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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화【초등학교 편⑨ 전편】

 

  ◆

  NGO의 비품인 지프 ―― 군용품 ―― 의 큰 타이어조차, 진동이 덜컹덜컹 격렬한 아프리카 길. 포장 같은 건 없는 길을, NGO캠프를 향해 계속 끝없이 달린다.
  핸들을 잡는 군 출신인 NGO 직원과 조수석에 앉은 호위는, 큰 단차를 넘을 때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스페인어로 계속 잡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험로일 것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의식하면서, 뒷좌석에 앉은 나는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본다. 바로 옆, 울다 지쳐 잠든 세리실의 손을 잡은 채.
  ――이제 곧 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을 시각, 일본에서 보기 매우 드문 광대한 평원을 본다. 우기가 끝난 직후인 이유도 있어, 지평선 여기저기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 여러 동물이 보였다.
  야생동물은 언제 봐도 아름답고 미혹이 없다. 그들은 살아간다....는 것에 거짓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만으로 가득 찬 생활을 비웃는 듯한 야생동물의 삶.
  그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생명을 보면, 의사가 하는 일은 부자연의 극치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머지않아 분명 죽을 것임에도 자원과 시간을 써서, 아주 조금 생명을 늘린다. 그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의사를 계속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실은 운명에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발버둥치고 싶다. 언젠가, 반드시 나아지기를 빌면서.
  ――나는 바보니까, 그런 삶의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을 것이다.


「......선배」


  갑자기 옆에서 뒤척이고는, 프랑스어로 작게 속삭이는 조수. 상복...... 검은 정장을 입고, 금발을 정리한 모습. 날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몹시 운 탓인지, 평소보다 외로운 것 같았다.
  잡은 내 손에 살짝 힘을 쥐고, 핼쑥한 얼굴인 채 참회하는 듯 작은 소리로.


「세리실, 일어났어?」

「미안해요. 선배가 와주셨는데...... 저만 자버려서......」

「아니, 신경 쓰지 마. 조금은 진정됐어?」


  끄덕......하고 천천히 단정한 얼굴을 숙이는 세리실. 그러나 눈물 자취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선명히 남아있다.


「네......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약 4시간 전, 나와 세리실은 그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카톨릭―― 신자가 많다. 소녀의 부모님도 독실한 카톨릭이기 때문에, 교구 사제의 의식으로 장례식이 행해졌다.
  작열하는 햇볕 아래, 순백이어야 할 옷은 가난으로 조금 더러워져 있고, 사망자를 애도하는 헌화도 적다. 생전의 초상화나 사진 같은 건 없고, 참석한 유족이나 친척의 옷도 결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관계없다. 유족의 무념, 슬픔, 분함, 애석한 마음은 세계 어디에 있는 것이나 같다. 빈부, 인종 같은 건 관계없이 참석한 전원이 소녀를 잃어버린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성가가 선명히 되살아난다. 사망자를 애도하는 선율. 적어도 편히 잠들 수 있기를, 하는 소원과 기원을 담은 노래.


「신경 쓰지 마」


  장례식이 끝나고 차에 탈 때까지, 세리실은 다부지게 행동했다. 유족과 이야기할 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그녀는 쓰러져 울었다. 내 손에 매달리듯 잡고, 울고, 울어...... 자신을 탓하고. 하지만 자신을 탓해봤자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또 울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울다 지쳐 잘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제 미팅에서 치프 세르게프가 나와 세리실은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이렇게 말한 진심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슬픔은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수많은 환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족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선배...... 저, 엄청 제멋대로인 애였어요.」

「응?」


  얼굴을 숙인 채, 불쑥..... 프랑스어를 흘리는 세리실. 변함없이 덜컹덜컹 아래위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차 안. 내 손을 잡으며, 조수는 천천히 말을 계속한다.
  차창 밖에서는 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고 있고, 새빨간 저녁노을이 보였다.


「엄마는 패션 디자이너에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그걸 닮았겠죠...... 교회에도 별로 안 갔고. 막내에다가 아빠도 저한테는 물렀어요. 우연히 공부를 잘하는 것만으로, 가사는 한 번도 도운 적 없었고요. 주변에 대한 감사는 모르는 채...... 정말, 대체 뭘 했었던 건지......」

「......아니. 나도 비슷해. 공부만으로 아무것도 몰랐어.」


   조금씩 그리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어렸을 적 이야기, 주니어 스쿨에서의 사건. 친구, 부모님과 싸운 일. 부모님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던 기쁨과 선물이 기대에 못 미처 화낸 일.
  어느 것도 하잘 것 없는 과거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녀가 경험할 일은 결코 없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계속될 예정이었던 인생이 아무 자비 없이 갑자기 끊어져, 두 번 다시 누리게 될 가능성은 없다.


