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가씨를 긴급 처치한 사람은 우연히 지나가던 아무 관계없는 의사였다...고. 게다가 원래, 형사사건이 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긴급 피난, 감당할 수 없는 처치였다고 선생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신에자키가 입장에서는, 선의의 제 3자였다고 판단합니다. 결코 전 부친이 살린 것이 아니다. 사오리 님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남자와 접점 따위는 없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부디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온 침묵. 나는 수면과 각성 사이를 계속 헤매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어딘가 한숨이 섞인 듯한 소리.


「......저는 의사입니다. 당부 받을 것도 없이, 환자의 병상에 관한 일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오리 양이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 할 경우, 그것을 전하는 것도 또 의사로서의 책무입니다. 그걸로 좋습니까?」

「예, 실은 아가씨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선생님에게 그런 부탁을 해도 소용없겠지요? 그걸로 괜찮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아가씨가 눈을 뜨면 다시 연락해주실 수 있습니까? 병원을 옮길 준비도 해야 하고, 자세한 상황도 사오리 아가씨에게 듣고 싶기 때문에」

「알겠습니다. 저녁까지 도서관, 그 이후는 휴대폰이면 됩니까?」

「아니요, 도서관이면 됩니다. 오늘밤은 저기서 묵을 테니까요. 그러면 선생님, 사오리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드님도 몸조심을, 아가씨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다망한 신에자키가 당주님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또각또각하고 바닥을 걷는 하이힐 소리, 그리고 문이 열린 뒤, 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민하는 듯, 슬퍼하는 듯...... 그것은,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기분을 내뱉는 듯한, 그런 답답한 한숨이었다.



 ◆◆



  그것은 갑작스러운, 너무나 갑작스러운 기상이었다. 진흙 같이 깊은 잠에서 단번에 깨어나, 너무 또렷해진 의식 때문에 반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며 눈을 떴다.
  나는 몸에 걸쳐진 하얀 시트를 젖히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기... 여긴 진료소?」


  멍하니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본 기억이 있는 하얗고 무기질적인 침대 위. 틀림없이 어머니 진료소에 있는 침대다.
  시각은 낮이리라, 창 밖에서 하얀 커튼을 투과하는 눈부신 태양광이 찌르고 있었다. 나는 청바지, 그리고 상반신은 진료소에 둔 푸른 유카타라는 언밸런스한 모습이다. 게다가 왼쪽 어깨에는 창상용 폴리우레탄 필름이 붙어 있었다.
  ――왜 이런 차림을, 거기에 왜 진료소 같은 곳에? 티셔츠는...... 아니, 애초에 뭘 하고 있었지? 어째서 왼쪽 어깨에 상처가......앗!?


「신에자키!!」


  단숨에 되살아나는 기억. 여러 장면이 머리에 순간적으로 떠오르지만,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다. 신에자키는 무사한가? 그 생각만으로 초조해진다.
  아직 잠에 취한 듯한 나른한 몸에 힘을 넣어 침대에서 바닥으로 발을 내딛는다. 힘이 약간 안 들어가는 손, 조금 아픈 왼쪽 어깨를 무시하면서, 병실 칸막이가 된 하얀 천을 잡아당긴다.
  독특하게 새된 소리를 내며 열리는 하얀 천. 그리고 몇 미터 옆의 침대를 나누는 희미한 녹색 커튼이 보였다.


「히이라기 군, 일어났어!?」

「――!? 신에자키! 거기 있어? 저기, 괜찮아!? 이 커튼 열어도 돼?」

「앗, 아...... 자, 잠깐 기다려...... 기다리세욧. 멋대로 열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녹색 커튼 너머에서 울리는 신에자키의 목소리. 평소대로 늠름하지만, 요염하고 그리고 매우 건강해 보여서...... 나는 크나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응」


  1, 2분 뒤 부스럭부스럭하고 뭔가를 정리하는 소리가 그치고, 겨우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힘차게 커튼을 열었다.


「――읏」


  그 순간, 나는 놀라움과 기쁨에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침대에 그 몸을 일으키고, 활기 있게 나를 바라보는 신에자키의 모습을 정신없이 보는 채로......
  목덜미부터 우측 어깨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평소 그대로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어딘가 기쁜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흑발은 가녀린 몸에 스르륵 흘러내리고, 파자마는 광택 있는 검은 옷감에 프릴이 붙은 호화로운 것. 고스로리 같지만, 그게 엄청나게 어울린다. 확실히 공주님,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나온 듯한 모습.


「뭐니? 그런 데 멍하니 서서는. 바보 아냐? 자, 여기에 앉으렴. 커튼을 계속 열어놓으면 눈부시잖니.」

「앗......응. 신에자키. 몸은 어때?」


  녹색 커튼을 닫고 신에자키에게 안내된 곳――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의 빈 공간――에 앉아서 말한다.


「몸은? 히이라기 군에게는 듣고 싶지 않아! 알고 있어? 너 거의 하루 내내 자고만 있었으니까. ......아무튼, 난 건강하지만! 넌 어때?」

「아, 그래!? 아니 난 건강해. 엄청나게 상쾌해. 그런가... 그렇게 자고 있었던 거구나.」


  그 수술 뒤, 급습한 졸음에 견디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낸다. 요즘 들어 꿈 때문에 피로가 겹쳤던 것, 7km 걸은 직후에 한 수술, 그 굉장한 긴장을 다 참지 못하고 쓰러진 건가......


「응? 하루 내내라는 건, 학교...... 앗! 거기에 어머니는?」

「바보구나,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이미 시작했어. 지금이라면 점심시간 전, 4교시일 때잖니? 그리고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이라면 왕진하러 가셨어. 급환이라고...... 후훗」

「앗, 왜 웃는 건데. 으으, 학교 땡땡이 쳤다고.」


  입가에 손을 대고 싱글벙글 미소 짓는 신에자키.


「어머, 미안해. 파파도 매일 바쁘게 지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이 알코올 냄새...... 병원에 자주 숨어들어가서 혼난 것도. ......정말 그리워. 후후, 거기에 아침, 네 침대 굉장했단다. 사쿠라 양과 칸나즈키 군이 병문안 왔었어. 상당히 이른 아침부터.」

「어?」


  사쿠라와 코이가 왔었나 하는 놀라움과, 신에자키가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표정의 부드러움에, 무심코 말이 막힌다. 그런 나를 보면서, 쿡쿡하고 미소를 띠며 계속 말하는 공주님.
  내가 앉은 침대의 위치와 그녀가 앉은 곳이 옆이라, 조금 허둥지둥하고 말았다. 신에자키가 우아하게 몸을 움직일 때, 뭐라 말할 수 없이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어느 쪽도 학교를 쉬고 너의 간병을 하고 싶다고 했었어. 뭐, ‘단순한 피로니까 걱정하지 말고 학교에 가렴’이라고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에게 듣고 마지못해 납득했던 것 같지만. 후후, 그래도 학교에 갈 때의 두 명의 얼굴,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

「그, 그래. 아, 그런데 신에자키는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거야?」


  평범한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건강하다는 그 무엇보다 큰 증거라, 그저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정말 즐거웠다.
  게다가 왠지, 신에자키도 평소보다 언행이 부드러워서, 이야기하기 매우 쉽다.


「그러네, 평소에는 6시부터 합기도 연습을 해서, 늦어도 4시 30분에는 일어나고 있어. 그래서 눈이 빨리 뜨였고, 아무개 씨는 칠칠치 못하게 자고 있어서 지루했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었어. 상처도 덕분에 괜찮다고 하고」

「윽...... 합기도, 헤에」


  합기도......라는 단어로, 어제의 일――실족할 뻔한 나를 도와주었던 묘한 동작――을 떠올린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우아했던 몸과 긴 손발,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예리한 눈동자의 아름다움.
  바로 옆에서, 흑발을 왼손으로 귀에 걸치며 미소 짓는 신에자키. 검은 프릴이 붙은 파자마가 역시 잘 어울린다. 조금 더운 탓인지, 고스로리풍 파자마의 버튼을 풀어서 아름다운 쇄골 라인이 보이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이 빨려 들어갈 정도로 하얀 피부. 그곳을 보고 두근두근한 나는 깨닫지 못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밝은 분위기, 거기에 숨겨진 불안정함, 신에자키의 여린 면을.


「저기, ......그런데 히이라기 군. 그, 조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니?」

「응, 뭔데?」


  20분 정도 느긋하게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던 우리들. 하지만 갑자기, 신에자키의 말투가 바뀐다. 철컥하고 스위치가 바뀐 것처럼...... 그것은 조금 전까지의 온화한 분위기와는 달리, 어딘가 어둡다.
  띠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조금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표정이 되는 그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쩐지 말하기 어려워서, 마치 무서워하는 것 같은 분위기.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3분 정도 침묵한 뒤, 아름다운 얼굴을 숙이고, 오도카니....하는 느낌으로 겨우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조금 들었는데, 너. 내가 실족한 곳에서 어른 남자를 만났지? 그 사람 뭔가 말하지 않았어? 그게, 내 생일이라든가......」

「어?」


  너무나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 조금 무서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평소 느낌과는 전혀 다른,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 가녀리고 덧없는 인상.


「아,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어떻든 좋아. 그래...... 그 사람, 건강해 보였어?」


  조금 비음이 섞인 허약한 소리. 기원하듯 양손을 끼며,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
  하지만 나는 잘 대답하지 못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신에자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미, 미안. 신에자키. 무슨 말을......」


  그저 시간 벌기처럼 횡설수설하게 입을 연다. 하지만, 신에자키는 듣지 못하고 말을 계속한다. 몸에 가득 찬 불안을 쏟아내듯이, 내게 매달리듯이.


「아침에 말인데, 나.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에게 들었어. 그 때, 긴급처치를 해 준 의사가 있다고, 그걸 너도 도와줬다고! 그 사람이 내 파파야, 날 도와줬던 사람이! 저기, 파파. 아픈 느낌은 아니었어? 제대로, 확실히 잘 지내고 있었어? 알려줘, 나. 파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걱정이야! 사소한 거라도 알고 싶어.」

「아......」


  둑이 터진 듯 넘쳐 나오는 그녀의 말. 마치 애원하는 듯한 소리.
  그리고, 나는 퍼즐 조각이 채워진 것처럼 이해했다. 어제의 수술...... 그걸 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왠지 신에자키의 아버지가 한 일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건......」


  확실히 내가 수술한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 한심하게도 설명하기 전에 나는 잠에 빠져 버렸다.
  당연히, 나 같은 초등학생이 수술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의사가 그곳에 있었을 거라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왠지, 신에자키의 아버지가 수술을 한 셈이 되었다고.


「그 때, 너무 아파서, 정말로 아파서...... 이제 죽는 편이 좋다고까지 생각했어.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억나.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힘내, 힘내!』라고 필사적으로 크게 외치는 소리. 나를, 그 소리가 구했어. 마치 꼭 껴안긴 것처럼 행복했어. 그래도, 역시 착각이었는지도......」


  수술할 때, 신에자키가 강하게...... 마치 매달리는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를 갈구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항상 빠듯하게 계속 노력하는 그녀.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오늘의 신에자키가, 온화하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는 정말 좋아하는 아버지가 도와줬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세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기서 진실...... 수술을 한 사람은 나였다고 말해도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때, 정말 행복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정말 좋아』라고 중얼거린 신에자키. 그것은 전부 거짓말, 그녀의 착각이었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했어? 나, 파파한테 또 폐 끼쳤어...... 계속 보고 싶다고 바랐는데, 보러 와 주지 않았어. 아니,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역시 어떻든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딸이라 나, 날, 역시 방해라고...... 어쩌지, 파파한테 미움 받으면 나, 어떻게......」


  마지막은 이미 질문조차 아닌, 그저 오열이었다.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그녀의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 검은 옷으로 떨어져간다. 그 아름다운 빛이 내 마음에 도려내듯이 꽂힌다.


「신에자키」


  그녀는 나와 같다. 언제나, 항상 생각하던, 나는 어머니에게 폐가 되는 존재, 방해인 건 아닌가? 신에자키의 슬픔을, 내 아픔인 것처럼 똑똑히 느낀다.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충동. 자극 받은 대로 그녀의 하얀 손을 감싸듯이 잡고, 말을 짜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필사적이라 별로 얘기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 아버님은 건강해 보였어. 거기에, 생일 축하한다고. 신에자키를 많이 좋아한다고. 살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말했어. 어떻든 좋을 리가 없어! 절대로, 폐라니! 절대로! 신에자키를 방해라니, 싫어할 리가 없잖아!」

「......응」


  나는 최악에 잔혹한 거짓말쟁이다. 이 거짓말이 발각되는 순간, 신에자키는 나를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미워하고 경멸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는 충동에 지배된 채, 울고 있는 그녀의 양손을 꼭 쥐었다.
  내 뺨에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울 자격 따윈 없다, 최악의 거짓말쟁이인 주제에...... 지금까지라면, 상관없다고 결론짓고 진실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믿을 수 없다고 해도, 딱히 어떻든 상관없다면서 아무 흥미도 없이 차갑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에자키의 마음이 망가지는 것이 무섭다. 이 최악의 거짓말로 인해, 언젠가 더 큰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도 지금, 그녀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자기혐오.
  그 속에서, 내 진정한 마음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려고 할 말을 찾는다.


「나도, 신에자키가 살아서...... 정말, 정말로 기뻐. 미안해, 신에자키. 그래도......나도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고마워, 고마워. 히이라기 군」


  서로 맞잡은 우리들의 양손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떻게 말해야 했는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해야 할 때가 온다.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 될 거라고......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커튼 너머로 밝은 햇빛이 비치는 침대 위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양손을 잡고 말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계속 기다렸다. 조금 코를 톡 쏘는, 익숙한 알코올 냄새에 싸이면서.



 ◆◆◆



  리사이클 센터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다.
  ――결국, 나는 최악의 거짓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어머니가 잠시 상황을 물었을 때도, 『모르는 남자를 도와줬어. 하지만 필사적이라 거의 기억나지 않아.』같은 대답만 반복. 신에자키는 후교의 큰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가방은 그 때 코이가 들고 가준 것 같아, 사고 다음 날에 학교에서 받았다.


『아키라, 고민 있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말해봐』


  라고 했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맥 빠질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돌아와, 나는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아 진짜, 왜 그렇게 째려보는 건데. 게다가, 왜 코이까지 여기에 있는 거냐고!」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 수요일 방과 후, 우리 집.
  웬일인지 나는, 소꿉친구인 사쿠라와 친구인 코이의,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싱글벙글하고 미소 짓는 사람은 어머니 뿐, 사쿠라와 코이는 기분이 안 좋은 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로 빤히 흘겨본다.


「시끄러 아키라. 사쿠라랑 놀려고 온 거야. 그런데 그 나비넥타이는 뭐야! 엄청 이상해, 전혀 안 어울려! 진짜 바보 아키라라는 느낌」

「맞아 아키라 오빠. 엄청 안 어울려. 틀림없이 비웃음 받을 거니까 안 가는 게 어때? 지금부터 거절 전화를 걸면 되잖아, 응? 선생님하고 칸나즈키 선배, 넷이서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그렇게 무서운 짓,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악전고투하며 턱시도를 몸에 맞추는 내 고생을 모르고, 멋대로 떠벌려대는 둘.
  반바지에 티셔츠의 러프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은 채, 내 마음에 드는 쿠션을 멋대로 안고 있는 친구, 그리고 아까 전부터 여기저기 잡아당기며 방해하는 소꿉친구를 흘겨본다.
  하지만, 그보다 기분이 안 좋은 시선으로 되돌아와, 당황해서 눈을 돌렸다.


「자, 둘 다. 아키라를 그렇게 괴롭히면 안 돼. 후훗, 여길 봐 아키라, 모처럼이니 사진 찍어둘 테니까.」

「잠깐, 어머니까지...... 아아, 진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찰칵찰칵하고 셔터를 마구 누르는 어머니. 이런 턱시도 차림...... 엄청 부끄러운데 전혀 아랑곳없이 연사한다.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나는 턱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 장의 종이를 만진다. 그렇다, 이 얇은 종이가 모든 원흉이다. 광택이 나는, 그야말로 고급스런 감촉의 하얀 종이. 정중하게 붉은 밀랍으로 봉해진 그 내용.......

「아-아~ 그런데 말이야, 아키라만 파티에 초대받는 건 뭐야? 치사해! 으으으윽, 나도 가고 싶었어. 예쁜 드레스, 호화로운 요리, 거기에 디저트!」

「맞아, 치사하다구! 칸나즈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왜 오빠만!? 저기, 오빠. 진짜로 신에자키 선배랑 무슨 일인가 있었던 건 아니지?」

「시끄러, 바보 사쿠라. 아무 일도 없다고 계속 말했잖아! 다만, 일전의 감사를 겸한다는 걸로...... 거기에 원래 초대받은 사람은 어머니고. 어머니가 만약 급환이 올 수도 있다고 거절해서, 별 수 없이 내가 가게 된 거잖아.」

「자~! 여기 봐, 아키라. 이쪽으로, 엄만 다음에는 미소를 찍고 싶어. 응? 방긋 웃어봐, 응. 그렇게. 잠시 그대로, 그대로!」


  사쿠라와 코이에게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설명을 반복하며, 어머니의 카메라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는다.


『신에자키가 차기 당주 신에자키 사오리 탄생 12년 기념 파티 초대장』


  주머니에 든 하얀 종이에는, 금색 글자로 그렇게 쓰여 있다. 하지만, 초대장이라기보다는 소환장......이라 말하는 편이 정확한 것 같다. 사쿠라와 코이, 그리고 어머니를 상대하면서, 나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의 일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주, 금요일 방과 후. 사쿠라를 사쿠라의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바래다준 뒤에 간 읍립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
  여전히 귀엽게 미소 짓는 사서 님에게 인사를 하고, 의학서실로 들어갈 허가를 받았다. 실은 신에자키와 같이 가야 했지만, 그녀는 후교시의 병원에서 입원중이라 어쩔 수 없다.
  혹시 안 된다고 거절할 수도? 이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순조롭게 사서 님이 허가를 해줘서 나는 매우 기분 좋게 의학서를 읽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뭐지? 하고 뒤돌아 본 내 시선의 끝에는......


