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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화 【초등학교 편 ⑦ 전편】



  ◆



  NGO 캠프에 참가한 당초, 상상을 넘은 힘든 현실에 직면한 나는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이건...... 하고 두 손 든 것이 있다.
  ――매일의 식사.
  원래 가리는 건 별로 없었지만, 아프리카의 음식은 얘기가 달라서, 꽤 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의 문화에서, 일본의 쌀에 해당하는 주식은 우갈리라 불리는 음식――흰 옥수수 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은 음식――이다. 하얀 분말로, 일본 요리의 비지의 외형, 먹을 때의 느낌 모두 약간 비슷하고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우갈리를 먹었을 때, 떠오른 것은 운동회의 사탕 먹기 경쟁. 사탕을 필사적으로 찾은 나머지, 입 속에 대량의 가루가 비집고 들어갔을 때의 불쾌감...... 그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뭉친 하얀 그것을 입에 넣은 순간, 입 속의 침이 전부 흡수되는, 푸석푸석한 느낌에 습격당한다. 어쨌든 토해내지 않는 게 고작이다.
  반찬은 무시무시하게 신 토마토와 씁쓸한 양배추 같은 잎으로 만든 야채 볶음. 그리고 턱이 나갈 정도로 엄청 질긴 쇠고기나 양고기. 간도 진한 부분과 싱거운 부분이 나뉘어져, 일본에서의 식사에 익숙했던 내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 자! 사양하지 말고 더 드세요.」


  의료단을 지탱해주는 현지 아줌마 스탭의 미소――나처럼 도움이 안 되는 신입 의사에게도 매우 친절하다――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내심 노고를 참으며 입에 계속 넣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 어쨌든 먹고, 육체에 영양을 보급해야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이건 식사가 아니라 영양 보충제, 맛 따위를 생각해서 어쩔 거냐! 라고 생각하면서 물로 삼키듯이 하루하루 계속 먹었지만, 속으로는 절망할 것 같았다.
  특히 힘든 수술 뒤, 식욕이 없는 위에 무리하게 우갈리를 넣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우 식사 정도로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뇌에 앞서 몸이 거부하는 느낌으로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섭다. NGO에서 보내는 시간이 2년을 지났을 무렵, 난 이렇게 서툴렀던 우갈리를 필두로 한 아프리카의 식사를, 오히려 맛있게조차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갈리가 거의 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거짓말, 희미하게 단 것과 맛있다는 느낌을 즐기고――게다가 만든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입에 넣은 순간에 오늘의 식사 당번 스탭이 누군지 알 정도. 세르게프와 식사할 때 내기해서, 그의 간식――입이 저릴 만큼 쓴 잎이지만 익숙해지면 맛있다――을 빼앗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세리실. 너도 틀림없이 우갈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잘 먹어봐.」

「Non!! 아무리 아키라 선배의 명령이라 해도, 저는 Non!!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몇 번이라도!」


  나와 세리실밖에 없는 식사용 휴게실 안에서, 쿵! 하고 테이블을 치며, 온몸으로 싫다고 표현하는 그녀.
  금발 머리카락, 오똑한 코, 의지를 품은 눈 아래에는 작은 점...... 예전에 마법사 애들이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소녀와 왠지 모르게 닮은 외모. 뭐, 내가 딱히 백인 여자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할 뿐이겠지만......
  어쨌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오기가 서린 표정. 아까 전부터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테이블에 놓인 저녁식사인 우갈리에 손을 대려하지 않는다.


「다른 건 뭐든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우갈리라는 음식만은...... 물론 스탭 분께는 죄송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이건 제 혈통 탓이에요. 그래요...... 요리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 제 몸에 흐르는 그 조국의 피가...... 아무래도 받아들여주지 않아요.」

「아니, 리더 세르게프도 프랑스인이지만, 우적우적 먹던데......」

「monsieur! 뭐라고 하셨죠?」

※ monsieur : Mr.에 해당. ~씨, ~님.

「아, 아니 딱히......」


  하아......하고,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쉰다.
  세리실은 내 외과 제1 조수로서 최근 3개월간, 같은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 살 어리지만, 월반을 계속해서 나와 거의 동시기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녀는 성적 우수라 해도 좋다. 단 NGO의 지옥과도 같은 아수라장에서의 실무경험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수술 중 사소한 부분에서 약점을 보일 때가 있었지만......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유능하고 자신감에 넘쳐, 고집이 세서 한 번 주장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굽히지 않는다.