「선배...... 저, 앞으로도 의사를 계속할 거예요. 그 애 같은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게요. 아무리 울어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걸 싫어질 만큼 알았어요.」

「그런가.」

「......네」


  이야기의 마지막, 매듭짓듯 세리실은 그렇게 말했다. 작지만, 힘이 조금 돌아온 듯 야무진 목소리.
  꼬옥.....하고 내 손을 살짝 쥔 조수. 그 얼굴은 가라앉아가는 석양에 비춰져 붉고......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

  신에자키의 파티 이후 몇 주가 지난 6월 중순. 관동 서북부에 위치한, 우리들이 사는 마을에도 점점 더운 날이 많아졌다. 나무들이 무성한 산은, 초여름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짙은 녹색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지겨울 정도로 바삐 매미 울음소리가 울린다.
  그렇다, 오늘 아침도 여름더위를 예감시키는 날씨였다. 모처럼의 토요일...... 학교는 휴일인데.


「오빠, 일어나! 좋은 날씨라구.」

「......으음, 사쿠라? 어라, 왜 여기에?」

「안녕, 오빠. 엄마가 바래다줬어.」


  2층 침대 위에서, 어젯밤에는 없었던 소꿉친구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아직 반은 자는 듯한 느낌으로, 머리 안쪽이 찡하고 무겁다. 몸도 어쩐지 약간 나른하고, 전형적인 수면부족.
  왜 그러냐면 요즘, 주말마다 신에자키와 둘이서 읍립 도서관에 가서, 의학서를 빌리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쿠라가 친가로 돌아가 조용한 금요일 밤, 마음껏 밤새우며 의학책 읽기에 빠지는, 그런 생활 패턴. 그래서 매주 토요일 아침, 기상시각은 10시 정도인데......
  활기찬 발소리, 그리고 2층 침대 아래에서 울리는 소꿉친구의 목소리에, 기지개를 켜면서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그보다 지금 몇 시?」

「응? 벌써 8시인데. 자, 놀러가자.」


  졸려 보이는 내 목소리 따윈 개의치 않고, 침대 계단을 올라와서 불쑥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쿠라. 생긋 웃는 그 얼굴......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거겠지. 나는 조금 졸린 것을 참으며, 말없이 목을 기울여 이야기를 재촉한다.
  계단을 다 올라, 푹하고 당연한 듯 기세 좋게 내 옆에 눕는다. 이 녀석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겠지. 핑크색 파자마 차림인 채였다. 왠지 모르게 레몬과 비슷한 상쾌하고 달콤한 머리카락 향기가 감돌....지만, 솔직히 숨 막힐 듯 덥다.
  소꿉친구의 아침 흑발이, 찰랑찰랑 내게 휘감아든다. 생긋 미소를 띠며 탓탓하고 침대에서 양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


「있잖아 어제 아빠가, 후교에서 오늘 오픈하는 수영장 티켓을 가져왔어. 그래서, 오빠도 어떨까 해서」

「수영장?」

「응, 가자! 좀 있으면 학교에서도 수영장 열 거잖아? 좋은 연습이 될 거야. 여러 가지 놀 거리가 있다는 말도 들었고. 응? 괜찮지?」


  푹푹하고 내 볼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누르며, 싱글벙글 미소 짓는 소꿉친구. 확실히 얘는 수영을 아주 좋아해서, 작년에도 수영장에 같이 엄청 많이 간 기억이 있다. 그래, 워터 슬라이더를 매우 좋다하던 것 같다. 뭐, 혼자서는 무섭다고 해서 항상 내가 붙어가는 거지만......


「아 진짜, 그렇게 들러붙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다니까. 더우니까 떨어져.」
 
「히힛,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나 참, 아저씨랑 아주머니 허락은 받은 거지?」


  덥다고 했는데, 짓궂게도 목에 달라붙는 사쿠라를 무시하면서, 아이구하며 몸을 일으킨다. 몸이 조금 무겁고, 머리 안쪽이 멍했다. 하지만 물에 들어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머리가 텅 빌 때까지 몸을 움직이고 싶다.


「우응, 아빠는 좀 삐졌지만. 히히, 잘 됐네! 그럼 집에 돌아가서, 바로 준비해올 거니까, 오빠도 부탁해!」

「그래그래」

「9시 20분 전철이야! 역에서 약속이야」


  폴짝하고 기세 좋게 침대 계단을 내려가는 소꿉친구를 배웅한 뒤, 나도 침대에서 내려선다. 몇 번이나 하품을 하며, 옷장에 가서 깊숙이 넣어둔 수영복을 찾는다.