「신에자키, 어째서!?」


  거기에 서 있던 사람은 사복을 입은 신에자키였다. 평소의 교복이 아니라, 흰색의 심플한 원피스에 검은 핸드백을 들고 있다. 옷단은 매우 짧고, 거기서 뻗어 나온 긴 다리에는 흰색 롱 삭스, 신발은 검은 하이힐. 머리에는 빨간 헤어밴드를 단, 틀림없는 아가씨.
  오른쪽 어깨에 이미 붕대는 없고, 거즈가 붙어 있었다. 안색도 좋아서, 매우 건강해 보인다. 그 때의 가녀린 느낌은 조금도 없고, 날카로워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넘쳐 나오고 있었다.


「뭐야, 나빠? 지금, 집에서 요양 중이야.」

「아, 아니. 전혀 나쁘지 않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다. 무슨 일로, 아......혹시 여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그게, 미, 미안. 조심해서 읽을 테니까. 정말 미안.」


  가늘고 길게 째진 눈동자로 찌릿하고 흘기는 그녀. 기분이 안 좋은지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얼굴은 화난 듯 약간 붉다.
  당황해서 의학서를 닫고, 그녀에게 머리를 숙인다. 신에자키에게 아버지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책을 읽어버린 것은――아무리 그녀가 입원중이라 생각했다고는 해도――내가 나쁘다.
  역시 화내고 있구나......하고 내심 한숨을 쉬면서, 약간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그녀를 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바보」

「어?」

「――읏, 아무것도 아냐! 여전히 짜증나!」


  하얀 원피스를 통해 보이는 노출된 어깨, 호리호리한 팔로 팔짱을 끼고 뭔가 초조한 듯 손가락 끝을 움직이는 그녀. 발끝에는 이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돌이 붙어 있어서 매우 사랑스럽다. 그래, 겉보기만은......


「아아 정말, 몰래 빠져나와서 시간이 없어! 자 여기!!」

「어? 뭐야?」


  빠르게 말하며,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하얀 물건을 꺼내는 그녀. 그것을 엄청난 기세로 내 눈앞으로 쑥 내민다.


「이건.....뭐야?」

「됐으니까 받으렴, 자.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으, 응」


  완전회복, 평소대로 유아독존 모드인 신에자키. 기세에 눌리며, 나는 그 하얀 종이를 받는다.


「다음 주 수요일. 18시부터니까. 만약 안 오면 알지?」

「저기, 우선 뭐가 뭔지......」


  하얀 종이는 편지 봉투, 게다가 붉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어서 솔직히, 난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나를 밀어붙이듯 말을 계속했다.


「그럼 나 돌아갈 테니. 저기...... 조금은 댄스 연습 해두세요.」

「네......?」


  또각또각하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의학서실에서 나가는 그녀. 그 뒷모습조차 터무니없이 균형 잡혀서 손에 든 편지를 무심결에 잊고 바라보았다.
  ――내가, 그것이 초대장이라는 것을 이해한 때는 20분 뒤. 뭐가 이상한지, 쿡쿡하고 계속 웃는 사서님과 둘이서 봉투를 열었을 때였다.




・제 9화 【초등학교 편 ⑦ 후편】

 
  ◆



  태초의 대지 아프리카, 그 NGO 의료캠프에 내가 부임하고 난 지 2년 수개월. 아직 짧은 기간이지만,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임상을 경험했다.
  최근에는 갓 부임했을 때에 비해서 조금은 기술이나 정신면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려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 뜨는 밤이 있었다. 깜깜하고 좁은 독실 안에서, 화악하고 찌는 듯이 더운 침대 위. 온몸에서 땀이 흘러, 마치 시체처럼 차가워진 내 몸을 양손으로 붙들고, 딱딱하고 어금니를 떤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할 수 없었던 많은 환자들.
  안이하게 자신을 탓하는 것은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신 차리고 받아들인다......고는 생각하지만, 우연한 순간이나 꿈속에서 마치 칼로 가슴을 도려내진 듯한 통증을 느낀다. 마음이 부서질 것 같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억누르지 못하고 후회한다.
  ――혹시 그 때, 좀 더 다른 접근방식을 썼으면 그 애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시 환자의 우선순위를 오인했던 게 아닌가? 애초에 내가 아니라 다른 의사의 기술이라면 그 부모와 자식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러 생각이 가슴에 흘러넘쳐, 어둠 속에서 홀로 고뇌를 되풀이한다. 내일의 수술을 대비해서 자야한다는 건 알지만, 물결처럼 밀어닥치는 후회가 계속 가슴을 꽉 조인다.


「......사쿠라, 어머니」


  선진국의 고도구명 구급센터조차 10% 이하의 Probability of Survival value(예측 구명률)밖에 없는 증례가 도중에 끊이지 않게 옮기는 일상.
  몸에 큰 창상을 몇 가지 입은(중증 다발 외상) 환자가 동시에 몇 명이나 와서 난처했을 때, 누구부터 그리고 어느 부위부터 처치하는가? 그것은 거의 도박과도 같다. 거는 것은 환자의 생명.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와 압박이 삐걱삐걱 정신을 침식해간다.


『나, 어른이 되면 엄마 같은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아키라......』


  코 안에서 되살아나는 톡 쏘는 소독액 냄새...... 어릴 적 기억. 의어머니가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셨을 때 내가 불쑥 했던 말. 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별로 기쁜 표정을 보이지 않았던 의어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된 지금이라면 그 표정의 이유를 안다. 어딘가 난처한 듯, 그리고 슬픈 듯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어머니도 의사로서, 이 피를 토할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어머니......」


  결단을 내리지 못해도, 판단이 늦어도, 우선순위를 잘못해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도, 속도가 부족해도――환자는 쉽게 죽는다. 그것은 당장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로프를 건너는 줄타기. 정신을 쥐어짜서, 할 수 있는 한계의 끝까지 최선을 다해도, 눈앞에서 사라져간 생명은 이루 다 세지 못한다.
  내가 의사인 한 틀림없이...... 이 무력감, 자기혐오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구한다고 믿으면서 계속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결코 의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지 않는다. 비록 빠듯한 줄타기의 연속이라도, 후회하는 일 투성이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사쿠라......」


  여기서 무너지면, 사쿠라가 눈을 떴을 때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사쿠라, 그리고 중요한 몇 가지를 버리고 의사가 된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대체 눈을 뜰 소꿉친구를 무슨 낯짝으로 만나야 하지?
  머리에 어머니와 사쿠라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침대로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정신과 몸을 쉬게 해야 한다. 내일, 또 빠듯한 선택이 재촉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 때,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


  신에자키가 쓰러진 장소를 본다. 주변은 약간 평평해서 위험은 없다고 판단.


「신에자키!!」


  큰 소리를 내며 옆으로 달려가지만 대답은 없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서, 손목 조금 위――요골동맥――로 손가락을 대어 호흡을 확인한다. 신에자키의 반듯한 얼굴에 묻은 선혈. 하지만 그건 많은 출혈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심장이 움직이고 있는가? 자발 호흡을 하고 있는가? 를 확인하는 게 최우선이다.


「좋아...... 맥은 있어. 하지만!!」


  내 손가락 끝에 닿은 가느다란 손목의 맥. 그것은 미약했지만 두근두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호흡이 분명히 이상하다. 핑크색이었던 신에자키의 입술은 조금 새파래지고, 호흡은 핫핫 하는 느낌으로 얕다.


「신에자키!! 들려?」

「.....」


  아름다운 얼굴을 고통으로 찡그리는 그녀. 머리를 다쳐서인지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가녀린 양 어깨를 들썩이며, 얕은 호흡을 반복하고 있다.
  ......위험하다. 나는 크게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오른손으로 목을 촉진하면서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연다. 하지만 호흡을 방해할만한 이물은 보이지 않고, 목에 뭔가가 찬 상태도 아니었다.


「기도는 통해, 있는데...... 더 넓게 통하는 각도로 움직여볼까? 아니, 안 돼. 머리를 다쳤어, 경추가 손상될 우려가」


  패닉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행동을 확인하기 위해 중얼거리며,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서, 빨리 지퍼를 연다. LED 펜라이트, 가위, 붕대, 테이핑 테이프, 껌 테이프, 자를 몇 개 정도, 스포츠용 휴대 산소캔 등을 서둘러 꺼낸다.
  이마의 상처로 보아――출혈은 크진 않지만――실족 도중에 머리를 다쳤던 것이라 추측된다. 지금 당장은 생명에 연관되진 않겠지만, 머리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경수가 손상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경추를 고정하기 위해 신에자키의 목에 자를 구부린 것이나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써서, 그 부위가 혈관을 압박하지 않게 테이핑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한다. 옮겨도 경추에 머리 부분의 무게가 가해지지 않도록.


「좋아, 바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리사이클 센터로 달려가서 연락, 어른의 힘을 빌려 그녀를 차에 옮겨 태운다. 거기서 산길을 빠져나가 어머니의 진료소까지 20분 정도인가. 여기서 움직이는 시간을 포함하면 총 30분은 걸릴 것이다.
  심장은 움직이고 있다. 출혈은 많지 않지만,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머리에 상당히 강한 충격을 받았을 우려가 있다. 급성경막외혈종일 가능성도 있다. 빨리 머리 부분을 CT스캔해야 한다.
  아니 하지만......하고 발을 멈췄다. 무언가가 나를 잡아 세웠다. 걱정되는 것은 호흡. 이 증상은......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바로 시설로 달려가서 어른을 불러오는 것. 또는 지금 당장 신에자키를 진단하는 것. 어느 쪽이든 헤맬 시간은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간만은 지나간다.


「아니, 역시 호흡이야. 무엇보다도 호흡을 우선, 이 증상은 위험해.」


  급성경막외혈종일 수도 있지만, 우선 호흡이 먼저다. 머리라는 것은 의외로 튼튼해서, 시간 유예는 있다. 구명에서 가장 우선되는 ABC, Airway(기도확보), Breathing(호흡), Circulation(심장마사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평소 무의식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호흡이라는 행위. 그러나 호흡이 정지하고 단 5분만 지나도 뇌세포가 죽기 시작한다. 아니, 그 전에 호흡이 멈추면, 몇 분 이내에 심장정지가 병발된다.
  CPA(cardiopulmonary arrest) 심폐 정지상태가 되면 인간은 3분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고, 목숨은 살아나도 뇌에 평생 사라지지 않는 후유증이 남는다.
  보통 아이라면 어른을 불러 병원에 옮기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다를 것이다. ......게다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생명은 유지될 것인가?
  나의 이 지식은 무엇 때문에 있지? 사람을 구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신에자키! 미안, 셔츠를 자를게!」


  가위를 써서 주저 없이 그녀의 하얀 프릴 셔츠 그리고 그 아래, 반들반들한 하얀 속옷을 자른다. 일일이 버튼을 풀 시간은 없다. 드러나는 옅은 핑크색 브래지어에 조금 동요하면서 그것마저 재빨리 잘랐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 다만 우측 흉부에 내출혈이 있다. 그리고 땀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땀이 맺혀 있다. 호흡은 처음과 변함없이 얕고 빠르다. 이제 곧 호흡정지가 될 것 같은 기색. 그 원인, 신에자키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원인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듯 침을 삼키며, 양손을 그녀의 양 옆구리, 폐 위 쪽으로 대어간다.


「젠장...... 우흉부에 피하기종이 있어. 설마 이건」


  신에자키의 큰 유방 옆에 댄 내 손가락 끝에 닿는 독특한 감촉. 피와는 전혀 다른,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옴폭옴폭한 느낌――피하기종――피부 아래에 공기가 비집고 들어가, 마치 종기처럼 되어 있었다.
  이 증상은 상처 같은 곳으로 공기가 비집고 들어갈 때도 발생하지만, 눈에 띄는 창상은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호흡이상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청진기가 없는 게 안타깝다. 분해서 이를 갈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으며,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고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면서 타진해간다. 내 손가락 끝에 반응해서, 그녀의 폐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반향음...... 그것을 듣고 놓치지 않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우폐가, 틀림없어...... 타박에 의한 긴장성 기흉」


  ――기흉은, 간단하게 말하면 폐에서 공기가 가슴 속으로 새기 시작하는 병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지금 신에자키에게 일어나는 것은 외상성일 것이다. 실족했을 때, 우흉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건가.
  가까이 있는 스포츠용 산소캔을 열어 그녀의 새파래진 입술에 꽉 댄다.
  기흉일 경우 무리하게 공기를 넣는 인공호흡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되지만, 고농도의 산소를 자발적으로 마시게 하는 것은 위안 정도의 효과가 있다. 의료용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스포츠용 산소캔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는,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도 무리......인가?」


  긴장성 기흉은 극적으로 진행된다. 빨려 들어간 공기는 신에자키의 우폐 밖에서 계속 끝없이 부풀어 올라, 곧바로 정상인 좌폐만이 아니라 심장까지 압박한다. 어머니의 진료소까지 30분...... 그 사이에 긴장성 기흉에 의한 압박으로 심장정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젠장!!! 어쩌지?」


  우물쭈물할 시간은 없다. 여기서 시설에 어른을 부르러 가도,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신에자키의 생명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눈앞에서 자꾸자꾸 새파래져가는 그녀의 얼굴.
 만약 여기가 병원에, 손에 16게이지(약 1.2mm)의 주사바늘이 붙은 주사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흉강천자를 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
  ――흉강천자――우선 쇄골 중앙에서 바로 밑으로 선을 그어, 바로 아래에 있는 제2 늑간 틈새에 바늘을 찔러 넣는다. 흉벽을 넘어 주사기로 폐와 가슴 틈새에서 고인 공기를 뽑아내는 의료기술.


「뭔가, 뭔가 없을까?」


  신에자키의 아름다운 얼굴은 새파래져, 스포츠용 산소를 거의 들이마시지도 못하게 되었다. 망설일......망설일 시간은 없는데, 아무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여기서 우물쭈물할 거면, 바로 어른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주사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차로 출발해서 어머니가 있는 진료소까지 신에자키가 버틸지 어떨지? 안 돼, 늦는다. 기적을 바라는, 너무도 확률이 낮은 선택이다.
  가방 안을 휘저어, 뭔가 없을까? 하고 필사적으로 계속 생각한다.
  죽는다......바로 아까 전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침착하고 여유로웠던 그녀가.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나의 양 손을 잡아, 예리한 시선으로 걱정해준 신에자키가......죽는다.
  두렵다, 생명의 선택, 결단이 터무니없이 두렵다. 그리고 신에자키가 죽는 게 무섭다. 어차피 무섭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을.


「젠장, 안 돼. 신에자키!! 절대로 죽게 하지 않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가방 속에서, 어디서나 팔고 있을만한 약, 메스, 작은 라디오 펜치, 알콜――도서관에 있던 손가락용 살균 알코올을 채운 것――이 들어간 플라스틱제 물병, 작은 드라이버, 그리고...... 우유팩에 붙어 있던 빨대를 꺼낸다.
  그것들을 청결한 거즈 위에 두고, 촤아악하고 병에 든 알코올을 전부 뿌린다. 내 양손에도 끼얹어 임시적으로나마 살균을 마쳤다.


「미안해, 신에자키」


  그녀의 우측 흉부, 쇄골의 정중앙에서 아래로 기세 좋게 갈색 약을 바른다. 갈색 약의 성분은 포비돈 요오드――외과 수술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소독약과 완전히 같다――이다.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각오를 다지며, 요오드의 살균작용이 발휘될 때까지의 30초간을, 메스를 든 채 가만히 기다린다.


「호흡미약......」


  핫핫하는 느낌으로 가까스로 계속되던 그녀의 호흡. 그러나 그것은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약해져간다.


「25, 26, 27......」


  하지만 아직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왼손가락 끝에 닿은 신에자키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 겨드랑이 동맥은 약하지만 확실히 맥박치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그녀의 몸은 살기위해 전력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29, 30! 수술개시!!」


  그대로, 그녀의 몸을 억누르고 주저 없이 오른손에 든 메스를 휘두른다.


「――으으읏!!」


  힘차게 벌떡!! 하고 튀어오르는 신에자키의 몸. 격통이 퍼져가는 것이리라. 억누른 내 왼팔 너머, 왼쪽 어깨에 손톱을 세운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징조다. 통증에 반응한다는 사실....... 그것은 경추에 상처가 없는 증거이고, 무엇보다도 육체가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거니까.
  나는 왼쪽 어깨에 그녀의 손톱이 파고들어, 우지직 피부가 찢어져도 상관하지 않고 단번에 메스를 움직인다. 오른쪽 유방 근처를 약간 절개해서, 제2 늑간격까지 드라이버가 닿기 위한 터널을 만들어간다.
  그대로, 라디오 펜치로 절개한 부분을 열어서 고정......


「아프겠지만...... 그래도, 절대로 죽게 하지 않을 거니까!!」


  가는 드라이버에 빨대를 씌운 것을, 기세 좋게 찔렀다. 지지직하고 근육이나 조직이 저항하는 감각...... 그것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지점――흉벽 너머, 폐에서 빠져나간 공기가 고인 곳――을 향해서.


「우으으으으읏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읏!!!」

「신에자키, 신에자키!! 힘내! 힘내!!」


  시간으로 따지면 1, 2초겠지만, 마치 5분같이 느껴진 고통의 순간은, 그러나 갑자기 끝났다.
  스윽....... 저항이 가벼워져 닿은 반응을 느끼고 빨대만을 남긴 채 드라이버를 뽑아간다. 그 순간, 빨대에서 기세 좋게 공기가 슈우슈우하고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에자키의 호흡이, 깊고 확실히 재개되어간다. 입에 씌운 산소캔을 자발적으로 들이마시고 있다.