「그래도 세리실, 오늘은 빵이 없잖아? 안 먹으면 내일이 힘들어져.」

「그......그건 그렇지만요. 그, 그래도, 아키라 선배의 조국인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는 말이 있잖아요」

「쓰는 상황이 달라......」

※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 : 궁핍한 처지에 있어도 궁핍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존심을 높게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 바꿔 말하면 허세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다.

  할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어는 조금 할 수 있다......는 세리실의 실수를 고칠 힘도 없고,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여기 요리는 반찬이 적어서,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영양도 부족하다. 역시 주식인 우갈리가 필수다. 입에 맞든 안 맞든,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결론짓고 먹을 수밖에 없다.
  다만, 아무래도 우갈리를 먹지 못하는 스탭용으로 빵――옥수수가루가 많이 들어간 무섭게도 딱딱한 것――이 평소에는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 며칠, 보급 부대가 치안 악화로 도착이 늦어져, 오늘 저녁식사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알았어, 세리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게. 안 먹으면 내일, 내 조수는 맡길 수 없어. 알겠지?」

「――!? 그, 그럴 수가......!?」

「현기증이라도 나서, 수술 중에 쓰러지면 어쩔 생각이야?」


  맹렬한 기세로 항의하려고 한 그녀의 기선을 제압하듯이 날카롭게 단언한다. 적절한 반론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우물거리며 분한 듯 고개를 숙이는 세리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어떻게든 생각해낸 타협안을 타이르듯이.


「뭐...... 식사는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어. 알았어, 내가 담당 의사에게 부탁해 둘 테니까, 내일은 리허빌리(Rehabilitation)와 진단을 도와줘. 빵이 오면 또 수술 조수로 들여줄게. 오늘은 반찬을 많이 먹고 허기를 달래, 알겠지?」


  이만큼 설득해도 안 되니까 별 수 없다. 세리실에게는 꽤 세게 말했지만, 실제 우갈리라는 음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서, 베테랑 스탭이라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부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그녀는, 내 눈으로 봐도 실무에서는 많이 노력하고 있다. 식사까지 무리시키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아키라 선배, 알겠어요. 먹을게요. 저, 먹을 거니까」

「아니, 괜찮아. 말이 지나쳤다. 나도 나빴어. 무리할 필요는......」


  푸른 눈동자로 곧게 바라보는 세리실.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귀에 걸치고, 각오한 듯 심호흡을 반복한다. 새하얀 피부와 굴욕 때문일까? 붉어진 뺨.
  그리고 내 말을 끊듯 손을 흔들고는, 어딘가 부끄러운 듯이 작게 중얼거린다.


「괜찮아요. 먹을게요, 저기...... 먹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직접, 제 손을 쓴다...... 는 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식사예절을 배워서......」

「아아, 과연. 스푼을 가져올게.」


  나나 세르게프는 현지 사람들처럼 맨손으로(당연히 손은 씻지만) 우갈리를 반죽해서 적당한 크기로 뭉쳐 먹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을 것이다.
  세리실이 말을 들어준 것이 기뻐서, 나는 스푼을 가져오기 위해 근처에 있는 부엌으로 가려고 일어선다. 그러나 그 때, 내 팔이 세리실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에 살짝 잡혔다.


「아, 저기! 할 수 있으면, 아키라 선배가 반죽해주신 걸 먹고 싶은데요! 그게, 역시 손으로 반죽하는 편이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도 맛있을 테고......」

「그럴까? 스푼으로도 그다지 차이는」

「아뇨, 훨씬 맛있을 것 같아요!」

「아아...... 그래?」


  모처럼 세리실이 타협해줬는데, 여기서 토라지게 하는 것도 좀 그렇다. 나는 테이블에 다시 앉아서, 오른손을 물 티슈로 꼼꼼히 닦는다.
  그리고, 눈앞에 담긴 접시에서 우갈리를 건져, 스시의 샤리만한 크기로 뭉치기 시작한다.