「수영장인가...... 그래, 수영장이라면」


  수영 가방에서 겨우 찾아낸 수영복, 모자를 담으며 머리 한 구석에서 멍하니 친구를 떠올린다. 반장이기도 한 친구, 칸나즈키 코이. 건강하게 밝은 다갈색으로 탄 피부, 동그랗고 큰 눈동자, 부드럽고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 천진난만한 미소.
  육상, 그리고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는 코이는 하지만, 뭔가 신체적인 이유가 있어――소문으로는 귀인 것 같다――수영 시간은 매년 견학하고 있었다. 허가를 맡은 것 같아,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외로운 것 같았지」


  체육복인 채 그늘에서, 우두커니...... 우리들이 수영장에 들어간 모습을 견학하고 있던 코이. 가끔 눈이 마주치면, 햇볕에 탄 밝은 다갈색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을 붕붕 흔들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도, 견학이 확실하려나 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난다. 그래, 얼굴을 물에 담가 헤엄쳐야만 하는 학교 수영장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물가에서 다리를 담그는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야 나나 사쿠라 같이 마음껏 놀 수는 없지만, 조금은 기분이 나지 않을까?


「코이도 권해볼까?」


  문제는 티켓 장수. 사쿠라는 오늘, 후교에 오픈하는 시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 티켓 장수도 인원수에 맞춰서 밖에 없을 것이다. 뭐, 밑져야 본전이고 사쿠라 집에 전화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다.
  짐을 수영 가방에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습관이 된 서바이벌 가방――최근에는 아무 도움도 안됐지만, 들고 가지 않으면 초조하다――을 어깨에 메었다. 그대로 기지개를 켜면서, 터버터벅 전화기가 있는 1층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없던 때 거실에서 타이밍 좋게 전화가 울렸다.


「우왓, 아...... 네, 여보세요. 히이라기인데요.」

「꺅, 받는 게 빨라. 정말, 난데」

「어.....!? 공ㅈ, 아, 신에자키?!」


  수화기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내심 놀라며 대답한다. 잘못 들을 리 없는, 쌀쌀맞고 냉정 침착한 목소리. 수화기 저편에서조차 위압감이 전해진다.


「저기...... 오늘 말인데, 신에자키가에 관련된 시설이 후교에서 오픈해. 그래서 히이라기 군 같이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쓰게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가엾게 생각해서. 그......우, 우연히야, 나도 한가하고」

「뭐!?」


  굉장히 빠른 말, 그리고 화났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말투. 공주의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등에 축축한 땀이 흐른다. 이건...... 혹시 사쿠라가 말했던 수영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완전 다른 시설?
  뭐 어느 쪽이든 사쿠라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거절해야 한다......고, 입을 열려 했을 때, 번뜩였다. 만약, 신에자키가 말하는 시설이 수영장이라면......


「혹시, 그 시설이라는 게 수영장이야?」

「응, 그래. 그래서, 어때? 빨리 대답을......」

「거기 말인데, 혹시 신에자키라면 얼굴 패스로 들여보내주거나 하는 거야? 그...... 관계자용 입구 같은 데로.」

「......읏, 그래. 그래서 어떤데?」


  몇 분 후, 화나 보이는 공주와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잘 끝내고 혼자서 내 발상에 감탄하고 있었다. 후우....하고 기합을 넣듯 숨을 내쉰 뒤, 서둘러 코이 집에 전화를 건다.
  오늘 더운 휴일, 즐겁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약속....... 언제 찾아가도 완전히 똑같게 보이는 마을 역.
  계절과 함께 변해가는 것은 주변 풍경뿐...... 선명한 초록 가로수에는 많은 매미가 앉아, 바삐 울고 있다. 역의 주륜장에 세워져 있는 많은 자전거. 금속 부분에서 반사되는 일광은 반짝반짝 눈부셔서, 오늘 더위를 직감하게 했다.
  그렇다, 오늘은 더울... 터인데, 나는 오싹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낀다. 역 대합실의 좁은 공간, 그곳은 마치 마경 같이......