「좋아, 흉강천자..... 완료!」


  약국에서 산 항생제가 든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절개한 부분 앞을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 찔러 넣은 상태인 빨대가 구부러지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담아 붕대를 감는다.
  그 사이에도, 그렇게나 새파래졌던 신에자키의 안색이 점점 회복되어간다. 뺨에 붉은 빛이 돌고, 온화해져서 평상시의 호흡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선, 호흡에 연관된 위기는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수술 중에 느끼던 통증도, 단단히 고정된 지금은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뭐, 서투르게 손댔다가는 격통이 느껴지겠지만...... 하지만, 신에자키의 몸이 통증을 느끼고 반응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징조다.


「좋아, 나머지는...... 신에자키, 신에자키. 들려? 들리면 눈을 떠봐!!」

「우으...... 파, 파파야?」


  맥박, 호흡의 안정을 확인. 경부 교감신경이 마비됐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동공반사 테스트를 하려고 LED 펜라이트를 쥐고 확인.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확실히 반응이 있다. 호소에도 반응하고 있고, 약간 의식――지금이 언제고, 여기가 어디인가?――에 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지금 바로 위험하다는 건 아니다. 사지의 마비 같은 것도 없어 보인다.
  후우......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 때.


「아키라, 어디야?」

「코이!? 코이, 마침 잘 됐어! 여기야! 선생님과 어른을 몇 명 불러와. 신에자키가 다쳤어.」

「어? 무슨.....아, 우왓!!」


  바스락바스락 나뭇가지를 제치고 모습을 나타낸 친구. 여러 가지로 바삐 돌아다녔는지, 오렌지색 티셔츠는 땀에 젖어 코이의 맨살에 붙어있다. 그리고 나와 신에자키의 모습이 보였는지, 놀란 듯이 입에 손을 대고 말문이 막혀 있다.


「아키라!? 왼쪽 어깨! 뭐, 뭐야 그거. 피투성이잖아!! 괘, 괜찮아?」

「뭐? 무슨 말을...... 됐으니까 선생님을」

「어? 공주까지 쓰러지고......근데, 우왓, 붕대! 거, 거기에 크, 큰...... 그게 아니라 왜 공주는 옷을 안 입은 거야」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며 얘기하는 코이. 그 말로 나는 조금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신에자키는 지금, 상반신이 알몸(오른쪽 가슴은 붕대가 감겨 있지만)으로, 그......초등학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왼쪽 가슴이 노출되어 있고. 예쁜 연분홍색 돌기까지 내 시야에 확실히 들어와......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촉진할 때는 그 부드럽게 부푼 곳을 손댔을 터......


「우와아아아앗, 어, 어쩌지? 그래, 우선 내 티셔츠를......」

「꺄악! 아, 잠ㄲ...... 앗...... 바보 아키라! 내, 내 앞에서 벗지 마! 아, 우와아앗, 정말」


  코이의 비명을 흘려보내며 티셔츠를 벗어서, 신에자키의 가슴에 걸친다. 그리고 내가 잘라낸 하얀 프릴셔츠와 껌 테이프로 붙였다. 그 때, 욱신욱신하고 왼쪽 어깨부터 팔까지 찌릿한 통증을 느낀다. 보면, 거기에는 신에자키의 손톱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래... 아플 거야. 그래도, 아무튼 어떻든 상관없어. 그것보다 코이, 부탁이니까 빨리 선생님을 불러줘. 신에자키가 실족한 것 같아서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해.」

「아, 으, 응. 알았어...... 가, 갔다 올게.」


  힐끔힐끔 내 가슴을 본 후, 더 없을 만큼 새빨간 얼굴로 달려가는 코이.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 나는 널려있는 도구들을 전부 가방에 넣는다.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신에자키의 맥을 만일을 위해 손대면서, 그녀의 이마에 흐르던 피(거의 멈췄다)를 물티슈로 닦으려고 가까이 갔다.


「파파? 우으, 추워.」

「미안해, 신에자키」


  이마의 상처를 물티슈로 조심스럽게 닦고 있을 때, 눈을 살짝 뜨고 중얼거리는 그녀. 의식이 조금 뚜렷하지 않은 걸까. 나를 아버지로 오인한 것 같아, 매우 부드러운 미소로 올려본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어리광부리듯이 손을 뻗어, 그 희고 긴 손가락을 내 손가락에 휘감았다.


「시, 신에자키!?」

「파파...... 역시 내 생일 축하하러 와줬어. 기뻐......정말, 정말 기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비춰진 신에자키의 그 표정은 매우 아름다워서, 나는 무심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신에자키의 미소는 보고 있는 동안에 사라지고, 그리고 외로워서 참을 수 없는 슬픈 표정이 되었다.


「아아..... 파파. 나 말이야, 나...... 매일 노력하고 있다구? 매일, 굉장히 괴로워서...... 울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 그래도......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매일 일을 참고 노력하던 파파의 딸인걸.」


  그녀의 얼굴...... 그것은 평소 같이 딱딱한 표정이 아니고, 마치 어린 아이. 눈동자에 눈물을 살짝 띄고, 내게 필사적으로 말을 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고, 그저 말이 없는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그러니까...... 부탁이니까 돌아와줘 파파. 이제 일 때문에 늦어도 뭐라고 안할게. 또 내 생일을 잊어도 화내지 않을 거니까. 공부도 좀 더 노력할게. 연습도...... 부탁이야......파파. 나, 나......힘들고, 외로워서 못 참겠어. 부탁......부탁이야, 파파」

「신에자키......」


  어린 아이 같이 앳된 소리. 내 가슴이 꼭 조이는 것처럼 아프다. 사쿠라와 알게 되기 전, 홀로 어머니의 귀가를 계속 기다린 매일 밤을 떠올린다. 저것과 같은 외로움을...... 아니, 양가의 자녀라는 압박이 있는 만큼, 신에자키 편이 괴로웠을 것이다.
  거기에 지금, 그녀에게는 사이가 나쁘다고 소문난 어머니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완벽해서 매우 다재다능한 그녀는, 그러나 위험할 정도로 빠듯하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에자키, 괜찮아. 친구가 되자? 지금부터는 나도 같이 힘낼 테니까.」


  들리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하고,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소녀, 그 눈물을 멈추고 싶어서. 손을 세게 잡아 상냥하게 피로 더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런 내 말이 닿았는지, 그녀는 눈물을 띄우며, 허약한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말이야,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어. 후후, 파파랑 조금 닮았으려나. 한 번 정한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아가는 서투른 사람. 얄밉다고 생각했었을 텐데......하지만, 나만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줬어. 요즘, 그를 생각하면 조금..... 외롭지 않게 돼.」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천천히 닦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당황스러워 보이는 발소리.


「파파...... 너무 좋아. 또, 만나러 오기야, 고마워.」

「신에자키, 널 구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로 기뻐.」


  마지막에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구조하러 온 선생님들을 큰 소리로 계속 부르려한다. 하지만 체력을 너무 소모한 탓인지, 휘청휘청하고 나무에 기대고 말았다. 머릿속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다.


「구할 수 있어서......다행이야.」


  질질하고 나무 밑에 주저앉는다. 졸리다...... 엄청 졸리다. 가방을 단단히 껴안은 채, 천천히 눈동자를 닫아간다.
  스르륵 어둠 속으로 의식이 끌려간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코이와 당황한 어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잠 속으로 떨어져갔다.



  ・제 9화 【초등학교 편 ⑦ 전편】



  ◆



  NGO 캠프에 참가한 당초, 상상을 넘은 힘든 현실에 직면한 나는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이건...... 하고 두 손 든 것이 있다.
  ――매일의 식사.
  원래 가리는 건 별로 없었지만, 아프리카의 음식은 얘기가 달라서, 꽤 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의 문화에서, 일본의 쌀에 해당하는 주식은 우갈리라 불리는 음식――흰 옥수수 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은 음식――이다. 하얀 분말로, 일본 요리의 비지의 외형, 먹을 때의 느낌 모두 약간 비슷하고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우갈리를 먹었을 때, 떠오른 것은 운동회의 사탕 먹기 경쟁. 사탕을 필사적으로 찾은 나머지, 입 속에 대량의 가루가 비집고 들어갔을 때의 불쾌감...... 그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뭉친 하얀 그것을 입에 넣은 순간, 입 속의 침이 전부 흡수되는, 푸석푸석한 느낌에 습격당한다. 어쨌든 토해내지 않는 게 고작이다.
  반찬은 무시무시하게 신 토마토와 씁쓸한 양배추 같은 잎으로 만든 야채 볶음. 그리고 턱이 나갈 정도로 엄청 질긴 쇠고기나 양고기. 간도 진한 부분과 싱거운 부분이 나뉘어져, 일본에서의 식사에 익숙했던 내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 자! 사양하지 말고 더 드세요.」


  의료단을 지탱해주는 현지 아줌마 스탭의 미소――나처럼 도움이 안 되는 신입 의사에게도 매우 친절하다――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내심 노고를 참으며 입에 계속 넣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 어쨌든 먹고, 육체에 영양을 보급해야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이건 식사가 아니라 영양 보충제, 맛 따위를 생각해서 어쩔 거냐! 라고 생각하면서 물로 삼키듯이 하루하루 계속 먹었지만, 속으로는 절망할 것 같았다.
  특히 힘든 수술 뒤, 식욕이 없는 위에 무리하게 우갈리를 넣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우 식사 정도로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뇌에 앞서 몸이 거부하는 느낌으로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섭다. NGO에서 보내는 시간이 2년을 지났을 무렵, 난 이렇게 서툴렀던 우갈리를 필두로 한 아프리카의 식사를, 오히려 맛있게조차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갈리가 거의 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거짓말, 희미하게 단 것과 맛있다는 느낌을 즐기고――게다가 만든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입에 넣은 순간에 오늘의 식사 당번 스탭이 누군지 알 정도. 세르게프와 식사할 때 내기해서, 그의 간식――입이 저릴 만큼 쓴 잎이지만 익숙해지면 맛있다――을 빼앗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세리실. 너도 틀림없이 우갈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잘 먹어봐.」

「Non!! 아무리 아키라 선배의 명령이라 해도, 저는 Non!!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몇 번이라도!」


  나와 세리실밖에 없는 식사용 휴게실 안에서, 쿵! 하고 테이블을 치며, 온몸으로 싫다고 표현하는 그녀.
  금발 머리카락, 오똑한 코, 의지를 품은 눈 아래에는 작은 점...... 예전에 마법사 애들이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소녀와 왠지 모르게 닮은 외모. 뭐, 내가 딱히 백인 여자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할 뿐이겠지만......
  어쨌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오기가 서린 표정. 아까 전부터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테이블에 놓인 저녁식사인 우갈리에 손을 대려하지 않는다.


「다른 건 뭐든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우갈리라는 음식만은...... 물론 스탭 분께는 죄송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이건 제 혈통 탓이에요. 그래요...... 요리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 제 몸에 흐르는 그 조국의 피가...... 아무래도 받아들여주지 않아요.」

「아니, 리더 세르게프도 프랑스인이지만, 우적우적 먹던데......」

「monsieur! 뭐라고 하셨죠?」

※ monsieur : Mr.에 해당. ~씨, ~님.

「아, 아니 딱히......」


  하아......하고,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쉰다.
  세리실은 내 외과 제1 조수로서 최근 3개월간, 같은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 살 어리지만, 월반을 계속해서 나와 거의 동시기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녀는 성적 우수라 해도 좋다. 단 NGO의 지옥과도 같은 아수라장에서의 실무경험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수술 중 사소한 부분에서 약점을 보일 때가 있었지만......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유능하고 자신감에 넘쳐, 고집이 세서 한 번 주장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굽히지 않는다.


「그래도 세리실, 오늘은 빵이 없잖아? 안 먹으면 내일이 힘들어져.」

「그......그건 그렇지만요. 그, 그래도, 아키라 선배의 조국인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는 말이 있잖아요」

「쓰는 상황이 달라......」

※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 : 궁핍한 처지에 있어도 궁핍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존심을 높게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 바꿔 말하면 허세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다.

  할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어는 조금 할 수 있다......는 세리실의 실수를 고칠 힘도 없고,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여기 요리는 반찬이 적어서,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영양도 부족하다. 역시 주식인 우갈리가 필수다. 입에 맞든 안 맞든,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결론짓고 먹을 수밖에 없다.
  다만, 아무래도 우갈리를 먹지 못하는 스탭용으로 빵――옥수수가루가 많이 들어간 무섭게도 딱딱한 것――이 평소에는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 며칠, 보급 부대가 치안 악화로 도착이 늦어져, 오늘 저녁식사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알았어, 세리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게. 안 먹으면 내일, 내 조수는 맡길 수 없어. 알겠지?」

「――!? 그, 그럴 수가......!?」

「현기증이라도 나서, 수술 중에 쓰러지면 어쩔 생각이야?」


  맹렬한 기세로 항의하려고 한 그녀의 기선을 제압하듯이 날카롭게 단언한다. 적절한 반론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우물거리며 분한 듯 고개를 숙이는 세리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어떻게든 생각해낸 타협안을 타이르듯이.


「뭐...... 식사는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어. 알았어, 내가 담당 의사에게 부탁해 둘 테니까, 내일은 리허빌리(Rehabilitation)와 진단을 도와줘. 빵이 오면 또 수술 조수로 들여줄게. 오늘은 반찬을 많이 먹고 허기를 달래, 알겠지?」


  이만큼 설득해도 안 되니까 별 수 없다. 세리실에게는 꽤 세게 말했지만, 실제 우갈리라는 음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서, 베테랑 스탭이라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부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그녀는, 내 눈으로 봐도 실무에서는 많이 노력하고 있다. 식사까지 무리시키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아키라 선배, 알겠어요. 먹을게요. 저, 먹을 거니까」

「아니, 괜찮아. 말이 지나쳤다. 나도 나빴어. 무리할 필요는......」


  푸른 눈동자로 곧게 바라보는 세리실.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귀에 걸치고, 각오한 듯 심호흡을 반복한다. 새하얀 피부와 굴욕 때문일까? 붉어진 뺨.
  그리고 내 말을 끊듯 손을 흔들고는, 어딘가 부끄러운 듯이 작게 중얼거린다.


「괜찮아요. 먹을게요, 저기...... 먹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직접, 제 손을 쓴다...... 는 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식사예절을 배워서......」

「아아, 과연. 스푼을 가져올게.」


  나나 세르게프는 현지 사람들처럼 맨손으로(당연히 손은 씻지만) 우갈리를 반죽해서 적당한 크기로 뭉쳐 먹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을 것이다.
  세리실이 말을 들어준 것이 기뻐서, 나는 스푼을 가져오기 위해 근처에 있는 부엌으로 가려고 일어선다. 그러나 그 때, 내 팔이 세리실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에 살짝 잡혔다.


「아, 저기! 할 수 있으면, 아키라 선배가 반죽해주신 걸 먹고 싶은데요! 그게, 역시 손으로 반죽하는 편이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도 맛있을 테고......」

「그럴까? 스푼으로도 그다지 차이는」

「아뇨, 훨씬 맛있을 것 같아요!」

「아아...... 그래?」


  모처럼 세리실이 타협해줬는데, 여기서 토라지게 하는 것도 좀 그렇다. 나는 테이블에 다시 앉아서, 오른손을 물 티슈로 꼼꼼히 닦는다.
  그리고, 눈앞에 담긴 접시에서 우갈리를 건져, 스시의 샤리만한 크기로 뭉치기 시작한다.


「이 정도 크기라면 포크로 찍을 수 있고, 먹기 쉽겠지?」

「네, 감사합니다. 아키라 선배」


  환하게 미소 짓는 세리실의 접시로, 재빨리 만 우갈리를 몇 개씩 늘어놓아간다. 조금 전까지의 완고함이 거짓말처럼, 어딘가 즐거운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 조금 허둥지둥할 정도로 아름다운 표정.
  그 미소, 아니...... 이곳의 분위기가, 나의 뇌리에 과거의 추억을, 한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아키라 선배, 무슨 일이에요!? 얼굴이 창백한데요?」

「괜찮아.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걱정스러운 듯이 일어난 세리실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아, 심호흡을 반복한다. 또렷이 되살아나는 즐거운 기억...... 그래, 그건 즐거운 기억일 텐데, 어딘가 서글퍼져서.


「정말 괜찮아요? 선배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전혀 슬프지 않아. ......즐거운 기억이야.」

「실례지만, 도저히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걱정스러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보는 그녀. 나는 마치 변명처럼,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머나먼 기억. 생명을 구하는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의사가 되는 것만이 의어머니에 대한 보답이 될 거라 믿어, 공부를 계속하던 그 무렵......


「그게...... 초등학생 때, 그래. 여름방학 전의 기억이야. 수업으로 어딘가의 시설을 견학하러 가게 돼서. 아무튼, 그 때의 나도 성격이 비뚤어진 꼬맹이었고...... 반이 모여서 집단 이동 중이었는데, 영단어장을 몰래 읽다가......」


  이런 일을 이제 와서――게다가 전혀 관계없는 세리실에게――얘기해서 어쩌자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입은 계속 제멋대로 움직여서 말을 뽑아낸다. 마치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세리실은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가파른 시골 산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주의산만이었어, 발밑의 갓길이 허물어졌는데 눈치 채지 못해서. 반에서 혼자 떨어져 행동하던 난, 발을 삐끗해서 실족했지...... 결국 정신 차렸더니 어머니 진료소에 있었어. 오른손 골절...... 지금의 지식으로 말하자면 우상완골외과골절이겠지만......」


  모호한 기억으로는, 전날까지 비가 세차게 내렸다. 상당히 깊은 산 속의 시설 근처에서 가파른 비탈길에서 떨어진 것 같다. 그 정도 상처로 끝난 건, 정말 행운이었으리라.


