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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19 ~그리하여 세 명은 시작한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동아리에 가지 않을 것을 유이가하마에게 전하고 빨리 귀가한다. 코마치는 어디 놀러가기라도 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던지고 침대 위에서 천장을 보며 쓰러진다.

  동아리에 가지 않았던 건 뭔가 볼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밖은 아직 밝지만 리모콘으로 형광등을 켠다.

  몇 줄기인가 창백한 빛이 흔들흔들 나부끼는 광경을 보며 머릿속을 정리한다.

  딱히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내일일지 모레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까운 시일 내에 키리바나와는 만나게 될 거다. 만약 키리바나가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내가 뭔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대로의 관계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만났을 때 무시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멋대로인 말을 상당히 많이 했으니 그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싫다. 그 녀석은 분명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건 싫다.

  따라서 생각한다. 다음에 키리바나와 만날 때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서 제대로 행동한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나와 키리바나의 인식의 차이다. 나는 키리바나가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겼으면 하고, 키리바나는 그렇게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와 키리바나 어느 쪽이 올바른지는 모른다. 자신 있게 정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는 주변에 친구가 없었고 싸워서 헤어진 적도 없다.

  자기 자신이 모르는 것을 분명 좋을 거라고 말하며 타인에게 강요했던 거다.

  애초에 이상을 강요하는 것만으로도 안 되는데, 게다가 한층 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좀 더 설득력을 실어야만 했다. 그 노력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나답게, 그리고 나라서 할 수 있는 형태로 전하자.

  ......그렇다면, 왜 나는 키리바나가 외롭다고 생각하기를 바랐을까? 아니 틀리다, 난 키리바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키리바나와 만났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이어서 키리바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의 키리바나의 표정, 그리고 바로 지난  번의 키리바나의 표정.

  그것들을 다시 떠올릴 때 가슴 깊숙한 곳이 아파진다. 달콤 씁쓰레함이 입 안에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로지 생각했다.

  창백한 빛과 벌꿀 색 석양이 복잡하게 서로 섞여, 그리고 석양이 사라져갈 무렵에 겨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생각난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진부하고 어디에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분명 내 대답이리라.

  그렇게 겨우 다다랐을 때, 두 소녀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불과 두 달 정도 알고 지낸 사이이자, 동아리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닌 둘. 하지만 그 둘에게는 반드시 가장 먼저, 말해야만 하겠지.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까......


―――――――


「아, 힛키......」

「어머, 오늘은 왔구나. 히키가야」


  심호흡을 하고 힘껏 문을 열자,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눈에 들어왔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교실에서 구구하게 할 말을 음미하고 있었더니 동아리에 가는 게 꽤나 늦어지고 말았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점점 요란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정 위치에 허리를 내렸다.

  평소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이곳은 4월에 비하면 상당히 따듯해졌다. 아직도 교복이 바뀌지 않아서, 동복인 우리들에게는 약간 더울 정도다.


「그래서 카와사키 군의 건은 어떻게 됐니?」


  유키노시타의 말로 입 안에 쌓였던 것이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타이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까먹었다. 어제는 그대로 돌아갔고 선배는 선배대로 말을 안 하면 보고하지 않을 테니, 얘네들이 몰랐던 건가.


「타이시는 차였다. 선배가 말하기를 사귀기에는 좀 레벨이 부족하대.」

「그래. 그렇다면 카와사키 군에게도 한 번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겠구나. 이대로 의뢰를 계속할지 어떻게 할지를 확인해야지.」

「그러고 보면 그런가. 아무튼, 포기할지 어떻게 할지는 그 녀석의 마음 나름이겠지.」

「그러네......」


  한 번 크게 숨을 내쉰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긴 말이다.


「두 가지,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이야? 힛키,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진지한 표정인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같은 동아리, 그리고 반 친구인 것도 관계없다.
 다만 순수하게, 히키가야 하치만 개인으로서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무섭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건 상대방에게 부정될지도 모른다는 의미니까.


「......뭐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춘 유키노시타는 내려뜨린 시선을 든다. 유이가하마도 나를 향해서 의자를 돌리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키리바나를 좋아해. 아마, 오래 전부터」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한다. 말로 꺼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잘 와 닿았다.


「......그걸, 우리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니?」


  유키노시타는 깨끗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유이가하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유이가하마가 내게 어떤 감정을 향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을,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판단하기에 내 인생경험은 짧고, 거기에 반비례해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왠지 모르게 상상은 했었지만, 유이가하마의 상냥함을 사춘기 남자 특유의 과도한 자의식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착각이라면 그걸로 좋다. 내가 멋대로 들떴을 뿐이라면, 그저 부끄러울 뿐이며 청춘의 실패로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만약 유이가하마의 마음이 내 상상대로였을 경우 역시 결말은 지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단순한 자기만족에 유이가하마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해두고 싶다.


「필요한지 어떤지는 몰라, 그래도 말해두고 싶었어.」


  유이가하마는 그 작은 손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조금 밖에 안 보이지만 머리카락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잠시 침묵한 뒤, 얼굴을 든 유이가하마는 괴로워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내게 묻는다.