「안녕하세요, 신에자키 선배. 오빠의 친구...... 아니, 그저 아는 사람이었죠.」

「――!? 후, 후후..... 안녕 사쿠라 양. 너야말로 남매도 아닌 생판 남인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아니, 돌보기를 좋아하는 거네. 그렇게 애 같은 체형인데도 다부지게 행동하고 있구나. 정말, 유아체형인데, 그렇지......?」

「――으읏!!!」


  활짝 핀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쿠라와, 콕하고 마치 가슴을 강조하듯 당당히 서 있는 신에자키. 둘을 중심으로, 공간이 빠직빠직 얼어붙은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내 손을 잡고, 신에자키에게 경련 섞인 미소를 보이는 소꿉친구. 무릎까지 오는 밀리터리 바지, 노란 티셔츠, 그리고 마음에 드는 흰색 리본, 이런 움직이기 쉬운 대략적인 차림. 매우 활기차고 귀여운 느낌.
  반면 바로 정면에 서 있는 공주는, 프릴이 붙은 반소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나비넥타이, 빨간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부츠 이런 스타일. 약간 고스로리 같은 패션으로, 사쿠라와 달리 조금 큰 가슴도 있기 때문에, 굉장히 여자애 같은 분위기다.


「두, 둘 다 사이좋게.....」

「오빠!? 왜 신에자키 선배가 여기에 있어? 게다가 수영 가방을 들고서!」

「히이라기 군, 이건 어떻게 된 일이니? 널 가엽게 여겨 권했는데, 어째서 애 보는 사람까지......」


  미소......인데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는 소꿉친구에게, 홱! 하고 팔이 거칠게 끌려간다.
  눈앞에 선 공주는, 찌릿이라는 느낌으로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팔짱을 끼고 서서 무섭게 차가운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다.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난 단지, 모두가 함께 노는 편이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안녕, 아키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 저기, 오늘은 권해줘서..... 어어!? 왜 오늘은 단 둘이서!?」

「아, 코이」

「카, 칸나즈키 선배까지!?」

「칸나즈키 군!?」


  그 때, 뿅하는 느낌으로 친구가 역에 들어왔다. 놀란 듯한 표정으로 사쿠라와 공주를 보고서는 멍하니 입을 연다.
  옷차림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허벅지가 노출된 짧은 바지, 그리고 어깨를 크게 드러낸 검은 탱크톱. 거기에 전에 산 빨간 패션안경을 쓰고 있다. 그런 이유도 있어, 왠지 평소보다 더 미소녀 같은 느낌.
  그러나 찌릿......하는 눈동자로 키가 작은 코이는 아래에서 나를 흘겨본다. 안경 플라스틱 렌즈 너머로, 둥글둥글한 두 눈동자가 보였다.


「아, 아니...... 코이, 침착해. 왜냐면 많은 편이 즐겁잖아? 모두, 내 친구들이고. 사쿠라도, 거기에 신에자키도......」

「아니 오빠!? 난 친구가 아니야. 그래,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잖아.」

「히이라기 군, 멋대로 날 친구라고 하지 말아주겠니?」

「너무해 아키라, 난 단순한 친구가 아니잖아. 친구, 둘도 없는 친구였잖아, 바보, 바보」


  투닥투닥하고 코이한테 가볍게 가슴을 얻어맞는다. 아픔은 전혀 없지만 우으으.....라는 느낌으로 흘기는 친구의 얼굴이 괴롭다.
  사쿠라는 볼을 부풀린 채 내 팔을 아플 만큼 꽉 쥔다. 삐걱삐걱한 느낌으로 이를 악물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공주는 말없이, 그저 콕 냉철하게 팔짱을 끼고, 벌레 같은 인간을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뼈아프다...... 왠지 위가 찡 저린다.


「모두, 스, 슬슬 전철 시간이야. 아하하, 가자. 응? 오늘은 모두 즐겨야......」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전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홈으로 달린다. 뒤에서 들리는 불만스러운 소리들...... 그것을 일절 무시.
  애초에 내가 혼나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나는 신에자키에게 초대받아 뒷문으로, 사쿠라와 코이는 2장의 티켓을 써서(코이 건 원래 내 것을 유용해서) 모두가 즐겁게 놀 수 있다....는 완벽한 플랜이었는데.


「아 도망쳤어!」


  타이밍 좋게 홈에 들어온 전철에 탄다. 그 뒤를 어쩔 수 없네....라는 느낌으로, 마지못해 타는 3명. 이걸로 겨우 즐거운 시간이......하고 조금 안도한다.
  나는 서둘러 세 사람과 멀어진 자리에 앉으려고 다리를 내디딘 순간, 소꿉친구의 손에 팔이 꽉 붙들렸다.