「그래서 식사도 하지 못해서 사쿠라가...... 아아, 그게...... 여동생 같은 소꿉친구가 간병해줬어. 조금 전 세리실에게 내가 한 것처럼, 눈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준 것을 떠올렸어. 그 때 녀석의 걱정하면서 우는 얼굴이나, 참을 수 없이 맛있었던 주먹밥의 맛, 억지로 간병되어 패닉에 빠진 일 등이 단번에 떠올라서...... 좀 그랬지.」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울어서 토끼처럼 새빨간 눈이 된 사쿠라를 보고, 무심코 웃은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사이가 좋았던 친구――초등학교 졸업 이래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칸나즈키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때가 가장...... 소꿉친구나 친구와 자주 얘기했을 무렵일 것이다. 여름 이후의 나는, 중학교 수험, 그리고 그 뒤의 공부만 보고 완전히 여유 같은 게 없었을 테니까.


「어머, 냉정한 아키라 선배에게도 그렇게 덜렁대는 과거가 있었군요. ......저기, 그런데 그 마드모아젤? 사쿠라라는 분은 그게, 저...... 지금은?」

「사쿠라? 아아...... 일본에 있어. 사정이 있어서, 입원이 좀 길긴 하지만」


  악의 없는 세리실의 말에, 두근하고 가슴 속이 쑤신다. 일본을 출발하기 직전에 본 녀석의 아름다운...... 생기 없는 인형처럼 매우 아름답게 잠자는 얼굴이, 또렷이 생각나 내 가슴을 세차게 뒤흔든다.
  입원했다...는 말에 뭔가를 알아차렸을까? 배려하는듯 상냥한 미소를 띠는 세리실.


「그건...... 빨리 좋아지기를 저도 빌게요. 사쿠라......라는 이름, 결코 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응? 그건 무슨?」


  재주 좋게 포크를 써서 우가리를 입에 옮기는 그녀에게 물어본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꿉친구, 사쿠라와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 여성에게 공통점이?


「제 이름, 할머니가 지어주신 거예요. 할머니의 고향 부근, 우에노 공원의 꽃 이름을 따서」

「그건......」


  NGO로 출발하기 직전, 도쿄의 병원. 소꿉친구가 입원한 방에서 보인 만개한 담홍색 꽃잎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네, 그래요. 사쿠라(桜)는 프랑스어로 세리실(cerisier)이라고 해요. 선배.」


  세리실의 산뜻한 미소. 그것은 어딘가...... 활짝 핀 벚꽃을 떠올려,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


  월, 화, 수 3일간 계속 내린 세찬 비가 거짓말처럼 활짝 갠 오늘, 수요일.
  하지만, 그렇게 화창한 5월 하늘과는 반대로, 우리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일단 포장되어 있지만) 어둑어둑한 산길을 걷고 있다.
  그래, 오늘은 교외 레크리에이션이라 하는 명목상 사회 시설 견학의 날. 아침부터 7km나 걸어 산속의 쓰레기 처리장을 찾아, 하루 견학하는 것이다.


「아하하, 아키라. 왜 그렇게 지친 얼굴이야. 자, 힘내봐. 걷는 건 즐겁잖아.」

「바보, 주변을 봐. 즐거워 보이는 건 너 정도밖에 없잖아? 나 참, 산길이라 빗물이 아직 남았다고. 땅이 엄청 질어, 진짜.」


  오렌지색 티셔츠에 데님 반바지, 마음에 드는 빨간 스니커즈. 산뜻한 물색 배낭을 메고 웃는 친구...... 칸나즈키 코이. 나는 그 친구에게 숨이 가쁜 채로 대답한다.
  요 며칠 계속 내린 비 때문인지, 산길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웅덩이까지 곳곳에 있어서 걷기가 매우 어렵다. 안 그래도 급경사에 어두운 산길...... 출발할 당시에는 활기찼던 동급생들도, 도착 직전인 지금은 지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으으, 다리아파. 발끝이 찡해.」

「후후, 힘내 아키라. 앞으로 조금이잖아. 잡아당겨줄까? 아하하」

「잘도 말한다.」


  내가 입은 흰색 티셔츠 소매를 놀리듯이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는 코이. 정말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여유작작한 표정.
  주위를 보면 아직 여력이 있는 느낌인 학생은 평소에 운동하는 코이 같은 사람들 뿐.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도 7km나 계속 걷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역시, 육상으로 바보처럼 달리는 게 일과인 친구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반이라 옆에서 걷는 코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빈도로 말을 건다...... 싱글벙글 미소 짓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한 명 더. 여유가 듬뿍이란 느낌으로 걷는 학생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릴 적부터 무도로 단련된 공주님......


「히이라기 군? 칸나즈키 군과 쓸데없는 말을 계속 할 틈이 있으면, 좀 더 빠릿하게 굴어주지 않겠어? 내 눈앞에서 러브...... 질질 걷는 것! 같은 반으로서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신에자키의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 차가운......목소리가 등 뒤에서 퍼진다. 평소의 블레이저 코트가 아니고, 데님 미니스커트에 프릴이 달린 흰 셔츠, 검은 스니커즈, 흑발에 빨간 카츄샤를 단 스타일. 등에 맨 큰 배낭에는,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공주가 아니라 여왕님이구만.」

「히이라기 군!? 뭐라고 했니?」


  설마, 내가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나? 지그시...란 느낌으로, 코이를 밀치고 옆에 선 신에자키.
  가느다란 눈썹, 야무지고 요염한 입술, 매끈매끈한 뺨, 무서울 정도로 예쁜 얼굴...... 날카로운 눈빛으로 똑바로 흘겨본다. 도저히 초등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박력.
  모델처럼 반듯한 스타일 때문인지, 프릴이 장식된 셔츠 가슴 부분이 거북할 정도로 부풀어 보였다.


「아, 아니, 아무것도......」

「자, 잠깐. 신에자키. 아키라 옆은 나니까! 원래대로 돌아와, 줄이 흐트러지잖아.」


 뿌우....한 모습으로 볼을 부풀리며, 갈색 얼굴을 조금 붉게 물들인 코이가 큰 소리를 낸다. 신에자키에게 지지 않고, 거침없이 그녀를 밀치고 내 옆에 서는 친구.


「앗...... 어머, 칸나즈키 군. 그렇게 대열이 신경 쓰이면, 반장답게 앞에 서는 게 어때? 나는 이 단정치 못한 히이라기 군을 지도할 테니까.」

「......뭣」


  핑크색 입술은 활짝 미소 짓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신에자키. 코이에게 밀쳐진 곳――즉 내 옆――에 가늘고 긴 발을 뻗어, 슥....하고 비집고 들어온다. 그 동작은 무도를 오랫동안 단련했다는 소문대로, 헛된 동작이 전혀 없이 자연스러웠다.
  코이보다 큰 키, 날씬하고 긴 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찰랑찰랑한 흑발을 귀로 쓸어 올리며, 이런이런......하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아, 아키라! 가만있지 말고 아키라도 말해봐. 응? 응? 내 옆에 있는 쪽이 기운이 나서 빠릿하지? 그치?! 그런걸!」

「어머, 히이라기 군 같은 유형은 따끔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어요. 저라도 실은 옆에는 서고 싶지 않아요. 단지, 터무니없이 칠칠치 못해서 같은 반으로서 할 수 없이. 그렇지? 히이라기 군? 너도 그렇게 자각하고 있지?」


  내 오른쪽에는 신에자키. 그리고 왼쪽에는 친구인 코이가 서서, 거의 동시에 말을 건다.


「아......저기, 아니, 그게......」

「보렴, 그 야무지지 못한 대답. 정말 이러니까.」

「으으으, 아키라! 아키라가 공주한테 확 말해보라구.」


  ――내가 뭔가 나쁜 짓이라도 했던 걸까? 안 그래도 장거리를 걸어서 다리가 아프고, 몸은 피로에 쩔고. 그런데도 이 상황...... 뭔가 탈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적 피로로, 어깨에 맨 가방――안에 든 것은, 사쿠라가 만들어 준 도시락, 물통, 과자, 그리고 후교시에서 구입한 자칭 서바이벌 상품이 들어있다――이 꽉하고 어깨에 먹혀든 생각마저 든다.


「큭, 이쪽은 너덜너덜 다리가 아파서 못 참겠는데...... 어째서 둘 다 그렇게 건강한 거야.」


  어느 쪽이 잘했나 못했나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말을 거는 코이나 자세를 주의하는 신에자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건강한 둘을 동시에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말을 거는 두 명에게서 도망치듯 조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나는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그저 기계적으로 걸으려다가......


「――으앗!?」


  아주 조금――불과 5cm정도――지만 무너져 함몰한 부분에 우연히, 왼발을 헛디딘 나. 균형이 무너진 순간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게 오른쪽 다리 위치를 밟아서 맞추려고....했지만, 거기에 물에 젖은 나뭇가지가 있어서,

  ――빠직, 하는 불길한 소리와 동시에 발밑의 나뭇가지가 꺾여, 내 몸은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길 아래의 급경사면이 똑똑히 보인다. 초록색 풀이 무성한 산의 표면, 끝없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각도. 휘청휘청하고 내 양손이 잡을 것을 찾아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헤매고......


「아키라!」

「히이라기 군!」


  내 몸, 그리고 양팔이 굳건하게 꽉 잡혀 있었다. 중심을 낮춘 태클 같은 자세로, 안전한 방향으로 밀어 넘어뜨리듯이 부딪혀온 사람은 코이. 평소의 귀여운 얼굴이 아니라, 타오르듯 예리한 눈동자.
  양팔을 꽉 잡아준 사람은 신에자키. 미니스커트 안에서 맨다리를 뻗어 슥.....하고 땅을 힘껏 밟는다. 찰랑찰랑한 긴 흑발을 나부끼며, 합기도처럼 묘한 중심 이동으로 내 몸을 안전한 방향으로 비껴주었다.


「괜찮아?! 아키라!」

「히이라기 군!, 상처는 없어?!」


  털썩하고 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 허리에 매달린 친구, 팔을 잡은 신에자키가 동시에 말을 건다.
  두 명의 진지한 목소리, 강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공포로 혼란에 빠질 것 같았던 마음을 달래간다.


「아......으, 응. 고, 고마워. 코이, 신에자키, 살아났어......」


  그렇게 흔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순간, 눈에 비친 경사면이 되살아난다. 저런 경사에서, 균형을 잃은 내가 그대로 굴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이 좋아도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아니,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우으으으으읏, 바보 아키라!! 진짜, 진짜, 진짜아아, 저어얼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

「――읏, 히이라기 군? 내 반에서 부상자 같은 게 나오면 엄청난 웃음거리야. 정말로 당신이란 사람은! 비틀거리지 않게 확실히 감시할 테니까!」


  코이의 반 울 것 같은 얼굴, 신에자키의――화내고 있겠지――붉게 물든 뺨. 전부 거절할 수도 없고, 고분고분하게 끄덕인다.


「자, 잘 부탁합니다......」


  일어나서 어깨에 짐을 다시 메고, 나는 다시 걸어나갔다. 양 옆을 코이와 신에자키에게 끼여 마치 연행되는 범인처럼.


 ◆◆◆


  겨우 시설에 도착, 긴 휴식을 취한 뒤 간단하게 첫 견학을 했다. 그걸로 오전은 끝. 기다리고 기다린 점심식사 시간.
  그토록 기진맥진했던 게 거짓말처럼, 모두 들떠서 친구와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아키라, 그 튀김, 엄청 맛있을 것 같아. 으으......좋겠다.」

「나 참, 먹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자, 좋을 대로 가져가. 그 연어랑 바꿔서.」

「우응. 에헤헤, 언제나 고마워 아키라. 자 여기.」


  쓰레기 처리 시설(리사이클 센터)이라는 명칭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밝은 시설의 부지 안. 친구와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서 마주보고 앉아, 우물우물 입과 젓가락을 움직인다.
  코이의 도시락은 만들어주는 할머니의 취향이 가미되어, 야채 조림이나 생선구이를 중심으로 한 메뉴. 쌀도 현미를 넣어 실로 건강에 좋아.....보이지만, 고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게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우리들, 초등학생에게는 좀 그럴 것 같다.
  그것과는 반대로, 사쿠라가 만들어준 도시락은, 새우 필라프에 튀김, 계란말이, 양배추와 완두콩을 볶은 것, 햄과 양파로 만든 일본식 샐러드로 양이 상당했다.


「오옷, 이 계란말이. 안에 치즈랑 참치가 들어있어. 사쿠라 녀석, 아무리 그래도 칼로리 너무 많잖아. ......아무튼, 맛있긴 하지만.」

「헤에, 도시락 사쿠라가 만들어줬어? 흐응, 당연히 호화롭겠네.」


  밝은 5월의 햇볕을 쬐며 먹는 도시락은 매우 맛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도, 햇볕에 탄 갈색 얼굴로 활짝 미소 지으며, 우물우물하고 볼이 미어지게 밥을 먹고 있다.


「아니, 녀석의 취미일 뿐이야. 돌아가면 빠짐없이 감상을 말해야 한다니까? 못견뎌난다고.」

「아하하, 사쿠라는 귀여운 데가 있구나.」

「어디가 귀엽다는 거야.」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얘기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데, 밖에서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 정말 즐겁다. 햇볕은 따스하고, 풍경은 산속이라는 이유도 있어 신록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귀가하는 것도 7km 걸어간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고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동급생들도, 사이가 좋은 친구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는 모습.
  그런데 거기에......


「앗, 칸나즈키 군, 히이라기 군도. 찾고 있었어. 있잖아, 공주...... 신에자키 못봤어?」

「아, 사이도 시바. 공주? 난 못봤는데...... 아키라는 봤어?」

「아니. 평소에 같이 있던 사람들하고 있는 거 아냐?」


  흑발을 땋아 내린 머리에 안경을 쓴, 그야말로 성실할 것 같은 학생――옆 반의 반장, 사이도 시바가 말을 걸었다.
  약간 부드러운 체형에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그게 아니더라구, 어디에도 없어. 설마 돌아간 게 아닐까? 이래서 고집불통 아가씨는 곤란해.」


  아버지가 소방대원, 몇 년 전에 이 마을에 부임했을 때, 가족과 함께 이사 온 사이도 시바는 이른바 『타지 사람』이다. 하지만 매우 성실하고 착실, 그리고 표리 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하지만, 그래서 신에자키를 정점으로 한 그룹과는 좀 사이가 나쁘......다고 할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상태. 사이도 시바는 신에자키가도, 신에자키가를 추종하는 주변 친척들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


「아 됐어...... 칸나즈키 군이랑 히이라기 군. 공주와 같은 반이지? 혹시 보이면 선생님이 부른다고 전해줄래?」

「응, 알았어.」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사이도 시바. 그 야무진 뒷모습을 배웅한 뒤, 나는 코이와 다시 얼굴을 마주본다.


「흐음, 선생님이 부른다라...... 아, 맞아! 선생님 말로는, 여기에도 수상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 같다고, 아까 얘기했어. 전에는 학교였고, 으으.... 좀 무섭네.」

「수상한 사람이라니...... 그거, 전교조회에서 주의 받은 사람이지?」

「응, 맞아. 아하하, 아키라치고는 드물게 기억하고 있었네. 좀 의외.」

「시꺼」


  코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학교 도서관 창문으로 본 신에자키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찾는 듯 여유가 없는, 마치 미아 같았던 공주의 분위기.


「아무튼 무서운 얘기는 놔두고, 공주. 어디 갔을까. 아까 전에는 즐겁게 보였는데...... 스트레스려나? 엄마가 재혼한다 해서 지금 집이 큰일인 것 같던걸. 공주의 생일파티 준비도, 여러 가지로 문제뿐이라는 소문이고」

「헤에...... 생일파티」


  코이의 얘기에 거의 건성으로 대답.
  머리에 신에자키의 여러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학교 체육관 근처에서 만났을 때, 도서관에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화났던 표정. 그리고......아버지에 대해서 말해줬을 때의 자랑스러운 듯한, 정말로 기쁜 듯한 미소.


「......」

「아키라, 듣고 있어?」


  머리 깊숙한 곳에서, 뭔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맥박 쳐, 온몸에 불타는 듯한 혈액이 흘러든다. 신경이 한계까지 팽팽해진 활처럼 긴장되어 간다. 그것은 마치 전쟁하러 가기 직전의 전사.


  ――움직여라, 손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자, 잠깐 아키라? 괜찮아?!」


  눈앞에 있는 생명을 구하고 싶다, 불합리한 슬픔을 아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바라기 때문이야말로. 『나(オレ)』는...... 그리고 『나(ボク)』는.


「코이, 잠깐 미안.」

「아키라!? 잠ㄲ, 도시락 둔 채로 어딜 가는 거야!?」


  전에 산 서바이벌 상품을 담은 가방만을 들어, 코이의 놀란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달린다. 다리가 가는 방향, 그것은 몸이 알아서 정해주었다.
  뇌리에 풍경이 떠오른다. 그것은 경험한 적이 없는 기억. 마치 내가 체험한 것처럼, 또렷하고 세부까지 현실적이다.

  ――오른 팔이 골절된 데다가 온몸에 강한 타박상을 입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 누워있다. 바로 옆에는 사쿠라, 그리고 친구인 코이가 있고, 이것저것 말을 걸고 있었다.


『정말, 바보 아키라. 신에자키가 예전에 아빠랑 자주 캠프하러 온 산이 아니었으면, 구조하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라. 진짜...... 공주한테 고맙다고 해. 정말이지, 이럴 거면 억지로라도 같은 반에 넣었어야 했어!』

『맞아요, 오빤 바보. 등산하면서 단어장을 읽다니......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와.』


  하얀 병실 안, 침대에서 도망쳐서 숨을 수 없는 나를, 이때라는 듯이 꾸짖는 두 명. 화난 듯, 안심한 듯 복잡한 표정.