「......알았어. 그도 그럴게 힛키, 아카네하고만 거리가 가깝고, 자연스럽게 눈길을 주고 있던걸. ......그래도, 왜 지금, 그런 말을 해?」

「결말을 짓고 싶었어. 여러 가지를 다시 보고, 다시 하고 싶어졌어.」


  누군가에게 이상을 거듭해서 강요하는 건 필연이라고 이즈에 선배는 말했다. 그렇게 함에 따라 엇갈리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을 잊었다.

  이상을 강요해도 좋은 사람은, 이상을 좇아서 노력하는 사람뿐이다.

  선배는 자신이 원해서 노력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건데?」

「그게 두 번째 이야기가 되는데......」


  준비했던 말이 갑자기 끊어진다. 심장 소리가 둘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그리고 자신을 상처 입힐 것 같이 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아아, 역시 무서운 거다. 거절되는 것이, 미움 받는 것이. 대다수 사람에게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것이 막상 친한 사람이 되면 칼날이 예리해진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짜낸다. 비록 고통을 느껴도, 미움 받을지 몰라도 내가 바라는 것이기에.


「.....유이가하마, 그리고 유키노시타. 나와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어?」


  키리바나가 변하길 바란다면, 나도 조금은 변하자.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다고 조르자. 이곳은 긴장이 풀어져서 잠들 정도로 기분이 좋다, 그러니 제대로 말로 해서 부탁한다.

  시야가 흐늘흐늘 흔들린다. 앉아있는데 평행감각이 출렁거리고, 세상이 천천히 돌고 있다. 그럼에도 두 명의 시선이 꽂힌다.


「......치사해. 힛키. 그런 식으로 듣고 싶은 말이랑 듣기 싫은 말을 같이 말하다니. 너무 제멋대로야.」

「......미안」


  얼마동안의 정적. 하지만 내게는 끝없는 침묵이 찾아온다.

  아아, 나는 정말로 제멋대로다. 유이가하마의 마음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부터 유이가하마의 입에서 나올 말을 상상하면, 굉장히 무섭다. 완전히 자업자득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말로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그린 말은 내려오지 않는다.

  유이가하마는 끼익하고 의자를 내 쪽으로 한 걸음 정도 당기고는 어색하지만, 그런데도 진정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뻐지잖아.」

「...............」


  유이가하마는 또 의자를 한 걸음 당겼다.


「하나만 부탁이 있어.」

「될 수 있는 한 하기 쉬운 걸로 부탁해.」

「......제대로, 아카네한테 고백해. 그러면 친구가 될게.」


  ......아아, 유이가하마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 혹시 다른 식으로 만났다면 반드시 좋아하게 될 정도다.


「......결과는 수시로 보고할게.」

「응, 친구니까 연애이야기 정도는 해.」


  기쁨이 점차 울컥거려 오지만, 아직 기뻐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나는 유이가하마만이 아니라, 유키노시타와도 연결되고 싶다.

  그 유키노시타는 아무 말 없이 우리들의 대화를 쭉 보고 있었다. 평소 그대로 깨끗한 표정으로, 흘러내릴 듯한 흑발과 도자기 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여기에서도 아름답고, 예리한 인상을 흩뿌리고 있었다.

  유이가하마와 같이 끄덕이고서는,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시선이 유키노시타를 향했다.

  유키노시타는 시선이 집중된 것이 순간 난처했는지, 조금만 위를 보고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히키가야에 대해서 몰라.」

「......그렇겠지.」


  우리들은 서로의 이름과 대략적인 성격 정도밖에 모른다. 같이 보낸 시간도 그저 약간에 불과하다.


「유키농......」


  유이가하마가 슬픈 듯이 말한다.

  역시 이것만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불과 두 달 이내에 친구가 되어주는 유이가하마가 특출 나게 좋은 사람이며, 유키노시타가 보통이다. 오히려 평소 하던 독설을 받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좋은 편에 들어가겠지.


「그러니, 알게 되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 여기에서 너의 친구가 되는 건 할 수 없지만, 서로를 확실히 알고 나서 쌓아가자.」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제대로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 뒤를 생각해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기뻤다.


「아아, 잘 부탁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 나는 큰 한 발짝을 내디뎠다.

  모르는 것을 찾으러 가자. 어슴푸레해서 지금까지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 기쁨을, 감사를, 제대로 이해해서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좋겠다.


「그럼, 가볼까?」


  내가 그런 감상에 잠겨있는데,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간다니 어디를?」

「찻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이야. 저기라면 고등학생은 10시까지 있을 수 있잖니? 우리들 전원이 서로에 대해서 얘기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그렇지? 유이가하마」

「유키농...... 응, 그래!」


  유이가하마가, 이번에는 기쁜 듯이 말했다.

  유키노시타는 일어서서, 나와 유이가하마를 한 번 보고는 밝은 미소로 말했다.


「히키가야와 키리바나에 대해서도, 제대로 들려줬으면 해.」


  이렇게 해서 나는, 약간 씁쓰레한 뒷맛을 가슴에 남기면서도, 인생에서 첫 친구를 두 명이나 동시에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날짜가 지날 때까지 이야기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