「오빠? 모처럼이니까 후교까지의 1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다 같이 앉자구. 자리도 비어 있고 오늘, 앞으로의 예정을 묻고 싶으니까.」

「정말, 사쿠라 양이 말하는 대로란다.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네...... 아키라. 거기에 앉아....아니야! 가장 안쪽이 당연하잖아. 어떻게 할 생각인지, 빠짐없이 물을 거니까!」


  4인의 벼랑 좌석, 가장 안쪽으로 억지로 앉혀진다. 옆에 코이, 바로 정면에 사쿠라, 대각선으로는 공주. 3명의 얼어붙을 것 같은 시선이 아프다.
  창밖은 초여름답게 온통 초록이 퍼져......있건만, 여기만 전혀 다른, 극한의 툰드라 같다고 난 생각했다.


  ◆◆◆◆


  전차 안, 1시간 정도의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뒤, 어떻게든 기분이 풀어진 셋과 같이 예의 시설에 입장했다. 결국, 전원이 신에자키의 친구라는 걸로, 줄 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확실히 오늘이 오픈일이라는 것도 있어, 어느 것이나 신품. 로커도 넓고, 나는 수영장이 기대되어 후딱 갈아입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코이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갈아입지 않는다. 왠지 얼굴을 빨갛게 하고 고개를 숙일 뿐. 물어봤더니, 「배가 아파」라고 대답하고, 화장실로 갔지만......


「코이, 아직? 괜찮아?」

「으, 응. 미안, 조금만...... 응, 이제 됐어.」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겨우 나온 친구.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서 멍해지고 말았다.


「그거......」

「이, 이상해......? 쇼트 존 타입이라고 하는데...... 부탁이야, 그렇게 보지 말아줘. 썬탠 자취가 부끄러우....니까」


  우물쭈물하며 얼굴을 붉히고 내 시선을 피하듯 뒤로 도는 코이. 그 뒷모습을 놀라며 바라본다.
  수영 선수가 입는 것 같은, 상하 일체형 원피스 타입 수영복. 반들반들 광택이 있는 검은색 소재로 되어있어, 친구 몸에 딱 맞는 느낌.
  아니, 뭘 입든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드러난 몸의 라인...... 둥그스름한 가녀린 어깨, 햇볕에 그을린 가느다란 목과 팔, 그리고 등에서 허리, 다리에 걸친 라인이 어딘가 볼륨이 있어서.... 이래서야 마치.....


「아니, 이, 이상하지 않아.」

「그, 그렇게 빤히 보지 말. 수영복, 거의 입지 않으니까...... 엄청 부끄러워서」

「아아, 미안」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며,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수영 모자를 쓰는 코이. 그러나 보지 말라고는 했지만, 나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코이의 피부를 보고, 동요를 숨길 수 없다.
  호리호리한 목덜미부터, 아까 보인 등 부위――평소에는 체육복으로 가린 부분――의 피부가, 정말로 새하얘서 살결이 곱다. 어쩐지 봐서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아, 나는 가방에서 큰 타올을 꺼내 코이의 어깨에 걸쳤다.


「응? 고마워, 아키라」

「그래, 가자」


  고개를 저으며 둘이 나란히 수영장으로 향한다. 사쿠라, 신에자키와의 상의로는, 입구 근처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빠, 늦어~」

「하아...... 히이라기 군. 넌 항상 칠칠치 못하구나.」

「아......」


  반짝반짝 빛나는 수영장 수면 옆에, 사쿠라와 신에자키가 서 있었다. 소꿉친구는 학교 지정 감색 스쿨 수영복. 몹시 기대되어 견딜 수 없는지, 기운차게도 가녀린 몸으로 뿅뿅 뛰고 있다.
  그에 반해 신에자키는, 분홍과 검은 색 체크무늬 원피스 수영복. 가슴을 가리듯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가느다란 그녀의 팔만으로 가슴을 숨길 수 있을 리도 없고, 가슴골이 제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섭도록 아름답고 긴 다리 라인.


「바보 아키라! 진짜, 뭘 멍해있는 거야. 가자.」

「아, 응」


  뒤에서 코이한테 살짝 등을 맞고 둘에게 다가간다. 주변에도 다른 손님이 많아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하지만 그 소란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쿠라의 수영복 차림, 그리고 신에자키의 수영복을 정면으로 볼 수 없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엄청 답답하다.