『10미터 이상 실족했었으니까. 나,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가서. 그 때 공주가, 그 위치――아키라가 떨어진 곳――라면, 처리장 옆의 좁은 곁길을 더듬으면 갈 수 있다고 선생님한테 말해서......』


  ――이건 결코 『나(ボク)』의 기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オレ)』의 추억일 것이다. 어째서 지금, 이런 게 멋대로 떠오르는 거지? 그건 어떻든 상관없다.
  단지 그 기억에 이끌리듯이 나는 달려서, 리사이클 센터 옆, 좁은 곁길로 들어가, 앞을 향해 나아간다.


「신에자키!!」


  거기서 나는 그녀를 발견한다.
  이마에서 흐르는 새빨간 피.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지면에 누워있는 모습을.



  ・제 8화【초등학교편 ⑥ 후편】


  ◆


  ――코이와 처음으로 만났던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른해질 것 같은 더위 속에서, 코이는 다른 현에서 내가 사는 마을의 학교, 같은 반으로 전학 오고, 그리고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딱히 친해진 건 아니고, 그저 아는 사이... 라는 상황이 5학년까지 계속되었다.
  5학년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된 4월, 사소한 일로 어머니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무언가에서 도망치듯이――혹은 의어머니와의 유대를 갈망하듯이――공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뒷모습을 동경해서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순수한 동기만이 아니고, 분노나 공포를 털어놓는 대상으로 공부를, 나아가서는 의사를 목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질척한 앙심과 분노, 그리고...... 혹시 의사가 못되면 의어머니에게 버려지지 않을까? 이런 아무 근거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이 등에 철썩 달라붙어, 어떻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코이가 말을 걸어준 때는, 마침 그랬을 무렵. 날마다,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던 내게, 잘도 얘기할 마음이 들었다고......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저기......히이라기, 기억나? 나, 칸나즈키 코이라고 해. 친구가 되지 않을래?」


  어느 금요일의 방과 후, 주황빛 석양이 내리쬐는 교실에서, 계속 공부하던 내게 똑똑히 다가온 말. 아무도 없는 교실, 붉게 물든 반 친구들의 책상과 의자. 운동장에서 달리기라도 했던 걸까, 땀으로 갈색 피부에 체육복이 붙은 채 활짝 미소 짓는 동급생의 모습.


「왜?」

「왜라니, 그......기억 안 나? 2학년 때, 네가 날 도와줬던 일. 굉장히......기뻤어. 그래서, 뭔가 할 수 없을까 해서」

「그런 거 기억 안 나고, 알 게 뭐야. 쓸데없는 참견.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마.」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굉장히 차가운 태도를 취했다. 그런 지독한 얘기가, 5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코이와 주고받은 말.


「그래. 그래도...... 또 얘기해도 돼?」

「몰라, 마음대로 해. 어차피 상대하지 않을 거니까」


  그때는 내 실력을 알기 위해, 9월에 실시되는 전국 초등학생 통일 모의시험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다른 일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갑자기 말을 건 칸나즈키 코이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전학생에 2학년 때는 반 친구, 3, 4학년은 다른 반이었던 것 정도밖에 모르고 흥미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건방진 애송이였을 거다. 평소 얘기하는 사람은 사쿠라와 어머니뿐, 학급회의 같은 데서도 전혀 발언하지 않고 참고서를 계속 푸는 나날들. 다른 급우들의 반감을 사는 것도 당연했지만, 그것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학교 선생님은 어머니가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인 것, 신에자키가와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신에자키가 이외에 의사가 있다는 것이, 일부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였던 것 같다――을 두려워해 나를 종기처럼 취급해서, 그렇게 불손한 태도도 주의 받지 않았다.


「히이라기. 나, 반장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거 도와줘. 학급회의에서 정해진 거 들었지?」

「뭐어? 뭐야 그게!」

「포기해. 따지고 보면, 네가 전혀 참가 안 했던 탓이고. 후훗, 뭐 나도 도와줄 테니까. 자, 빗자루 들어. 아하하, 둘이서 하면 즐겁고, 빨리 끝난다구, 그치?」


  그렇게 오만한 나를 이것저것 보살펴주고, 가끔 불평하며 마음 써주는 코이. 이따금 반장 권한이라며 억지로 청소나 잡일을 하게 했다. 엄청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명령으로 반 억지로라도 하지 않았다면, 반 애들의 불만이 한 번에 폭발해서, 나는 싸움이나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초등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거기서 미래를 위한 교우관계를 배운다. 그것은 공부 성적과는 관계가 없지만, 어떤 의미로는 공부보다 훨씬 중요한 일. 그런 사회성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코이 덕분에――다소 억지로――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당초, 성가시다면서 코이를 계속 거부했지만, 반장 권한으로 명령되어 일하던 중 조금씩 말을 하게 되어, 그것이 참고서 대신으로 발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헤에, 반장도 현 외 중학교에 진학하는구나. 역시 도쿄 공립 아니면 사립?」

「아, 아마 도쿄였나? 어쨌든 사립이야, 응. 아ㅃ......아니 친척. 그, 옛날에 만난 적 있는 친척이 거기 오지 않을까? 해서. 그래도 고민 중이야.」

  우리들이 사는 시골은 관동 서북부에 있어서, 극히 일부 학생은 도쿄에 있는 중학교에 수험 진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사가 목표인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었을 때에, 코이도 마찬가지로 수험 진학이 목표라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를 서로 얘기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터놓아갔다.
  그렇게 하면서 등 뒤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공포, 불안, 분노 같은 부글부글함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
  그리고 9월, 여름방학이 끝났을 무렵에는 코이는 내 얼마 안 되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5학년 2학기에 접어들어, 점심시간에 사쿠라와 같이――코이와 사쿠라 사이는 꽤 삐걱거렸지만――셋이서 도서실에서 보내는 일도 늘어났을 무렵, 초등학교 전국 모의시험 결과가 발표되고......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



 ◆◆


  후교의 중심 시가지에는, 보행자 전용의 넓고 청결한 도로가 있고――구석에서는 화단이 끝없이 나란히 놓여 있어 각양각색의 꽃이 핀다――거기는 빨간 벽돌 같은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도로는 행사가 주로 열리는 곳이라...... 현재, 많은 커플이 북적이는 상황이다.
  연령은 정말로 다양한데, 가장 많은 층은 고등학생부터 25세 정도까지의 커플이지만, 사이좋은 할아버지 할머니 짝도 있는 한편, 작은 아이를 동반한 부부도 있다. 그리고 수는 적지만, 우리들만 한 나이로 보이는 초등학생 커플도 있었다.
  대충 보기에 총 참가자수, 100조 정도라는 느낌이려나?


「우웃, 아키라. 긴장돼, 내(ボク)......가 아니라, ㄴ, 나(私)」

※ ボク : 남자가 주로 쓰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
   私 : 남녀 모두 쓰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


「코이, 이제 포기하고 평소대로 얘기하는 게 어때? 나(ボク)라고 말해도 들키지 않을 거야. 어딜 봐도 귀여운 여자애로밖에 안 보이는데」


  지나친 인파에 서로 떨어지지 않게 확실히 손잡은 채로, 주변에 들리지 않게 코이의 귀 가까이서 속삭인다.
  산 지 얼마 안 된 물색 헤어밴드를 쓴 친구. 같이 구입한 붉은 프레임의 안경은, 물색 파커의 가슴 부분에 액세서리 대신 달려있다. 핑크빛 입술은 글로즈를 발랐기 때문인지, 반들반들 볼록한 느낌으로 윤기를 띄고, 원래 긴 속눈썹도 뷰러로 곱게 다듬어져 있었다. 크게 뜬 두 눈동자가 더욱 강조되어, 완벽한 여자애, 단발 보이쉬계 미소녀의 모습이다.


「――우우웃, 그, 그래? 그, 그럼 평소대로 얘기할까? 헤, 헤에......아, 아키라 눈으로 봐도, 나(ボク), 귀, 귀엽게 보여? 헤에, 그렇구나. 흐-응......」

「그거야 그치, 빌어먹게 건방진 사쿠라보다 훨씬 귀여워 보여...... 그나저나 봐, 예선 결과 발표야.」
 

  아무리 상급 때문이라고 해도 여장한 것이 부끄럽겠지...... 뺨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친구.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완전 미경험이지만――조금이나마 커플답게 보이려고 에스코트하듯이 코이의 손을 잡아, 둘이서 예선 결과가 붙은 게시판으로 간다.
  예선 결과......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후교 상점가 커플 콘테스트에 예선이 있다는 것이다. 친구가 손에 넣은 팸플릿에 의하면 이번에 제 3회를 맞이하는 이 콘테스트는 해마다 참가자가 늘어나서, 이번부터 접수와 동시에 필기시험이 시행되었다.
  시험 내용이 뭐냐면, 후교시에 관한 문제와 퍼즐 같은 것으로, 일정 성적을 받은 커플만이 본선에 나갈 수 있는 시스템.


「앗, 있다! 해냈어, 있다구 아키라!」

「응, 역시 럭키였네」


  코이가 가리키는 곳, 게시판에 붙은 종이에는 우리들의 등록 번호가 확실히 쓰여 있었다.
  그런데 행운이었던 건, 몇 개월 전 사회 수업으로 후교시에 관한 수업이 있었던 거겠지. 그것 덕분에, 상당히 난관이라고 생각된 예선 시험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퍼즐에 관해서도 감이 예리한 코이와 둘이 의논하면서 풀었기 때문에 불안은 별로 없고, 의외로 합격할 수 있을지도? 이렇게 내심 생각했다.


『그럼, 예선을 통과한 커플 20조는 이쪽으로 와주세요. 반복합니다. 예선을......』

「좋아, 가자구.」

「으응, 지금부터가 실전이야.」


  긴장한 코이가 속삭이는 소리와 동시에, 이어진 왼손을 꼬옥......하고 쥐었다. 친구의 수줍은 듯한 붉은 뺨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젖은 눈동자, 그리고 글로즈로 빛나는 입술. 기쁜 듯이 수줍어하는 미소.


「아, 아아...... 그러네.」


  순간, 진짜 여자애――게다가 엄청나게 사랑스럽다――로 보여, 허둥지둥하며 대답했다. 나는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하고 자신에게 살짝 혐오감 같은 감정마저 생긴다.


「있잖아, 아키라...... 나, 이거 잊지 못할 거야.」


  그 때, 마치 혼잣말처럼 작은 코이의 군소리. 시선을 향하자, 기쁜 듯이 얼굴을 붉히고 미소 짓는 코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아무튼 괜찮으려나......라고 나도 기쁘게 생각했다.


 ◆◆◆


  술렁이는 소음을 들으며, 나는 꿀꺽하고 크게 침을 삼킨다. 특설된 단상에서 아래를 바라보자, 우리들 본선 진출 커플을 보는 많은 시선이 꽂힌다. 그렇게 사양 없는 시선에 노출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긴장한다.
  그런 내 심경을 눈치 챈 듯, 꼬옥......하고 팔을 잡아온 코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있잖아, 아키라, 괜찮아? 나, 기권해도 좋은데」

「아, 아니...... 약간 깜짝 놀랐을 뿐. 괜찮아. 힘내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선을 받고, 내 기분은 분발한다. 마치 장기를 스케치할 때처럼, 다른 일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단상을 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시선, 사양 없는 말을 전부 의식에서 지워간다. ――집중, 이 단상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생각한다.


『그럼 시작합니다. 제 3회 후교시 베스트 커플 콘테스트! 주제는 이거다!』


  사회자의 소리와 동시에, 우리들 20조의 본선 진출자 앞에 대그락대그락하고 긴 받침대가 옮겨진다. 하얀 옷감이 위를 덮어 가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단번에 벗겨진다.


「응? 이건 과자잖아.」

「그러네, 엄청 보통 초콜릿 스틱인데?」


  우리들 앞에 놓인 것은, 접시에 가로놓인 초콜릿 과자 5개 정도. 가느다랗고 사각사각한 막대기 모양의 프레첼에 초콜릿이 코팅된 것.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과자로, 붉은 포장은 누구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룰은 간단, 처음에 입에 물 때 빼고는 손을 일체 쓰지 말고 과자를 전부 먹은 팀이 승리입니다. 단, 도중에 과자가 부러지거나 해서 떨어지면 실격. 그렇게 둘이서 사이좋게 먹는 것입니다. 즉 같은 한 과자의 양단을 서로가 입에 문 채로 시작해주세요. 아시겠죠? 그럼 준비를!』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홀쭉한 막대기 과자의 형태를 보고는 납득했다. 즉 이건......


「그런 거겠지. 코이, 그럼 그쪽 구석을 입에 물어봐. 자, 응ー」

「앗, 그, 그런, 이건...... 아, 아키라...... ㄴ, 나, 마음의 준비가, 우와앗, 에, 그래도...... 키, 키, 키, 키스하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착란한 듯이 머리를 붕붕 흔드는 코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내 얼굴을 더 할 나위 없을 정도로 빨간 얼굴로 바라본다. 순간, 내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눌러 참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작게 단언한다.


「코이, 진정해. 하지만 우리들 남자끼리지? 혹시 입술이 닿는다 해도 인공호흡과 마찬가지잖아. 남자끼리 하는 키스는 안 세어도 되잖아. 자, 그것보다 부러뜨리지 않게 조심해.」

「그, 그, 그, 그런 말도 안 돼. 그래도......나, 나...... 우우웃, 정말, 몰라! 바보 아키라, 후회하지 마!!」


  눈동자를 닫고 에잇하는 느낌으로 입술로 한 쪽 구석을 무는 코이. 알고는 있었지만, 서로의 입술 사이가 20cm도 안 되는 매우 근접한 거리다. 반장의 빨갛고 매끈매끈한 피부, 글로즈가 칠해진 요염한 입술까지 또렷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감도는 레몬 같은 좋은 향기.
  이런, 집중이다. 그래...... 수술에 도전하는 것 같은 집중을!


『그럼 스타트!』


  사회자의 신호로 나는 단번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척척 앞니를 써서 단번에 과자를 먹어가......지만, 눈앞의 코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이 빨갛고, 눈동자를 꼭 닫은 채, 잘 보면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소리를 내서 뭐라 하고 싶지만, 자칫 입을 잘못 움직이면 과자가 떨어진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코이가 이대로 불안정하면 언제 과자가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별 수 없다. 나는 양손을 펴서, 친구의 어깨를 단단히 껴안아 고정하고, 그대로 얼굴을 접근해 과자를 먹어간다.


『오오, 자료에 의하면 지금 대회 이색의 초등학생 커플, 히이라기 아키라 군과 칸나즈키 아이 양, 매우 사이가 좋아서 대회장 분위기도 고조된다!』

「꺄아아아앗」 「우오오오옷!」 「아, 아키라 오빠앗, 칸나즈키 선배에!!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오옷!!」


  다른 환성 따위 신경 쓸 수는 없다. 코이가 빨리 진정되도록, 꼭 껴안은 채 척척 첫 번째를 입술 빠듯이까지 먹는다. 그 틈새, 불과 1cm도 안 될 정도이려나? 진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것 같다.
  입술이 닿지 않게 조심해 혀를 써서, 코이의 입 속으로 과자를 밀어 넣고, 힘을 줘서 가녀린 몸을 꼭 껴안으며, 빨갛게 물든 귓전에 속삭였다.


「코이, 내가 할 테니까, 그대로 가만히 있어, 괜찮아? 기분은 나쁘지 않아?」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 아키라...... 미안. 나, 나, 뜨거워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끄덕......하고 떨면서도 수긍하는 친구.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새 과자를 입술에 물게 한다.


「코이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갈게. 가만히 있어」

「응.....으응.....」


  과자를 입에 물고 뺨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친구. 마치......영화의 키스 씬 같다고 순간 생각해서, 두근하고 심장이 뛴다. ――안 돼, 집중, 집중하자.
  다시 코이의 어깨를 꼭 껴안고,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계속 먹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하나, 또 하나 과자가 사라져간다. 더더욱 높아지는 주위의 환성...... 하지만 전부 무시한다.
  지금 이 순간, 과자를 먹을 때까지는...... 이 세상에 코이와 나밖에 없다. 오늘 본 영화, 아름답지만 조금 슬픈 라스트 씬처럼.



 ◆◆◆◆


  쿵, 쿵하고 리듬처럼 반복되는 선로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말 없는 채 돌아가는 전철 좌석에 앉아 있다. 어느 쪽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눈이 마주치면 코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헤어밴드는 이미 빼고 글로즈도 지워, 평소의 친구와 변함없을 테지만, 나도 어딘가 코이를 의식해서 부끄럽다. 진짜로 정상이 아니다......하고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아, 아키라, 저, 저기...... 미안해. 내, 내가 적극적으로 했으면, 우승은 무리라도, 3등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신경 쓰지 마, 도서 카드 받았고. 거기에 자칫 입상했다면, 사진 같은 게 엄청 찍혔을 거잖아. 분명 큰 문제였을 거야.」


  코이가 간신히 말을 한다. 나는 내 부글부글한 이상한 기분을 바꾸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밝게 대답한다.


「그, 그래? 그래도 확실히 그럴지도. 우승한 커플은, 엄청나게 둘러싸였던걸.」

「응. 게다가 서투르게 눈에 띄면, 지인이 알아챌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 대회장에는 상당히 많은 관객이 있었다. 혹시, 그 중에는 우리들이 아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이는 가명――아이(愛)라는 이름――으로 등록했지만, 혹시 들켰을 가능성도 있다. 뭐, 그 인파에 그렇게 들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모처럼 아키라가 헤어밴드 사줬는데.......」

「나 참, 괜찮다고. 친구잖아.」


  거기서, 나는 팟하고 떠올린다. 멋진 헤어밴드나 화장품을 산 잡화점, 거기서 코이는 확실히......


「그것보다 코이, 너 말야. 관서 중학교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어?」

「......응」

「어째서야? 도쿄에 있는 같은 중학교에 가자고 했잖아!」


  왠지 모르게 고개를 숙인 친구. 그 가느다란 팔을 잡은 채, 나는 점점 더 열을 올려 말한다.