「이 정도 크기라면 포크로 찍을 수 있고, 먹기 쉽겠지?」

「네, 감사합니다. 아키라 선배」


  환하게 미소 짓는 세리실의 접시로, 재빨리 만 우갈리를 몇 개씩 늘어놓아간다. 조금 전까지의 완고함이 거짓말처럼, 어딘가 즐거운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 조금 허둥지둥할 정도로 아름다운 표정.
  그 미소, 아니...... 이곳의 분위기가, 나의 뇌리에 과거의 추억을, 한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아키라 선배, 무슨 일이에요!? 얼굴이 창백한데요?」

「괜찮아.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걱정스러운 듯이 일어난 세리실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아, 심호흡을 반복한다. 또렷이 되살아나는 즐거운 기억...... 그래, 그건 즐거운 기억일 텐데, 어딘가 서글퍼져서.


「정말 괜찮아요? 선배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전혀 슬프지 않아. ......즐거운 기억이야.」

「실례지만, 도저히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걱정스러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보는 그녀. 나는 마치 변명처럼,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머나먼 기억. 생명을 구하는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의사가 되는 것만이 의어머니에 대한 보답이 될 거라 믿어, 공부를 계속하던 그 무렵......


「그게...... 초등학생 때, 그래. 여름방학 전의 기억이야. 수업으로 어딘가의 시설을 견학하러 가게 돼서. 아무튼, 그 때의 나도 성격이 비뚤어진 꼬맹이었고...... 반이 모여서 집단 이동 중이었는데, 영단어장을 몰래 읽다가......」


  이런 일을 이제 와서――게다가 전혀 관계없는 세리실에게――얘기해서 어쩌자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입은 계속 제멋대로 움직여서 말을 뽑아낸다. 마치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세리실은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가파른 시골 산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주의산만이었어, 발밑의 갓길이 허물어졌는데 눈치 채지 못해서. 반에서 혼자 떨어져 행동하던 난, 발을 삐끗해서 실족했지...... 결국 정신 차렸더니 어머니 진료소에 있었어. 오른손 골절...... 지금의 지식으로 말하자면 우상완골외과골절이겠지만......」


  모호한 기억으로는, 전날까지 비가 세차게 내렸다. 상당히 깊은 산 속의 시설 근처에서 가파른 비탈길에서 떨어진 것 같다. 그 정도 상처로 끝난 건, 정말 행운이었으리라.


「그래서 식사도 하지 못해서 사쿠라가...... 아아, 그게...... 여동생 같은 소꿉친구가 간병해줬어. 조금 전 세리실에게 내가 한 것처럼, 눈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준 것을 떠올렸어. 그 때 녀석의 걱정하면서 우는 얼굴이나, 참을 수 없이 맛있었던 주먹밥의 맛, 억지로 간병되어 패닉에 빠진 일 등이 단번에 떠올라서...... 좀 그랬지.」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울어서 토끼처럼 새빨간 눈이 된 사쿠라를 보고, 무심코 웃은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사이가 좋았던 친구――초등학교 졸업 이래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칸나즈키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때가 가장...... 소꿉친구나 친구와 자주 얘기했을 무렵일 것이다. 여름 이후의 나는, 중학교 수험, 그리고 그 뒤의 공부만 보고 완전히 여유 같은 게 없었을 테니까.


「어머, 냉정한 아키라 선배에게도 그렇게 덜렁대는 과거가 있었군요. ......저기, 그런데 그 마드모아젤? 사쿠라라는 분은 그게, 저...... 지금은?」

「사쿠라? 아아...... 일본에 있어. 사정이 있어서, 입원이 좀 길긴 하지만」


  악의 없는 세리실의 말에, 두근하고 가슴 속이 쑤신다. 일본을 출발하기 직전에 본 녀석의 아름다운...... 생기 없는 인형처럼 매우 아름답게 잠자는 얼굴이, 또렷이 생각나 내 가슴을 세차게 뒤흔든다.
  입원했다...는 말에 뭔가를 알아차렸을까? 배려하는듯 상냥한 미소를 띠는 세리실.


「그건...... 빨리 좋아지기를 저도 빌게요. 사쿠라......라는 이름, 결코 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응? 그건 무슨?」


  재주 좋게 포크를 써서 우가리를 입에 옮기는 그녀에게 물어본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꿉친구, 사쿠라와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 여성에게 공통점이?