「히이라기 군, 그리고 칸나즈키 군. 사쿠라 양에게는 이미 설명했지만, 저기 안쪽에 전용 구역이 있어. 2호실, 자유롭게 써도 되니까. 이게 열쇠......그런데 히이라기 군!? 착실히 듣고 있는 거니?」

「.......아, 응」

「오빠,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바보 아키라, 이쪽이 부끄럽다구.」


  불합리한 이유로 코이랑 사쿠라한테 찰싹찰싹 등을 얻어맞으며, 신에자키의 손으로 열쇠를 받는다. 헤엄치기 위해서인지, 긴 흑발을 위로 올려 정리한 공주.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에 닿는..... 것만으로 긴장한다.


「오빠, 우선은 슬라이더로 가자.」

「바보, 갑자기 거기냐고.」

「앗, 나도 하고 싶은데」

「침착성이 없구나.」


  소꿉친구에게 억지로 손을 이끌려, 나는 시설 전체로 눈을 돌린다. 널찍한 공간, 천장은 외광이 물에 들어올 수 있게 투명하고, 여러 개의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남국풍의 녹색 수목이 많이 심어져 있어, 공기가 매우 맑다. 풀의 종류도 폭포 같이 물이 떨어지는 것부터, 바다와 비슷한 것, 물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등등 전부 셀 수가 없다.
  안쪽은, 슬라이더 등의 여러 가지 시설이 많이 보인다. 레스토랑, 매점 등도 완비되어 있어, 코이가 좋아하는 패스트푸드점의 푸드코트까지 있었다.


「히이라기 군,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도록 해. 초대한 신에자키가의 명예가 더럽혀지니까.」

「그, 그렇게까지......」

「자, 오빠 가자」

「......그렇다 해도 차이가 너무 나잖아. 신은 참 불공평해.」


  작은 소리로 뭔가 투덜투덜하고 중얼거리는 코이. 팔을 쭉쭉 잡아당기는 사쿠라.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는 공주. 모두가 함께 슬라이더를 향해 걷는다. 많은 손님이 있다고는... 해도 입장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인지, 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대단해. 그래도 이거, 놓치면 큰일이네.」

「......있잖아, 그래서 전용 구역을 가르쳤잖니. 히이라기 군은 정말 얼빠졌구나.」

「난 오빠랑 단 둘이라도 좋은데」

「......나도」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면서, 겨우 슬라이더 시설 입구까지 도착했다. 이미 상당한 사람들이 줄 서 있어서 어쩔 수 없다...... 가장 뒷줄에 도착했다. 옆에 있는 슬라이더는 경사가 급해서, 미끄러져 떨어져가는 사람들의 절규와 환성이 울린다. 튀는 물보라가 날아와서, 그것도 매우 즐겁다.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차례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왠지 험악한 분위기였던 사쿠라와 신에자키도, 조금씩 이야기하는 것 같아,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수영 모자가 아파」라며 푸념하는 코이. 그걸 조정하려고 나는 양손으로 코이의 머리를 손대고 있었는데.....


「.......응?! 우왓!!」

「꺅, 뭐야?」

「어?」

「오빳」


  갑자기, 꾹하는 느낌으로 내 허리에 뭔가가 매달렸다. 놀라서 보니, 허리에 매달린 것은 키가 작은 금발 아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체격으로, 푸른, 마치 인형 같은 눈동자로 나를 글썽글썽 올려보고 있었다. 입가는 의지가 강한 듯 단단히 다물어져 절대로 떼어놓지 않아.....라는 느낌으로 힘을 줘 허리에 손톱을 세운다.


「아팟, 아프다니까」

「오빠, 누구?」

「미아?」

「잠깐, 무슨 일인데」


  애들도 놀라서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작은 인형 같은 소녀를 억지로 떼어놓지도 못하고, 나는 놀란 채 아픔을 참을 뿐.
  그리고 게다가......


「세리, 오오, 뭘 하는 거니? 죄송합니다, 아이가 폐를 끼쳐서」

「어? 로리스 선생님」

「응, 사쿠라 양인가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사쿠라가 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거기에는 키가 큰 어른이 서 있었다. 조금 얇은 두발, 일본인....치고는 피부가 약간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크고 높은 코. 사람이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으로, 정말 곤란한 듯한 상태로 당황하고 있다.