「미안해 아키라, 말을 꺼내기 어려워서, 아빠가 교토에서 살고 있어서, 전부터 오라고 했었어. 거기에, 이대로 여기에 있어도...... 괴로우니까」

「괴로워? 괴롭다는 게 뭔데? 고민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 항상 날 도와주고는, 그런데도 중요한 때는 입 다물기야?!」

「잠깐, 아키라, ......팔, 아파. 그리고......미안. 무슨 일이 있어도 말 못해. 그래도 오늘 일로, 조금 구원받았어.」


  마치 울 것 같은 소리..... 나는 무심코 손을 떼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키라. 나, 이 헤어밴드,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


  전철 창으로 내리쬐는 석양. 거기에 비춰지듯이, 활짝 미소 지으며 말하는 코이. 그것은 매우 사랑스러운 미소인데...... 어딘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심코 꼭 껴안아 위로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억지로 누른다.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냉정을 되찾는다. 코이는 친구인데.


「코이, 5학년 때 말이야. 네가 억지로 말을 걸어줘서...... 정말로 다행이었고, 감사해. 몇 번이나 감사해도 부족해. 사실이야.」

「아니. 요즘 들어, 아키라가 엄청 안정된 느낌이 들어. 분명, 내가 없어도 이제 괜찮아. 응......괜찮아...... 미안......아키라, 조금만......여기, 보지 말아줘......부탁해」


  ――그대로 다시 우리들은 침묵에 싸여, 전철로 집에 간다. 뒤에서 들리는 코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져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이 흐른 뒤, 전철은 역에서 멈춘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이네...... 그 때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니까! 어리광 들어줘서, 저, 정말 고마워!」

「응. 또 보자, 친구.」


  자전거에 뛰어 올라타고,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친구의 등. 그것을 배웅하며, 나는 오늘 산 가방을 어깨에 다시 맨다. 약간 묵직한 무게...... 하지만, 그 무게가 내 정신을 확실히 되찾게 한다.


「앗, 아차......」


  그 때, 또 신에자키의 여드름에 대해 묻는 것을 깜박했던 것을 떠올렸다. 할 수 없다, 오늘 밤은 사쿠라가 집에 있을 테니......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하지만, 녀석한테 물어볼까.
  하고, 생각을 정리한 뒤 집을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오빠, 어서 오세요. 엄마가 차로 여기까지 보내줬어요. 같이 돌아가자」

「오, 사쿠라? 헤에, 그거 잘 됐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역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불쑥하고 소꿉친구가 모습을 보였다. 청초한 느낌인 황색 원피스에, 심플한 스니커즈, 싱글벙글 기뻐 보이는 느낌으로 미소 짓는 사쿠라.


「헤에, 그래요? 후후후, 나도 오빠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답니다.」

「왜, 왠지 말하는 게 이상한데? 또 바보 됐어?」

「..........읏, 그럴 리 없잖아요! 자, 빨리 집에 돌아갑시다.」


  꽈악하는 느낌으로 팔을 잡히는 나. 그대로 질질 끌려갈 기세로 간다.
  ――뭐, 뭔가 위험해. 엄청 위험한 기색밖에 안 느껴져.


「사, 사쿠라? 무슨 일이야?」

「아뇨, 아무것도. 아, 맞다. 오빠? 내일 일요일, 『히이라기 아키라 1일 자유권』 쓸 거니까, 각오해 두기예요.」

「에, 에엑!?」


  변함없이 싱글벙글 미소 짓는 사쿠라. 하지만 오랜 세월의 감이 속삭였다. 얘 엄청나게 화났다....고. 그리고, 팟하고 짐작이 간다. 혹시...... 이 녀석?


「사, 사쿠라? 너, 오늘 낮에 어디 있었어?」

「후후, 글쎄? 그건 오늘 밤 차분히 얘기하도록 하죠.」

「오, 오해야, 사쿠라. 오해......」

「어디가 오해인지, 부디, 꼬치꼬치 캐내고 싶네요, 그치? 오빠?」


  새빨간 석양이 찌르는 도로. 집으로 향하는 그 길을, 소꿉친구에게 꽉 붙잡힌 채, 나는 반 처형대로 가는 죄수 같은 기분으로 계속 걸어갔다.

팬픽 2개에 대한 공지

2016. 1. 14. 01:37 | Posted by 2ndboost

 

원래 이 블로그는 단순히 백업용이었습니다만, 아래 작품을 기대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 알림글을 올립니다. 

 

 

소꿉친구 시리즈를 다 마치고 아래의 팬픽을 마저 작업하려고 했습니다만

 

지금 할 여력이 안되기도 하고, 실은 다른 사이트에서 다른 분이 다 번역한 상태입니다.

 

 

 

하치만「미우라 유미코와 친해졌다?」

 

http://2ndboost.tistory.com/320

 

 

요즘 친구인 잇시키 이로하가 약삭빠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http://2ndboost.tistory.com/285

 

 

 

타입문넷   http://typemoon.net

 

여기에 있고 회원가입만 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 완결팬픽 항목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아무튼 있을 겁니다.




  http://novel.syosetu.org/38226/





  소녀 때 Ⅸ ~약간의 거짓말~ + 에필로그




  하치만 오빠와 교제한 뒤 처음 맞은 주말은,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하루는 하치만 오빠와 둘이서 유키노 씨와 유이 씨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들이 교제하게 된 것을 듣자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하고, 웃으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도중부터는 여자 세 명의 걸즈 토크가 되어, 하치만 오빠의 고백에 대해 유이 씨에게 재촉 받은 대로 이야기하게 돼서, 하치만 오빠가 토라진 듯이 얼굴을 돌렸던 것이 인상적입니다.

  왠지 모르게, 전에 만났을 때보다 봉사부 세 명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아서 물어보자, 「우리들 친구가 됐어.」라고 유이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전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틀림없이 처음부터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관계를 말로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깊어졌던 것이 정말로 기뻐서, 저도 유이 씨를 따라 살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날씨가 쾌청했던 이유도 있어서, 코마치와 둘이 데이트에 가서 새로 나온 여름옷을 구경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 도중에 처음으로 하치만 오빠와 연인이 된 것과 그리고 앞으로도 친구로서 잘 부탁한다고 전했습니다.

  말하는 도중에 부끄러워져서, 조금 목소리가 상기된 것을 부끄러워했더니 코마치가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걸 조금 반론하다가 점점 즐거워져서 마지막에는 둘 다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의 저녁식사. 식탁에 돈까스, 닭고기 볶음과 해산물 샐러드를 놓고 셋이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우물거리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집 말인데, 그 땅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와서 말이다. 허물기로 했어.」

「그렇구나. 상당히 내버려뒀었지.」


  저는 어땠냐면 튀김의 칼로리가 신경 쓰여, 해산물 샐러드만 접시에 담고 있었던 탓도 있어서,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어중간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의 말을 보충하듯이 어머니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이야. 필요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대로 둬달라고. 할머니가 살았던 곳을, 할 수 있는 한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아.」

「......정말로, 한결같네.」


  새우를 삼킨 뒤, 무심코 본심이 밖으로 새어나옵니다.


「뭔가 말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래도 할아버지 집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어머니가 내일 휴가를 내서 정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리할 때, 뭔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좋을 대로 하라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라 해도 특별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서재에 잠든, 할머니를 위해 수집한 고서의 행방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 책을 팔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에 건네주는 것은 꺼려집니다.

  그 다음날, 코마치의 제안을 거절하고 어머니를 도우러 할아버지 집으로 갑니다. 오래되어 잘 열리지 않는 현관을 빠져나가자, 마지막에 본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주자가 없어진 건물은 쇠퇴하듯이, 사람의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느 정도는 정리한 것 같아, 소품이나 식기류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래된 벽걸이 시계는 몇 년이나 전에 작동을 멈추어 원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책상 위로는 할아버지가 썼을 거라 추측되는, 고급스런 넥타이 핀이나 손목시계가 놓여있었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다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재를 들여다보니 이쪽은 아직 손이 닿지 않아, 건조한 머리카락 냄새가 방안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청소만은 어머니가 한 것 같아서, 책꽂이에 손을 대봐도, 손에 먼지가 묻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전처럼 할머니 방을 갔더니, 어머니가 장롱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눈치 채자, 「어서 오렴」이라 말하고,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되돌렸습니다.


「무슨 일이야? 그런 데서 가만히 있고」

「그게 말이야, 할머니가 쓰던 기모노를 어떻게 할까 해서」


  어머니가 뺨에 손을 대고, 서랍 안에 선명하게 피어있는 채색을 보고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양가 출신이라서, 젊었을 때 입었던 옷이 좋은 거야. 이 오오시마 명주도 굉장히 고급이고, 그 *우치카케(打掛)는 좀 더 비쌀 것 같아. ......하지만 우치카케는 어머님이 결혼식에서 입은 것 같아서 팔 수도 없잖니.」

※ 우치카케 : 화려한 신부의상


  추억의 기모노, 라고 하면 할머니는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소중한 물건일 것입니다.

  일생에 한 번, 결혼식에서밖에 입을 수 없는 너무나 호화로운 우치카케. 할머니가 몸에 두르고 나서 몇 년 지났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완전히 퇴색하지 않은 그대로,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새어나왔습니다.


「그거, 내가 결혼할 때 입고 싶어.」


  언젠가 제가 결혼할 때, 이 우치카케를 입고, 그리고 마음껏 행복한 미소를 짓고 싶다고 이 때 생각했습니다. 이 할머니와 매우 닮은 용모와 성격인 채로.

  결혼은 아직 상당히 나중의 이야기라서 그런 나이가 된 저를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바로 일전에 조금 의식할만한 일이 있었으니까요. *아직 안 잡힌 너구리 가죽이 알게 뭔가요?

※ 아직 안 잡힌 너구리 가죽을 파는 생각은 하지 마라 : 불확실한 것으로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의미.


  어머니는 제 말을 듣자, 부드럽게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그러네, 아카네는 할머니를 닮아서 아름다우니까, 반드시 잘 어울릴 거야.」

「......응」


  그 밖에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찾아보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할머니의 방을 뒤로하며 다른 방을 정리하러 갔습니다.

  벽에 기대어 멍하니 방안을 바라봅니다. 이곳도 조금 더 지나면 해체되어 할머니의 잔향이 완전히 스러지겠지요.

  할머니의 흔적을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보던 중, 하나만 머리에 걸리는 것이 있어, 방구석에 있는 찬장의 서랍을 엽니다. 노송나무의 향기가 나던 중에 전처럼 칠흑색 비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꺼내어 손바닥에 살짝 놓습니다. 아름다워서 빨려 들어갈 만큼 검고 윤이 나는 그것은, 서늘한 감촉을 줍니다. 이것도 분명, 소중한 것이겠지요. 남에게 건네줄 수 없고, 먼지를 쓰게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과중할지도 모르지만, 기회가 있을 때 머리에 꽂아볼까 합니다.

  모처럼이므로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모아볼까 했지만, 잘 묶지 못하고 포니테일 밖에 되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아서 장롱으로 갑니다. 그리고 방금 제 것이 된 우치카케를 손에 듭니다.

  조금 먼지 냄새가 나는 우치카케를, 교복 위로 대강 걸쳐 입었습니다. 상상한 것보다 옷이 무거운 것에 놀라며, 어울릴지 어떨지 기대하면서 화장대의 삼베를 치우고 제 모습을 바라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의가 중학교 교복인 것이 문제인 건지, 머리 모양이 문제인 건지, 화장을 안 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만, 우치카케의 품위에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어른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봐도, 우치카케는 저와 요만큼도 어울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맵시 있게 입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대강 제 옷차림을 만끽한 뒤, 우치카케를 다시 개려고 했는데, 개는 방법을 몰라서 난처합니다. 다다미 위에 놓고 접힌 자국을 따라 개어 봐도 잘 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부르려고 일어섰는데, 다다미 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러나 전보다 퇴색하지 않은 봉투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떨어지지 않은 걸로 보아, 아무래도 이 우치카케 안에 끼워져 있던 것 같습니다.

  쓴 사람은 짐작이 갔으므로, 전처럼 주저 없이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를 읽어갔습니다. 소극적인 내용이라도 딱히 상관없었습니다. 다만, 결혼한 후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생활했는지를 지금까지보다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접고, 가슴에 꼭 껴안습니다. 쓰여 있던 글을 되새기자, 선명한 감정이 더 없이 밀려들어 와서 마음이 간단히 흔들립니다.

  뺨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나서, 이 소중한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리며 투덜거렸습니다.


 

 

 

( http://acidrain.ky-3.net/%E7%B5%B5/%E3%81%A8%E3%82%8A%E3%81%82%E3%81%88%E3%81%9A )



「뭐예요, 할머니 평범하게 행복했었잖아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 앞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받았습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만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건 확실하게 말로 전하세요, 이 바보.」


―――――――


  다음 일요일, 날씨가 많이 풀린 이유도 있어서 저는 습관이 된 성묘를 하러 갔습니다. 지금껏 한 대로 묘를 청소하고, 꽃을 세워두고, 손을 모아 죽은 세 명에게 말을 겁니다.

  물건을 몇 개 정도 받은 것과 최근 있던 기쁜 일을 보고한 뒤, 마지막에 남동생을 향해 「미안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성격인 채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죽었을 때 슬퍼할 수 없었던 저인 그대로라서, 죄송합니다.

  남동생의 뼈를 묻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말이 없는 차가운 묘를 보고 말합니다.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소의 순서를 마친 뒤, 가방에서 한 통의 편지지를 꺼냅니다. 제가 마지막에 찾아낸, 할머니가 할아버지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다른 편지는 제가 정중히 맡아서, 방 한쪽 구석에라도 보관할까 생각했습니다만, 그래도 이 편지만은 제대로 할아버지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근처를 둘러보고, 그 밖에 참배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성냥을 비벼서 불을 붙입니다.

  한들한들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오렌지색 불을, 편지지에 가져다 댑니다. 편지지의 겉면을 맛보듯이 접하던 작은 불은, 점점 편지지를 삼켜갑니다.

  오래된 종이가 조금씩 티끌이 되어가는 모습에 묘하게 매료됩니다. 할머니가 살았던 증거 중 하나가, 단순한 재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갑니다. 제가 남겨뒀다면 분명 큰 버팀목이 되었을 그것은, 이미 그 의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반 정도 편지지를 침식하자, 집은 왼손까지 날카로운 열이 전해져, 점점 들기 괴로워졌습니다.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어중간하게 태우면 공양이 없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 뭘 하고 있느냐!」


  그런 상태로 약간 고민하면서, 불길이 편지지를 삼켜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지 입구에서 엄한 소리가 날아왔습니다. 뒤돌아보자, 거기에는 이 절의 주지 스님이 목소리 그대로 엄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네? 저기, 이건. ......앗」


  제가 횡설수설하는 동안에, 불은 전부 다 타서 마지막에는 제 손가락을 살짝 스치고 툭하고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불이 닿은 부분을 손대어보니, 날카로운 통증이 스쳐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상입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표정을 짓던 주지 스님은, 그런 제 멍한 모습에 맥이 빠졌는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고는,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우선, 여기로 오거라. 아내에게 치료하게 할 테니.」


  설교는 도착할 때까지의 얼마 안 되는 시간에 행해집니다.

  불을 취급한다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다뤄라. 애초에 이 절은 공양을 안 하니까, 공양하고 싶으면 좀 더 큰 절에 가라. 너도 고등학생이니 좀 더 절도와 상식을 갖고 행동하는 편이 좋다, 등등.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저를 고등학생이라고 착각하는 게 재미있어서 살짝 웃자, 듣고 있는 거냐면서 더 혼나고 말았습니다.

  본당과 연결되는 툇마루로 따라갔더니, 주지 스님은 「여기서 당분간 손을 차게 해두거라.」 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어, 흐르는 물에 담급니다. 차가운 물이 닿자 통증이 심해졌지만, 그것도 한 순간으로 점점 통증이 누그러져갑니다.

  당분간 차가운 물의 상쾌함을 맛보고 있던 중, 툇마루로 이어지는 다다미방의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 묘 앞에서 불장난해서 화상 입은 여자애가 너였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하듯이 말을 걸어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실례지만, 처음으로 만난 게 맞죠?」


  살갗이 흰 초로의 여성은 재미있는 것을 보듯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웃었더니 눈이 가늘어져서, 얼굴이 여우처럼 되었습니다. 양손에는, 반창고와 연고가 각각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흐르는 물에서 손을 꺼내려고 하자, 여성은 「좀 더 차게 하는 편이 좋단다.」라고 하며 툇마루에 앉아서, 방금 전의 제 질문에 답했습니다.


「너, 늘 우리 절에 와서 얼굴을 기억한 거란다.」


  여성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청바지에 싸인 가느다란 다리를 아이처럼 흔들거리며 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주지 스님의 부인이라서 그럴까요. 조금 속세와 멀어진 분위기와 산뜻하게 웃는 모습은, 어떤 의미로는 절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잠시 동안 아주머니는, 제 모습을 따분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후훗하고 숨을 내쉬고는 예리한 눈초리로 제게 물었습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니?」

「......네」

「어째서 그렇게 자주 참배하러 오는 거니?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 정도의 나이에 그렇게 참배하러 오는 사람은 상당히 드물어」

「......긴장을 늦추면, 죽은 사람을 멀리 두고, 그대로 놓아버릴 것 같아요.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요.」


  아주머니는 제 눈을 빤히 바라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근처 숲에서 휘파람새의 장단이 어긋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슬슬 됐으려나. 안으로 오렴.」하고는 문 너머로 들어가서, 당황하며 손을 닦으면서 아주머니를 따라갑니다.

  유서 깊은 일본 가옥은 역시 다다미 방 뿐으로, 여기저기에 풀냄새가 감돌아서 절로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멀리서 자갈을 밟는 소리와 나무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제가 치료한다고 호소했지만, 아주머니는 전혀 듣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되는대로 치료를 받습니다. 아주머니는 유백색 연고를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습니다.