「제 이름, 할머니가 지어주신 거예요. 할머니의 고향 부근, 우에노 공원의 꽃 이름을 따서」

「그건......」


  NGO로 출발하기 직전, 도쿄의 병원. 소꿉친구가 입원한 방에서 보인 만개한 담홍색 꽃잎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네, 그래요. 사쿠라(桜)는 프랑스어로 세리실(cerisier)이라고 해요. 선배.」


  세리실의 산뜻한 미소. 그것은 어딘가...... 활짝 핀 벚꽃을 떠올려,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


  월, 화, 수 3일간 계속 내린 세찬 비가 거짓말처럼 활짝 갠 오늘, 수요일.
  하지만, 그렇게 화창한 5월 하늘과는 반대로, 우리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일단 포장되어 있지만) 어둑어둑한 산길을 걷고 있다.
  그래, 오늘은 교외 레크리에이션이라 하는 명목상 사회 시설 견학의 날. 아침부터 7km나 걸어 산속의 쓰레기 처리장을 찾아, 하루 견학하는 것이다.


「아하하, 아키라. 왜 그렇게 지친 얼굴이야. 자, 힘내봐. 걷는 건 즐겁잖아.」

「바보, 주변을 봐. 즐거워 보이는 건 너 정도밖에 없잖아? 나 참, 산길이라 빗물이 아직 남았다고. 땅이 엄청 질어, 진짜.」


  오렌지색 티셔츠에 데님 반바지, 마음에 드는 빨간 스니커즈. 산뜻한 물색 배낭을 메고 웃는 친구...... 칸나즈키 코이. 나는 그 친구에게 숨이 가쁜 채로 대답한다.
  요 며칠 계속 내린 비 때문인지, 산길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웅덩이까지 곳곳에 있어서 걷기가 매우 어렵다. 안 그래도 급경사에 어두운 산길...... 출발할 당시에는 활기찼던 동급생들도, 도착 직전인 지금은 지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으으, 다리아파. 발끝이 찡해.」

「후후, 힘내 아키라. 앞으로 조금이잖아. 잡아당겨줄까? 아하하」

「잘도 말한다.」


  내가 입은 흰색 티셔츠 소매를 놀리듯이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는 코이. 정말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여유작작한 표정.
  주위를 보면 아직 여력이 있는 느낌인 학생은 평소에 운동하는 코이 같은 사람들 뿐.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도 7km나 계속 걷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역시, 육상으로 바보처럼 달리는 게 일과인 친구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반이라 옆에서 걷는 코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빈도로 말을 건다...... 싱글벙글 미소 짓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한 명 더. 여유가 듬뿍이란 느낌으로 걷는 학생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릴 적부터 무도로 단련된 공주님......


「히이라기 군? 칸나즈키 군과 쓸데없는 말을 계속 할 틈이 있으면, 좀 더 빠릿하게 굴어주지 않겠어? 내 눈앞에서 러브...... 질질 걷는 것! 같은 반으로서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신에자키의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 차가운......목소리가 등 뒤에서 퍼진다. 평소의 블레이저 코트가 아니고, 데님 미니스커트에 프릴이 달린 흰 셔츠, 검은 스니커즈, 흑발에 빨간 카츄샤를 단 스타일. 등에 맨 큰 배낭에는,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공주가 아니라 여왕님이구만.」

「히이라기 군!? 뭐라고 했니?」


  설마, 내가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나? 지그시...란 느낌으로, 코이를 밀치고 옆에 선 신에자키.
  가느다란 눈썹, 야무지고 요염한 입술, 매끈매끈한 뺨, 무서울 정도로 예쁜 얼굴...... 날카로운 눈빛으로 똑바로 흘겨본다. 도저히 초등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박력.
  모델처럼 반듯한 스타일 때문인지, 프릴이 장식된 셔츠 가슴 부분이 거북할 정도로 부풀어 보였다.


「아, 아니, 아무것도......」

「자, 잠깐. 신에자키. 아키라 옆은 나니까! 원래대로 돌아와, 줄이 흐트러지잖아.」


 뿌우....한 모습으로 볼을 부풀리며, 갈색 얼굴을 조금 붉게 물들인 코이가 큰 소리를 낸다. 신에자키에게 지지 않고, 거침없이 그녀를 밀치고 내 옆에 서는 친구.