「아팟, 아파....근데 사쿠라, 아는 사람?」

「뭐어!? 전에 조회에서...... 진짜, 5학년 선생님이라구. 하프라고」

「아키라.......」

「증말....... 이쪽이 부끄러워져.」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노출되면서도, 나는 허리에 매달리는 소녀를 어떻게든 달랜다. 말없이 그저 응시하는 금발 소녀――세리라고 불린――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생긋 미소 짓는다. 그러나 놔주지 않는다.
  부친의 호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나만을 올려보고 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세리 짱. 저기, 좀 아픈데」

「아니야.」


  뭐가 싫었던 건지, 꼬옥하고 불만스러운 듯 손톱에 힘을 주는 소녀. 의지가 강한....게 아니고, 이건 엄청 제멋대로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뭐가 아닌데?」

「이름. 나, 세리실이라고 해. 자, 불러줘」

「세리.....실?」


  소녀에게 들은 대로, 나는 불쑥 중얼거린다. 만족했는지, 생긋 미소 지은 뒤 팔을 떼어놓는 금발의 소녀. 서양인형 같이 귀여운 얼굴,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완벽한 백인 아이다.
  처음으로 만났을 터인데, 그러나 어딘가 그립다. 세리실, 이라는 단어의 소리를 입으로 내자, 마치 익숙해진 것처럼 느꼈다.
  펄떡펄떡하고 미안하듯 달려오는 선생님, 옆에서 놀라 뭔가 말하는 사쿠라나 코이, 신에자키. 하지만 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단지 세리실이라고 자칭한 금발 소녀와 서로 마주본다. 그 푸른 눈동자 안쪽.... 뭔가, 불가사의한 빛이 보인 것 같다.



◆◆◆



  소화(昭和) 초기부터 신에자키가를 모시고 있는 일족, 스이센바라가. 그 현 필두인 미즈키 씨――엄마의 제 2 비서이자, 도서관의 사서이기도 하다――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정원에서 나간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 차를 가만히 배웅했다.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롤스로이스의 테일 램프, 그 뒷좌석에는 그가 타고 있다.
  ――히이라기 아키라. 내 첫 키스 상대.


「......바보」


  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내며, 가슴에 넘치기 시작하는 울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는다. 30분 정도 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그리고 꿈같은 행복감에 파묻혀 있었을 때를 떠올린다.
  그에게 술을 먹인 빚――그래, 사과다. 결코 저런 애한테 무릎베개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응, 그게 당연하다――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키스......를 하고 말았다.


「내, 첫 키스......」


  빨갛게 달아오른 그런 얼굴을 붕붕 흔든다. 아니, 키스는 억지로 빼앗겼다...... 그래, 그 바보가 하필이면, 이 나의 첫 키스를 빼앗았던 것이다. 결코, 내가 그에게 바친...... 적 따윈 없다.
  키스하면서 그를 꼭 껴안았을 때의, 울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마음이 가슴에 되살아나,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꼬옥 누른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너무 두근거려서, 소리치고 싶어졌기 때문에.


「저건 사고, 사고 같은 거야. 왜냐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실크에 싸인 손가락 끝으로, 살짝 내 입술 위를 덧쓴다. 그것뿐... 그저 그것뿐인데, 오싹오싹하고 온몸에 달콤한 저림이 퍼져나간다. 그의 머리가 실려 있던 허벅지, 그리고 키스만이 아니고 혀로 빨린 목덜미 등이 찡하게 달콤해서, 울고 싶어진다. 그에게 닿은 곳이 불타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래도 가슴 속은 어둡다.


「왜냐면 히이라기 군......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니까.」


  그건 당연......자업자득이라고, 가슴 속에서 짓궂은 내가 속삭인다. 나 같은 고압적인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그는 히이라기 진료소, 내 엄마가 그토록 괴롭혔던 여의사의 아들이니까.


「......」


  어째서 좀 더 솔직하게 그에게 「고마워」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의 온화한 미소를 앞에 두면, 왠지 차가운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라 온 환경의 탓?
  어릴 적부터, 주변에 이상을 꽉 눌려 온 날들. 내 주변에,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대에 응하려고, 어릴 때부터 필사적으로 가슴을 펴는 삶을 살아왔고, 눈치 챘을 때는 솔직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아빠 이외의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유일한 예외라면 사서인 미즈키 씨 정도였지만...... 그래도, 뭐든지 터놓는 건 아니다.


「왜, 이렇게 싫은 성격이 된 거지......」


  솔직해질 수 없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솔직하게 입으로 나타낼 수 없다. 그래......만족스럽게, 미소 하나를 띠는 것마저도.
  힐끔하고 본, 히이라기 군의 소꿉친구가 띠는 녹을 것 같은 미소. 거기에 칸나즈키 군의 미소, 그런 식으로 천진난만하게 웃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렇게 항상 기분 나빠 보이는 내가......


「좋아......해 줄 리가 없어.」


  넘쳐흐를 것 같은 눈물을 필사적으로 죽이고, 붉은 드레스 옷자락을 들며 소파에 앉는다. 바로 조금 전, 여기서 뒤에서 그가 꼭 껴안아줬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조금 답답했던 것과 압도적으로 감미로웠던 그 때.
  하지만..... 달콤하고, 다정했던 그 기억이,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마음에 꽂힌다.