「저기, 왜 장례식 뒤에도 49제나 3주기를 한다고 생각해?」

「사후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건 고인에 대한 이야기지. 그럼 유족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왠지 학교 선생님에게 배우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이리저리 궁리합니다.


「......마음의 정리인가요?」


  제가 대답함과 동시에 연고가 발라집니다. 피부에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이렇게 치료받는 건 초등학교 이래로 처음이라고 마음 구석에서 생각했습니다.


「맞아. 종교라는 건 기본적으로 산 사람을 위해서니까, 구제나 해탈 운운을 제외하고도, 반드시 세속적인 이유가 있어.」

「하아......」


  아주머니는 기세 좋게, 가볍게 말합니다만 그 말은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졌습니다.

  절이라는 것은 시주하는 사람은 어쨌든, 주지 스님이나 스님들은 교의를 진지하게 믿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족이 이런 말을 하면 과연 부처님이 허락해주실지 어떨지 모릅니다.

  그런 제 생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한 아주머니는, 제 대답을 듣고는 계속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주지 스님은 싫어하지만, 조금 전 말한 49제나 3주기도, 처음은 유족들을 위해 마련한 기간이라고 생각해. 이만큼 지났으니까, 고인에 대해서는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하지만 고인을 잊으면 안 돼요.」

「딱히 완전히 잊으라는 게 아니야. 그래도 가끔, 그래. 일 년에 한 번 정도 떠올리고, 사과하거나 사후의 안녕을 빌거나 할 정도로 괜찮아. 그것만 해주면 충분해.」


  거칠고 울퉁불퉁한 반창고가 손가락에 감겨집니다. 말한 그대로 대충 감긴 탓에, 손가락이 전혀 구부러지지 않게 되었지만, 받는 입장이니만큼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뭔가, 적당한 사고방식이네요.」

「적당한 거면 돼. 물론 우리들 입장에서는 묘 청소 정도는 하러 오길 바라지만, 그 이외는 뭐. 거기에 고인의 행복을 빈다고 해도, 매월이라면 지치겠지? 고인도, 너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분명 제 후회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울 수 없었던 것은, 언제까지나 제 안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겠지요.

  그것을 잊으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머니가 말한 본연의 자세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조금 살기가 편해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머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 주지 스님 대신에 반야심경이라도 불러볼까?」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아주머니는 농담인 척 말하고는, 「이걸로 끝」 하며 제 손등을 탁 두드렸습니다. 아직 아픔은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편해진 것 같습니다.

  재차 아주머니에게 감사인사를, 주지 스님에게 사과하고 절을 뒤로 합니다. 경내에 깔린 옥석을 밟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발이 잠겨갑니다.

  다음에 참배하는 건 오봉 때로 합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겠지만, 대신 그 때 많이 이야기합시다.


―――――――


  처음으로 둘이서 탄 자전거는, 예상외로 자세가 불안정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하치만 오빠가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덜컹덜컹 짐받이가 흔들려, 저는 자전거에서 떨어질까봐 무서워하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딘가 잡을 것을 찾아봐도, 붙잡을 곳이 하치만 오빠의 몸밖에 없습니다. 또 짐받이를 잡으면 다리를 뻗다가, 스커트 안이 보일까 하는 불안에 주저합니다.

  그렇지만 하치만 오빠의 허리에 손을 두르는 것은 역시 부끄럽고, 그 쪽도 사양할 것입니다.

  당분간 자전거에 흔들리면서 생각하다가, 미덥진 못하지만 하치만 오빠의 교복을 잡기로 했습니다. 조심조심 셔츠 옷자락을 잡자, 하치만 오빠가 신경 쓰였는지 뒤돌아봐서 쑥스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성묘하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하치만 오빠와 만났는데, 설마 이런 체험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하치만 오빠가 할아버지의 책 몇 권을 맡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행운이라는 건 겹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6월의 푸른 하늘 아래, 자전거를 둘이서 타며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우리들은, 정말 연인 같다는 생각에 허둥지둥합니다.

  조금만 얼굴을 내밀자, 정면에서 습기 찬 바람에 부딪힙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근처를 둘러보자, 아직 오전중이라 그런지, 길을 가던 사람들은 어딘가 한가로운 모습으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자전거에서 보이는 경치는 평온하고, 가로수를 빛나게 하는 신록이 한층 더 눈에 띄었습니다.

  자전거의 흐름에 몸을 맡기던 중, 한 가지가 떠올라서 입을 엽니다.


「하치만 오빠. 그러고 보니, 하나 말하는 걸 잊은 게 있어요.」

「뭔데?」


  하치만 오빠가 시선을 살짝만 담아서 대답했습니다.


「의외로 저, 일본식 옷이 잘 어울린답니다?」

「그, 그래......」


   그것은 처음으로 한 작은 거짓말과 대수롭지 않은 선언입니다. 지금은 아직 어울리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 우치카케를 맵시 있게 입을 수 있을 정도의 여성이 되어, 그 모습을 이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치만 오빠가 기막힌 듯이 수긍했습니다. 그 어중간하게 대답하는 방식도 재미있고, 그리고 귀엽게 느껴져서 저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하치만 오빠의 등에 맡겼습니다. 가슴의 고동이 더욱 빨라집니다.

  태양이 구름에 막혀, 옅은 그림자가 땅에 퍼져갑니다. 아직 봄 날씨를 머금은 바람이 흘러들어와, 제 머리카락을 휩쓸어갑니다. 긴장으로 인한 고동은 이윽고 얼굴까지 올라와서, 이렇게 보내기 쉬운 날씨인데, 더위가 맹렬하게 덮쳐왔습니다.

  ......어쩌면, 여름은 이미 눈앞까지 왔을지도 모릅니다.


―――――――


  에필로그 ~봉하지 않은 편지~


  의사에게 남은 시간을 듣고 나서, 제 인생을 자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죽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무섭습니다. 사후 세계를 공연히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후에 찾아올 깊은 어둠 속을 상상하면, 밤에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떨립니다.

  결코 올바른 인생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되어, 그리고 그 사람의 돈으로 생활했던 사람의 인생이 올바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제 주변에는 항상 미소 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있고,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제 오빠나 언니들은, 당신과 같이 가끔 얼굴을 보이는 탓인지, 이 연령이 되어도 이상하게 인연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웃 분들과도 반상회 행사로 종종 교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속에 계속 있는 듯한, 그렇게 온화한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낼 수 있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틀림없이, 제 인생은 행복했겠지요. 당신에게는 폐를 끼쳤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고, 되돌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가져다 준 사람은 당신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애정이나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정말 제멋대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에 감사하게 해주세요.

  이런 저와 결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이런 온화한 나날은 보낼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보답으로, 당신의 남은 인생이 끝없는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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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함께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2014) 11월 중순으로, 약 8개월간의 투고가 되었습니다.

  봐주신 분, 감상을 써주신 분, 평가해주신 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UA가 늘어나거나 감상을 받거나 평가를 받을 때마다 기운이 나서 어떻게든 완결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카네와 아카네의 할머니 캐릭터가 가장 처음으로 생각나서, 그 이래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뭐, 짝사랑한 여자애를 쓰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지만요.

  처음에는 아카네를 움직이는 것이 꽤 큰일이라, 이 애다운 행동은 뭘까, 이 뒤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것들이 걸려서, 꽤 어려운 캐릭터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완결까지 도착했을 때, 이제 더는 아카네에 대해서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더니, 허전해지기도 하고...... 정말로 이 애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역시 엔드 마크는 어디선가는 찍어야 하므로, 이 시점에서 끝내려고 합니다.

 
  ......라고 썼습니다만, 메인 줄기와는 관계없는 곳에서 거북이 갱신이 됩니다만, 예외편을 5편 정도 써볼까 합니다. 후일담을 3화 정도로, 아카네에게 차인 남자애 시점에서의 이야기를 1화. 나머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하지만 본편은 이걸로 완결이라는 걸로, 거듭해서 말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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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첨부한 그림은 작가 분이 그린 게 아니지만 제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그림을 우연히 보고 어울리겠다 싶어서 임의로 넣었습니다. 아카네와 다른 면은 분명 있겠지만 그건 양해를...



  http://novel.syosetu.org/38226/





  소녀 때 Ⅷ ~커다란 손~



 
  코마치와 거리가 더 가까워지고 나서 며칠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하치만 오빠에게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요 며칠 간 몇 번이나 사과하러 가자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코마치에게 상담했더니,


「그건 안 돼. 오빠가 먼저 심한 말을 했으니까, 아카네 먼저 사과하면 안 되지.」


  이렇게 말하며 저 먼저 사과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납득해도, 시간이 지나면 역시 사과하고 싶어지고 다시 코마치가 말리는, 그런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돌아갈 때도, 며칠 간 계속 하게 된 대화를 주고받으며 코마치와 하교하고 있었습니다.

  해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져, 거리는 저녁노을에 물든 하얀 그대로였습니다. 점심 경에는 상당히 기온이 올랐지만, 지금은 상당히 지내기 좋은 정도까지 내려가서 바람이 기분 좋은 그런 때입니다.

  쭈욱 늘어난 검은 그림자를 한 걸음씩 밟으며, 며칠 사이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그래도」를 제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하치만 오빠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안녕하세요, 격조했습니다.」


  순간 나온 말이 딱딱한 인사였던 것을 후회하면서 인사를 한 뒤 얼굴을 들자, 하치만 오빠의 탁해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좋은지 모르게 됩니다. 거북함과 멋쩍음이 엄습해서 무심결에 얼굴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또 한 번, 후회했습니다.

  코마치가 마침 잘됐다고 말하고 떠나서, 이곳에 저와 하치만 오빠만이 남겨졌습니다.

  나무들이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나,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각을 했기 때문일까요, 가슴이 괴로울 정도로 아파지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치만 오빠가 한 걸음 다가옵니다. 조금 기울어진 해에 늘어난 하치만 오빠의 그림자가, 저의 그림자와 교차합니다.

  그것만으로 제 사고는 뿔뿔이 흩어져, 다시 모을 수가 없게 됩니다.

  조금 멍한 도중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리저리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입술을 몇 번이나 움직여보지만, 그저 한숨이 되어 의미를 이루지 못하고 무산해갑니다.


「오랜만이에요. 하치만 오빠.」


  결국 평소에 하던 인사가 입에서 나왔습니다.


―――――――


  초등학교 무렵에 가던 통학로를, 하치만 오빠와 걷습니다.

  매우 새로운 현대적인 주택에, 다양한 색상으로 된 포장. 앤틱한 가로등은 저녁노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거리 안에서, 무기질적인 백색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통학로는 하치만 오빠가 졸업한 뒤 개발이 진행되어, 지금은 상당히 정비되었습니다. 저와 코마치는 정비된 뒤의 통학로도 쓰던 탓에 그다지 새로운 느낌은 안 들지만, 하치만 오빠는 두리번두리번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달라진 것들 하나하나를 주목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치만 오빠와 이 길을 걷는 것도 초등학생 이래로 처음입니다.


「......요전에는 미안. 말이 너무 지나쳤어.」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있던 때, 제가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하치만 오빠가 했습니다. 저를 시야에 담은 하치만 오빠의 눈은, 석양을 반사해 조금 빛나는 것처럼 보여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 떠오릅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조금 감정적으로 됐어요.」


  그리고 겨우, 저는 며칠간 가슴에 움켜쥐던 생각을 내뱉을 수 있었습니다.


「왜 네가 사과해?」

「아니요, 저도 사과해두고 싶었어요.」


  실은 좀 더 사과하고 싶지만, 이만큼만 합니다. 코마치가 말했습니다. 사과할 거면, 간단히 하라고. 그렇게 부담 없이 화해하면, 싸운 것을 쉽게 잊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마치의 의견에 따르려고 합니다. 이것은 둘이서 한 마디씩 사과해서 그걸로 끝난다고.

  주택가를 빠져나가자, 눈앞에 전원 풍경이 펼쳐집니다. 몇 개의 논에 규칙적으로 심어진 모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과거에서 온 바람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벌써 상당히 옛날이 되어버린, 처음으로 이야기하고 그대로 같이 돌아간 그 무렵의 기억이 뛰돌아 다닙니다.


「여기는 별로 변함없구나.」


  그래서일까요. 이 풍경을 눈앞에 두고 하치만 오빠와 이야기를 하자, 말이 술술 나왔습니다.


「그러네요. 하지만 논밭을 무너뜨리고 집을 짓는 것도, 멋이 없어요.」

「그래? 발전해서 깔끔해지면 좋잖아.」

「발전했다고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새로 살게 된 사람만일지도 몰라요. 혹시 원래 살던 사람은 싫어할지도 몰라요.」


  하치만 오빠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장마의 눅눅한 공기가 자꾸 무거워져서 저를 눌렀지만, 이 말은 본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긴장만은 참을 수 없어, 목이 말라갑니다. 제 마음은 요즘 망가진 것처럼, 격렬하게 점멸을 반복합니다.

  하치만 오빠의 얼굴에 여러 표정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뒤, 그는 그리운 말을 입에 담았습니다.


「......저기, 혼자서는 외롭지 않아?」


  갑자기 나온 그 말에, 무심코 심장이 덜컥합니다. 아무리 하치만 오빠라고 해도, 저의 내면에 닿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 의도를 살피고 맙니다. 하치만 오빠의 눈을 조심조심 들여다보고, 곧바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차리자, 저는 익숙해진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네, 외롭지 않아요.」


  이것은, 저의 이 공허한 성격을 서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원래 그래요.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혼자 있어도, 저는 그다지 다를 게 없어요.」

「그래..... 원래 그런가」

「예, 원래 그래요.」


  그래서 저도 말을 하며 저의 성격을 확고히 쌓아올려,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저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바라지 않습니다. 언젠가 주변 사람이 녹아서 스러져도, 저는 변함없이 혼자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성격은 간단히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게 원래 그런 거니까요.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운 일 같은 것은 없이, 태어났을 때부터 품었던 것이라 이제 떼어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성격은 지금부터 평생, 꺼림직함을 품으며 같이 따라갈 테지요.

  ......그럼에도, 예전보다 자신을 믿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저라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준 애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기, 키리바나」

「네? 아, 네」


  갑자기 하치만 오빠가 진지한 표정으로 불러서, 무심결에 대답했습니다.

  타이밍을 가늠해서 모처럼 제 생각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불만스러운 저와는 반대로, 하치만 오빠가 두른 분위기는 자꾸 팽팽해져갑니다. 긴장을 억누르듯이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편 뒤,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좋아해.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항상 곁에 있게 해줘.」


  그것은, 예전에 제가 들었던 말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에서 들으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지금까지 미움 받지 않을 정도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성으로 사랑받다니, 하물며 하치만 오빠가 고백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들의 가까운 거리는 그저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한 것일 뿐, 특별한 유대가 자라났다는 건,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몸을 지배하는 놀라움에, 어느덧 넘쳐흐른 기쁨이 뒤섞여, 따스한 온기에 쌓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짝반짝한 고운 알이 가슴 속에 퍼져, 그리운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하치만 오빠의 말을 먼 옛날에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프로포즈한 말이니까요.

  그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제게 말해준 것. 제가 갔더니, 할아버지가 난처한 얼굴로 제게 가르쳐 준, 머나먼 옛날의 자그마한 고백.


「아하하하하!」


  그래서, 절로 웃음소리가 넘쳐흐르고 말았습니다.

  용모도 성격도 매우 닮은 우리들인데, 설마 이런 부분까지 같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이 기묘한 우연이 재미있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치만 오빠가 놀라서 기막힌 모습으로 눈을 크게 뜹니다. 조금 멀리서 걷는 사람들이, 힐끔힐끔하고 궁금한 듯이 우리들을 보고 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 차는데 어째서 그 마음을 숨겨야 할까요.

  쑥쓰러움의 물결이 밀려와서 돌려주듯이 살짝 발을 넣어서 닿자, 투명한 물이 발에 휘감겨서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이, 언제까지 계속 웃을 생각이야?」


  제가 계속 웃어서 그런지, 하치만 오빠가 불만스럽게 흘겨봅니다.


「왜, 왜냐면 거의 프로포즈잖아요, 게다가 *소화(昭和)스럽기까지 해요. ......후후」

※ 소화(昭和) : 서기 1926년부터 1989년까지의 일본 연호

「......미안하구만, 낡아 빠져서」

「아아, 아니요, 죄송해요. 얼버무리는 건 아니에요.」


  하치만 오빠가 입을 뾰족하게 하며,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그 토라진 모습이 아이 같아서 귀여웠지만, 말로 하지는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둡니다. 그리고 일단 웃음을 멈추고,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순수한 감정을 꺼내서 말로 해나갑니다.


「......하지만 그 낡음이, 저는 정말 좋아요.」


  왜나면 이렇게나 가슴이 뜨거워지니까요.

  할머니는 이런 멋진 프로포즈를 받고, 어떻게 느꼈을까요. 만약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면, 안타깝습니다. 이 말만으로 평생 가득 찰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나저나, 그렇다고는 해도,


「프로포즈야, 이 바보야」


  저는 아직 14세라서, 애초에 결혼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제 생각을 전하는 것만 생각했고, 앞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마음 깊숙이 있는 감정에 쉽게 닿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어준다. 제멋대로에 독선적이고, 손 놓아 버린 것을 쫓을 수 없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

  그래서 남은 것은 앞으로 하나만.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라도, 겉으로 드러나게 된 싫은 성격에 대해 물을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저는 이대로, 분명 당신이 바라는 사람으로는 될 수 없을 거예요. 만약 하치만 오빠가 없어진다고 해도, 저는 외롭다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심술궂은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기대하면서, 저는 마음속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치만 오빠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가, 평소의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했습니다.


「저기 말이다, 난 네가 없어지면 외로워. 그러니 안심해라, 네가 싫어하지 않는 한은, 손을 떼어놓지 않을 생각이라고.」

「후후, 스토커 같아.」


  기대 그대로인 말은 정말로 달콤해서, 몸 전체가 저릴 정도로 기분 좋았습니다.