「앗...... 어머, 칸나즈키 군. 그렇게 대열이 신경 쓰이면, 반장답게 앞에 서는 게 어때? 나는 이 단정치 못한 히이라기 군을 지도할 테니까.」

「......뭣」


  핑크색 입술은 활짝 미소 짓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신에자키. 코이에게 밀쳐진 곳――즉 내 옆――에 가늘고 긴 발을 뻗어, 슥....하고 비집고 들어온다. 그 동작은 무도를 오랫동안 단련했다는 소문대로, 헛된 동작이 전혀 없이 자연스러웠다.
  코이보다 큰 키, 날씬하고 긴 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찰랑찰랑한 흑발을 귀로 쓸어 올리며, 이런이런......하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아, 아키라! 가만있지 말고 아키라도 말해봐. 응? 응? 내 옆에 있는 쪽이 기운이 나서 빠릿하지? 그치?! 그런걸!」

「어머, 히이라기 군 같은 유형은 따끔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어요. 저라도 실은 옆에는 서고 싶지 않아요. 단지, 터무니없이 칠칠치 못해서 같은 반으로서 할 수 없이. 그렇지? 히이라기 군? 너도 그렇게 자각하고 있지?」


  내 오른쪽에는 신에자키. 그리고 왼쪽에는 친구인 코이가 서서, 거의 동시에 말을 건다.


「아......저기, 아니, 그게......」

「보렴, 그 야무지지 못한 대답. 정말 이러니까.」

「으으으, 아키라! 아키라가 공주한테 확 말해보라구.」


  ――내가 뭔가 나쁜 짓이라도 했던 걸까? 안 그래도 장거리를 걸어서 다리가 아프고, 몸은 피로에 쩔고. 그런데도 이 상황...... 뭔가 탈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적 피로로, 어깨에 맨 가방――안에 든 것은, 사쿠라가 만들어 준 도시락, 물통, 과자, 그리고 후교시에서 구입한 자칭 서바이벌 상품이 들어있다――이 꽉하고 어깨에 먹혀든 생각마저 든다.


「큭, 이쪽은 너덜너덜 다리가 아파서 못 참겠는데...... 어째서 둘 다 그렇게 건강한 거야.」


  어느 쪽이 잘했나 못했나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말을 거는 코이나 자세를 주의하는 신에자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건강한 둘을 동시에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말을 거는 두 명에게서 도망치듯 조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나는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그저 기계적으로 걸으려다가......


「――으앗!?」


  아주 조금――불과 5cm정도――지만 무너져 함몰한 부분에 우연히, 왼발을 헛디딘 나. 균형이 무너진 순간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게 오른쪽 다리 위치를 밟아서 맞추려고....했지만, 거기에 물에 젖은 나뭇가지가 있어서,

  ――빠직, 하는 불길한 소리와 동시에 발밑의 나뭇가지가 꺾여, 내 몸은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길 아래의 급경사면이 똑똑히 보인다. 초록색 풀이 무성한 산의 표면, 끝없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각도. 휘청휘청하고 내 양손이 잡을 것을 찾아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헤매고......


「아키라!」

「히이라기 군!」


  내 몸, 그리고 양팔이 굳건하게 꽉 잡혀 있었다. 중심을 낮춘 태클 같은 자세로, 안전한 방향으로 밀어 넘어뜨리듯이 부딪혀온 사람은 코이. 평소의 귀여운 얼굴이 아니라, 타오르듯 예리한 눈동자.
  양팔을 꽉 잡아준 사람은 신에자키. 미니스커트 안에서 맨다리를 뻗어 슥.....하고 땅을 힘껏 밟는다. 찰랑찰랑한 긴 흑발을 나부끼며, 합기도처럼 묘한 중심 이동으로 내 몸을 안전한 방향으로 비껴주었다.


「괜찮아?! 아키라!」

「히이라기 군!, 상처는 없어?!」


  털썩하고 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 허리에 매달린 친구, 팔을 잡은 신에자키가 동시에 말을 건다.
  두 명의 진지한 목소리, 강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공포로 혼란에 빠질 것 같았던 마음을 달래간다.


「아......으, 응. 고, 고마워. 코이, 신에자키, 살아났어......」


  그렇게 흔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순간, 눈에 비친 경사면이 되살아난다. 저런 경사에서, 균형을 잃은 내가 그대로 굴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이 좋아도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아니,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우으으으으읏, 바보 아키라!! 진짜, 진짜, 진짜아아, 저어얼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

「――읏, 히이라기 군? 내 반에서 부상자 같은 게 나오면 엄청난 웃음거리야. 정말로 당신이란 사람은! 비틀거리지 않게 확실히 감시할 테니까!」


  코이의 반 울 것 같은 얼굴, 신에자키의――화내고 있겠지――붉게 물든 뺨. 전부 거절할 수도 없고, 고분고분하게 끄덕인다.


「자, 잘 부탁합니다......」


  일어나서 어깨에 짐을 다시 메고, 나는 다시 걸어나갔다. 양 옆을 코이와 신에자키에게 끼여 마치 연행되는 범인처럼.


 ◆◆◆


  겨우 시설에 도착, 긴 휴식을 취한 뒤 간단하게 첫 견학을 했다. 그걸로 오전은 끝. 기다리고 기다린 점심식사 시간.
  그토록 기진맥진했던 게 거짓말처럼, 모두 들떠서 친구와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아키라, 그 튀김, 엄청 맛있을 것 같아. 으으......좋겠다.」

「나 참, 먹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자, 좋을 대로 가져가. 그 연어랑 바꿔서.」

「우응. 에헤헤, 언제나 고마워 아키라. 자 여기.」


  쓰레기 처리 시설(리사이클 센터)이라는 명칭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밝은 시설의 부지 안. 친구와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서 마주보고 앉아, 우물우물 입과 젓가락을 움직인다.
  코이의 도시락은 만들어주는 할머니의 취향이 가미되어, 야채 조림이나 생선구이를 중심으로 한 메뉴. 쌀도 현미를 넣어 실로 건강에 좋아.....보이지만, 고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게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우리들, 초등학생에게는 좀 그럴 것 같다.
  그것과는 반대로, 사쿠라가 만들어준 도시락은, 새우 필라프에 튀김, 계란말이, 양배추와 완두콩을 볶은 것, 햄과 양파로 만든 일본식 샐러드로 양이 상당했다.


「오옷, 이 계란말이. 안에 치즈랑 참치가 들어있어. 사쿠라 녀석, 아무리 그래도 칼로리 너무 많잖아. ......아무튼, 맛있긴 하지만.」

「헤에, 도시락 사쿠라가 만들어줬어? 흐응, 당연히 호화롭겠네.」


  밝은 5월의 햇볕을 쬐며 먹는 도시락은 매우 맛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도, 햇볕에 탄 갈색 얼굴로 활짝 미소 지으며, 우물우물하고 볼이 미어지게 밥을 먹고 있다.


「아니, 녀석의 취미일 뿐이야. 돌아가면 빠짐없이 감상을 말해야 한다니까? 못견뎌난다고.」

「아하하, 사쿠라는 귀여운 데가 있구나.」

「어디가 귀엽다는 거야.」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얘기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데, 밖에서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 정말 즐겁다. 햇볕은 따스하고, 풍경은 산속이라는 이유도 있어 신록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귀가하는 것도 7km 걸어간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고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동급생들도, 사이가 좋은 친구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는 모습.
  그런데 거기에......


「앗, 칸나즈키 군, 히이라기 군도. 찾고 있었어. 있잖아, 공주...... 신에자키 못봤어?」

「아, 사이도 시바. 공주? 난 못봤는데...... 아키라는 봤어?」

「아니. 평소에 같이 있던 사람들하고 있는 거 아냐?」


  흑발을 땋아 내린 머리에 안경을 쓴, 그야말로 성실할 것 같은 학생――옆 반의 반장, 사이도 시바가 말을 걸었다.
  약간 부드러운 체형에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그게 아니더라구, 어디에도 없어. 설마 돌아간 게 아닐까? 이래서 고집불통 아가씨는 곤란해.」


  아버지가 소방대원, 몇 년 전에 이 마을에 부임했을 때, 가족과 함께 이사 온 사이도 시바는 이른바 『타지 사람』이다. 하지만 매우 성실하고 착실, 그리고 표리 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하지만, 그래서 신에자키를 정점으로 한 그룹과는 좀 사이가 나쁘......다고 할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상태. 사이도 시바는 신에자키가도, 신에자키가를 추종하는 주변 친척들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


「아 됐어...... 칸나즈키 군이랑 히이라기 군. 공주와 같은 반이지? 혹시 보이면 선생님이 부른다고 전해줄래?」

「응, 알았어.」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사이도 시바. 그 야무진 뒷모습을 배웅한 뒤, 나는 코이와 다시 얼굴을 마주본다.