  그 달콤함에 취해서 잠기듯이 몸을 흔들고 있는데, 하치만 오빠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습니다.


「게다가, 너의 맑은 표정은 병적으로 아름다워. ......그러니, 가끔씩은 그런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런가요」


  기대 이상의 말에, 뺨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히죽거릴 것 같게 되는 얼굴을 억누르고, 목소리에 동요를 남지 않게 침착한 상태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슴이 두근거리는 탓에, 제대로 하고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다행히 하치만 오빠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제 상태를 알아차리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못 들었는데」

「그러네요.」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솔직해지자고 친구와 약속했고, 저를 알면서도 함께 있어주는 사람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조금만 더 뒤로 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이 순간을 맛보고 싶으니까요. 앞으로 여러 행복과 불행을 만나겠지만, 이것과 같은 종류의 행복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따스한 기분에 몸을 담가서, 그대로 몸을 맡깁니다. 얼굴에 닿는 산들바람이 기분이 좋아, 눈을 가늘게 뜹니다. 언제까지나 하치만 오빠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아쉽지만 손을 놓고, 만감의 생각을 담아 대답합니다.


「그럼 부족한 몸입니다만, 잘 부탁드립니다.」


  대답은 일찍이 할머니가 한 것처럼, 낡고 평범한 말을 골랐습니다.


「왠지 시집가는 것 같군.」

「아무개 씨가, 프로포즈 같은 고백을 하기 때문이에요. ......자」


  그렇게 말하고 비어 있던 하치만 오빠의 손을 잡아, 돌아갑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대로, 하치만 오빠의 손은 남자답게 커서, 가슴의 고동이 더욱 빨라졌습니다.

  하려다가 끊긴 말은 아직 하지 않습니다. 모처럼이니까, 제대로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조금만 미루려고 합니다.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날린 사람은, 하치만 오빠니까요.

  어느 새 해는 거의 가라앉아 떨어져서, 거리는 작은 어둠과 주황색이 뒤섞인 복잡한 색조를 보이고, 먼 하늘에는 창백한 달과 가장 먼저 보이는 별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저는 이 성격 그대로일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채워져도, 이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떨어진다면, 되찾으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이런 저라도, 이 커다란 손을 계속 잡는 것만큼은,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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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 때 Ⅶ ~갖가지 눈물~




「그래서, 넌 잘못됐어.」


  그 말을 하치만 오빠가 했을 때, 몸 깊숙한 곳에서 뜨겁게 질척질척한 것이 올라와, 떨릴 것 같았습니다.

  떨림을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하자, 곧바로 그리운 기분이 밀려와, 가슴 속에서 여러 감정이 얽혀서 생긴 것은 체념이었습니다.

  결국 하치만 오빠는, 그 때 이래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장하면서 눈이 점차 탁해지고, 근사함이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제일 깊숙한 곳에 숨겼던 것은 그 때 그대로였습니다.

  8년 전의 그 돌아가던 길. 태양이 여름을 알리듯 날카로운 햇볕을 내리쬐고, 땀과 긴장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던 그 때와.

  ......그리고 저도, 그 때 이후로 전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빠져 있던 부분은, 변함없이 텅 빈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왠지 모르게 하치만 오빠가 바라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았습니다. 하치만 오빠의 곁에 있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을 두 명 알고, 저 같은 것이 누리는 것보다도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심은 굉장히 간단하게 섰습니다. 방법도, 바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탄스러운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서투르게 봐왔으니까요.


「......그 생각은, 하치만 오빠의 자기만족이에요.」


  하지만 나온 말은, 제가 떠올린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외톨이를 정당화하고 있어요. 자신의 사정으로 누군가의 사정으로 친구를 만들 수 없는데, 외톨이가 된 것을 이유를 대서 속이고 있어요.」


  불합리한 말을 해서, 이런 녀석과 두 번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도록 화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말은 바로 포장이 벗겨져,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막연한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서, 그래도 외로워서 실은 바라기 때문에 괜찮다고 속으로 생각할 뿐이잖아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꾸자꾸 날카로워져 가고, 가차 없이 하치만 오빠를 찔러갑니다. 제가 말을 자아낼 때, 조금씩 비통한 표정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하지만 저는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중에 제일 화내는 건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별로 화낼 일이 없어서, 침착한 기분을 모르게 되어, 마음을 완전히 주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별로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분명 누구라도 있겠죠. ......다만, 그 자기만족을 제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 자기만족으로, 제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지 마세요. 그것이, 저는 가장 싫어요.」


  마지막에 토해낸 말은, 틀림없는 제 본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언하고 나서 하치만 오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말했던 모든 것을 후회했습니다.

  결국 저는, 하치만 오빠에게 상처 주었을 뿐입니다. 미움 받으려 해도 전혀 잘 되지 않고, 그저 머리에 피가 오른 채 무방비한 상대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을 뿐입니다.

  그런 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어져, 눈 안쪽에서 눈물이 넘쳐흐르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눌렀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울다니, 용서될 리가 없습니다.

  일단 하치만 오빠에게서 등을 돌리고, 긴장된 표정을 풉니다. 눈물이 넘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평소의 표정을 어떻게든 만들어, 간신히 뒤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인사했을 때, 마침내 버티지 못하게 되어, 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눈물은 아스팔트에 떨어져, 검은 얼룩을 몇 개 정도 만들었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한 번 더 하치만 오빠에게서 등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더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흐느끼며 울 것도 없이, 눈물은 뚝뚝 뺨을 타고 그저 계속 흐릅니다.

  눈물을 흘리자, 머릿속이 점점 냉정해져서 저런 말을 하게 된 이유에 짐작이 갔습니다.

  저는 저의 성격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치관은 어딘가 비뚤어졌고, 누구에게도 집착할 수 없다면 분명 혼자가 될 삶의 길을 주저 없이 걸어갈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윤리에서 벗어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이 성격을 누군가에게 부정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부정할 정도라면, 방치해주길 바랐습니다.

  잘못됐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그런대로 포기하고, 매듭을 짓고 사는 중인데, 그래도 잘못됐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면 좋은 건가요.

  올바르다고 듣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옳진 않지만 이 공허한 마음을 품은 그대로도 좋다고 말해줬으면 했습니다.

  그것은, 초등학생이라도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줬으면 하는, 유치한 마음.

  ......뭐야, 저는 이렇게나 하치만 오빠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나는 하치만 오빠가 그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대로도 좋다고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먼저 제 성격을 보여준 사람은 하치만 오빠뿐이기 때문에. 혹시 코마치나 부모님도 알지도 모르지만, 저 먼저 보여주려고 생각한 사람은 하치만 오빠뿐입니다.

  하지만, 그 짝사랑도 오늘로 끝입니다.

  제가 보여준 심장은, 하치만 오빠에게 부정되었습니다.

  눈물은 이제 저를 탓하는 건지, 아니면 실연에서 온 건지 모릅니다. 분명 전자겠지요.

  그걸로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연정도, 내일이나 모레가 될지 모르지만, 바로 사라집니다. 후회를 질질 끌게 되어도, 미련만은 계속되지 않는다고, 제 머리가 냉철히 호소합니다.

  겨우 눈물이 멈춰, 조금 우회해서 편의점의 세면소에 들러서 얼굴을 씻습니다. 뺨에 남아 있던 눈물 자국은, 물에 닿아 조금 문지른 것만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얼굴을 씻자 기분도 많이 풀려, 평소대로의 제가 돌아옵니다.

  가게를 나와 하늘을 올려봤더니, 어느 새 밤의 장막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눈부실 뿐인 별들은, 손닿지 않는 머나먼 저 편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


  어제의 맑은 하늘과는 달리 돌변한 회색 하늘이 가린 아침. 눈이 깨어 밥을 먹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서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얼굴의 제가 비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잠버릇으로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삐쳐 있고, 눈시울이 반 정도 닫혀 있었지만, 평소의 제 아침 얼굴입니다.

  얼굴을 씻고, 화장수와 유액을 묻혀 머리를 빗습니다. 매일의 준비를 마치고, 손가락으로 뺨을 들어 올리자, 완전히 평소대로.

  집을 나와 코마치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코마치는 벌써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얼굴을 마주치자 먼저 한 말이,


「아카네, 어제 오빠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라고 중얼거려서, 저는 반사적으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걸 물을까요. 저는 평소 그대로의 표정일 거라, 겉으로 봐서는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치만 오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들은 걸까요. 하지만 하치만 오빠가 누군가에게 말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알았어?」


  대답을 잘못했던 것을 깨닫고, 살짝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이래서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본인이 먼저 자백할 뿐입니다.


「있잖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아카네는 기쁜 일이 있었을 때는 그런대로 표정으로 나오지만, 싫은 일이 있으면 엄청 평범한 표정을 지어.」

「응」

「그런데, 오빠랑 데이트한 아카네가 평범하게 반응할 리 없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


  여러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대체로 정곡을 찌르고 있어서 입 다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실은 코마치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꺼려지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과 후에 좋아?」

「좋아! 느긋하게 얘기하자.」


  코마치는 그렇게 말하고는, 상쾌한 미소를 띠고 훌쩍 제 앞으로 뛰쳐나가서, 학교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수업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채, 학교에서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야 일행에게 무슨 말을 들었지만, 중요한 내용이 아닌 것 같아 곧바로 잊어버렸습니다.

  방과 후가 되어 코마치와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패밀리 레스토랑에 갑니다. 날씨는 자꾸자꾸 나빠져, 사람들이 우산을 한 손에 들고 걱정스러운 듯이 하늘을 올려보는 모습이 하나둘씩 보였습니다. 저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해질녘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우리들 말고도 학생이 대부분, 점원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드링크 바를 주문합니다.

  그러고 나서 오렌지 주스가 2개, 테이블 위에 놓이자, 겨우 코마치가 「그래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오늘 아침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얘기했습니다.

  제가 계속 하치만 오빠를 좋아했던 것, 거기에 자신의 성격이 잘못됐다는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화내서 심한 말을 퍼부어버린 것.

  제가 무언가 말할 때 코마치는 응응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동안,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고 겨우 코마치는 맞장구 이외의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카네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건, 사과하고 싶다......고 할까 사과할 거야. 심한 말을 했고」

「그것만? 사과한 뒤에는 뭔가 안 해?」


  묘하게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 코마치가 말합니다.


「......으, 응」


  코마치는 저를 위에서 아래까지 쳐다보고는, 기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주스를 한 모금 마십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아카네는 진짜 둔감. 왜 이렇게 간단한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구! 왜냐면 아카네는 어차피 오빠한테 미움 받고, 이대로 인연이 끊어진다는 생각 같은 걸 하잖아. 게다가 그 편이 오빠를 위한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거고」


  몹시 놀라며, 코마치를 다시 봅니다. 코마치는 아직도 말을 다 못했는지, 투덜투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건 제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알아맞힐 수 있었습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렇게나 간파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저는, 코마치가 생각하는 것을 반 이상 모릅니다.

  하지만 제 사고를 「어차피」라고 부르는 것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거기가 둔하다는 거야! 그렇게 사소한 걸로 오빠가 아카네를 싫어하게 될 리가 없잖아. 아카네는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해.」

「그야말로 과대평가야. 나, 코마치 생각보다 싫은 애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기, 아카네. 내가 아카네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뭔지 알아?」


  코마치는 어딘가 그리워하는 듯한,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는 듯한 표정을 띠고, 앞으로 몸을 기울입니다.


「하치만 오빠에게 부탁받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친구가 된 계기. ......실은 오빠한테 소개받기 전에 우리들 한 번, 얘기한 적 있어.」


  제가 목을 기울이고 있자, 코마치는 「역시 기억 못했어.」라고 입을 뾰로통하게 하며 말했습니다. 빨대로 컵 안을 뒤섞자, 찰랑찰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하치만 오빠에게 소개되기 전에 코마치와 만난 기억은 없습니다. 교내에서 마주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얘기한 때는 승강구가 처음일 겁니다.


「초등학교 때 교정 구석에 토끼우리가 있던 건 기억나?」

「응. ......입학하자마자 죽었지만」


  우리들의 초등학교에서는 1학년과 6학년이 조를 짜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학예회나, 레크리에이션이나, 요컨대 1학년이 초등학교에 익숙해지기 위해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습 중에 교내에서 사육된 토끼를 보살피는 것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2대인 흰토끼와 흑토끼. 하나와 부치라 불리던 토끼는, 두 마리 모두 눈이 작고, 동그랗고 제가 토끼우리에 들어가면 종종걸음으로 와서 재롱부리듯이 따라오는 귀여운 아이들이었습니다.

  보살핌이라고 해도 토끼 먹이를 주는 정도입니다. 식사 때 제가 서툴러하는 당근을 입에 대주면, 맛있게 갉아먹는 것이 흐뭇해서 그만 몇 번이나 주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와 부치는 우리들이 입학하고 나서, 불과 두 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인은 칼로 배가 찢긴 것에 의한 실혈사. 범인은, 현지의 중학생이었습니다.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마리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그 날 아침, 먹이 당번이었던 저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봤습니다. 쇠망치로 파괴된 자물쇠, 차가워져 움직이지 못하게 된 토끼 두 마리의 내장, 피가 스며들어 거무스름해진 흙과, 그 광경을 보고 먼저 기분이 나빠진 저도, 전부 기억합니다.


「......맞아. 그래서 죽은 뒤에, 토끼의 장례식 같은 것을 했던 것도 기억나?」

「그건, 조금만」


  그 이야기의 어디까지를 코마치가 알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저는 발견자여서 경찰에게 이야기하고 사건의 전말까지 물었지만, 그 전말이 전교 조회에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 장례식 때 코마치가 울려고 했는데, 아카네가 가까이 있어서」

「......말은 걸지 않았겠네.」

「그래. 하지만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어. 진짜 요만큼도. 주위 여자애들은 모두 침울했는데 아카네만 그런 표정이어서, 화났어.」


  그 즈음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아마 저는 코마치가 말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체를 본 뒤 나쁜 기분이 먼저 일고, 살해당한 하나와 부치에 대한 동정심이 부풀어 올랐을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있다고 하면 슬퍼할 수 없었던 죄책감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뭐라고 할 뻔했는데, 선생님도 그 때 있어서 포기했어. 다음 날 아카네한테 다시 뭐라고 하려고 했더니, 아카네. 그 토끼 무덤 앞에서 손을 모았어.」

「......그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뒤가 약해져갑니다. 그 모습은 다른 동급생에게도 이상하게도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와 부치를 잊은 것은 아닌데, 어째서일까 지금도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었으니까, 다음 날로 할까 생각했더니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매일 참배하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한 번만 뒤에서 말을 걸어서 이유를 물었던 거야.」


  확실히 기억납니다. 그 때, 선생님 말고 걱정해준 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야기했을 때 저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요.


「그랬더니 아카네, 『이 아이들이 죽고 슬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빌려고 해서』라고 말했어. 그 때 생각했어, 이 상냥한 애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코마치는 귀중한 추억을 말하듯이, 그리움이 담긴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저는 자꾸만 뺨이 뜨거워져서, 그 부끄러움을 억누르는데 필사적이었습니다.

  남동생이 죽은 뒤, 처음으로 성묘하러 갔을 때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덤 앞에서 손을 모으는 것은, 죽은 다음에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신님에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놀라서 기막혀하고 있는데 아카네, 어디론가 가버리고. 방과 후에 말을 걸려고 찾아도 못 찾겠고. 결국에는 오빠한테 소개받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코마치는 아카네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어.」

「......응」

「그래서야, 코마치는 아카네가 말하는 싫은 부분을 가장 처음에 보고, 그 다음에 상냥한 부분을 알았던 거야. 하지만 아카네가 전혀 싫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좋아하게 됐어.」


  어쩌죠, 울 것 같습니다. 점점 시야가 희미해져 코마치의 얼굴이 비뚤어져 보입니다. 가슴 속에서 선명한 감정이 치솟아, 몸을 감싸갑니다.

  이제, 그만하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더 이상 들으면, 저는 분명 울어버릴 테니까요. 보기 흉하게 코마치 앞에서 크게 울어버릴 테니까요. 그건,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코마치는, 그런 아카네를 좋아하는 거야. 약간 별나지만, 그래도 굉장히 상냥한 아카네라서 좋아하게 됐어.」


  코마치는 겨우 미소를 바꿔서는, 방금 전처럼 발끈한 표정을 만듭니다.


「그래서 아카네가 둔하다는 거야. 우리들의 기분을 전혀 몰라. 자기가 없는 편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코마치는 아카네가 없어지는 쪽이 싫어.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 사이좋게 되어봤자, 아카네하고 떨어지면 아무 의미도 없는걸.」

「......읏」


  결국 견디다 못해, 울어버렸습니다. 어제와 오늘 눈물샘이 망가졌기 때문일까요, 애처럼 보기 흉하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기뻤습니다. 그렇게 저와 같이 있는 편이 좋다고 말해준 것이 이렇게나 기뻤습니다.

  제가 흐느껴 우는 것을 깨닫고, 코마치가 정면에서 제 옆으로 옵니다. 그리고 달래듯이 제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습니다. 최근 제 키만 자라서, 차이가 많이 나게 됐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이 작은 손으로 어루만져 줍니다.

  그것이, 한층 더 제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아~아, 모처럼 이쁜 얼굴이 엉망이야.」

「코마치가 울리니까 나쁜 거야.」

「곤란한 애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아카네.」

「......뭔데」

「아카네의 성격으로 볼 때, 자기가 먼저 고백하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혹시 오빠가 그런데도 아카네랑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져봐.」

「사람을 바보처럼 말하지 마. ......그래도 힘내볼게.」


  저는 울음을 멈추고 나서 그 이후로, 가게 내에서 궁금해하는 시선에 노출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재빨리 계산만 마치고, 코마치에게 손을 끌려가듯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분명 이 애한테는 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평생 친구로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멋진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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