「흐음, 선생님이 부른다라...... 아, 맞아! 선생님 말로는, 여기에도 수상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 같다고, 아까 얘기했어. 전에는 학교였고, 으으.... 좀 무섭네.」

「수상한 사람이라니...... 그거, 전교조회에서 주의 받은 사람이지?」

「응, 맞아. 아하하, 아키라치고는 드물게 기억하고 있었네. 좀 의외.」

「시꺼」


  코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학교 도서관 창문으로 본 신에자키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찾는 듯 여유가 없는, 마치 미아 같았던 공주의 분위기.


「아무튼 무서운 얘기는 놔두고, 공주. 어디 갔을까. 아까 전에는 즐겁게 보였는데...... 스트레스려나? 엄마가 재혼한다 해서 지금 집이 큰일인 것 같던걸. 공주의 생일파티 준비도, 여러 가지로 문제뿐이라는 소문이고」

「헤에...... 생일파티」


  코이의 얘기에 거의 건성으로 대답.
  머리에 신에자키의 여러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학교 체육관 근처에서 만났을 때, 도서관에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화났던 표정. 그리고......아버지에 대해서 말해줬을 때의 자랑스러운 듯한, 정말로 기쁜 듯한 미소.


「......」

「아키라, 듣고 있어?」


  머리 깊숙한 곳에서, 뭔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맥박 쳐, 온몸에 불타는 듯한 혈액이 흘러든다. 신경이 한계까지 팽팽해진 활처럼 긴장되어 간다. 그것은 마치 전쟁하러 가기 직전의 전사.


  ――움직여라, 손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자, 잠깐 아키라? 괜찮아?!」


  눈앞에 있는 생명을 구하고 싶다, 불합리한 슬픔을 아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바라기 때문이야말로. 『나(オレ)』는...... 그리고 『나(ボク)』는.


「코이, 잠깐 미안.」

「아키라!? 잠ㄲ, 도시락 둔 채로 어딜 가는 거야!?」


  전에 산 서바이벌 상품을 담은 가방만을 들어, 코이의 놀란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달린다. 다리가 가는 방향, 그것은 몸이 알아서 정해주었다.
  뇌리에 풍경이 떠오른다. 그것은 경험한 적이 없는 기억. 마치 내가 체험한 것처럼, 또렷하고 세부까지 현실적이다.

  ――오른 팔이 골절된 데다가 온몸에 강한 타박상을 입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 누워있다. 바로 옆에는 사쿠라, 그리고 친구인 코이가 있고, 이것저것 말을 걸고 있었다.


『정말, 바보 아키라. 신에자키가 예전에 아빠랑 자주 캠프하러 온 산이 아니었으면, 구조하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라. 진짜...... 공주한테 고맙다고 해. 정말이지, 이럴 거면 억지로라도 같은 반에 넣었어야 했어!』

『맞아요, 오빤 바보. 등산하면서 단어장을 읽다니......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와.』


  하얀 병실 안, 침대에서 도망쳐서 숨을 수 없는 나를, 이때라는 듯이 꾸짖는 두 명. 화난 듯, 안심한 듯 복잡한 표정.


『10미터 이상 실족했었으니까. 나,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가서. 그 때 공주가, 그 위치――아키라가 떨어진 곳――라면, 처리장 옆의 좁은 곁길을 더듬으면 갈 수 있다고 선생님한테 말해서......』


  ――이건 결코 『나(ボク)』의 기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オレ)』의 추억일 것이다. 어째서 지금, 이런 게 멋대로 떠오르는 거지? 그건 어떻든 상관없다.
  단지 그 기억에 이끌리듯이 나는 달려서, 리사이클 센터 옆, 좁은 곁길로 들어가, 앞을 향해 나아간다.


「신에자키!!」


  거기서 나는 그녀를 발견한다.
  이마에서 흐르는 새빨간 피.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지면에 누워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