「히이라기 군.......」


  툭.....하고 뺨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어째서 눈물이 나오는 걸까.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신에자키가의 후계자니까라고...
 

「도와줘」


  엄마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라면, 강제로 구해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버린다. 생일 파티에서 혼자 고독하게 꼼짝달싹 못하던 나에게 춤을 권해 준 것처럼.
  가슴 속, 넘쳐흐르는 욱신욱신하고 아프고 달콤한 감정. 이건 사랑, 하필이면 그를 사랑해버렸던 것.......이라는 걸 나는 분명히 자각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좋아한다고.
  ――결코 이뤄지지 않을 마음인데.


「미안해......」


  오늘 밤 파티. 많은 인사를 받으며, 그를 줄곧 보고 있었다. 회장 구석에서, 재미없는 듯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모습. 틀림없이 지내기 불편했을 것이다...... 분별없는 일족에게 험담을 받아,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예상할 수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초대하고 싶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히이라기 군에게 생일을 축하받았으면 했으니까.


「미안해.」


  나는 정말 제멋대로에 싫은 여자다. 뚝뚝하고 뺨에 눈물이 흐른다. 그 진료소에서도, 그는 계속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심술쟁이에 고집뿐.
  ――역시, 이런 나 같은 걸 그가 좋아해줄 리가 없다.


「미안, 미안해.」


  가슴에서 흘러넘치는 자기혐오. 방안에 장식된 장미――엄마가 좋아하는 꽃――가,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이 쓸데없는 허세가 신에자키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혀야 기분이 내키는 걸까?
  일찍이 의료사고를 낸 아빠의 병원. 원장으로서 책임을 지고.......그걸 갚으려고 한 아빠였지만, 그러나 신에자키가는 멋대로 실수의 은폐를 단행했다. 그런데도 혼자 힘으로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려고 한 아빠에게 엄마가 행한 것은 *이연(離縁), 추방.

※ 이연(離縁) : 부부 또는 양자의 인연을 끊음.

  전부 신에자키가의 명예 때문에. 이런 시골에서, 언제까지나 왕녀로 군림하고 싶은 엄마의 욕망.


「이런, 이런 꽃!」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며 장식된 대량의 장미에 다가간다. 내 퇴원 축하라고 준 게 분명한 이 꽃들......거기에, 생일 축하로 오늘 받은 것들. 그것들은 전부 내게 보낸 게 아닌......신에자키가 당주인 엄마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차기당주. 일찍이 붕괴한 지역 의료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아빠의 등.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의사가 되어, 머지않아 이 마을의 의사가 되는 거겠지.
  엄마의 바람대로 신에자키가의 당주로서 이 마을의 새로운 여왕이 된다. 싫은데, 그런데도 내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을 엄마는 간파하고 있다.
  ――웃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엄마의 꼭두각시. 이런 나, 미소 하나 띨 수 없는 나를, 히이라기 군이 좋아해줄 리가 없어!


「히이라기 군.......」


  격정인 채 뚝뚝 괴로운 눈물을 흘리고, 풀썩하고 융단에 무릎을 꿇는다. 이 마음, 그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독이다. 죽이자......감정을 가슴 속 깊이 가라앉히고 지금까지 대로 무뚝뚝하고 싫은 여자애로 있자. 더 이상, 그를 좋아하게 되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나는 망가지니까.


「......?」


  그 때, 눈물로 베인 시야 구석에 무언가가 비친다. 새하얀, 상장 등을 넣는 통 같은 원기둥. 붉은 리본으로 깔끔하게 묶여진 게 보였다.


「이건......혹시?」


  떨리는 손끝으로 그 통을 잡아, 천천히 끈을 푼다. 메인 붉은 리본에 붙어 있던 작은 카드. 거기에는 『생일 축하해, 히이라기 아키라』라고 쓰여 있다.
  몇 번이고 침을 삼킨다. 이렇게 좋아하게 되는 건 그만두자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내 가슴을 크게 울리는 걸까. 어째서 이렇게, 이렇게나 기쁜 걸까......


「앗......」


  간신히 꺼낸 통의 내용. 그건 새하얀 도화지에 그려진 뎃생이었다.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다......도저히 초등학생이라 생각되지 않는 정묘한 그림. 그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지금은, 거기에 그려진 게 내 마음을 흔든다.


「바보, 바봇, 이런......」


  본 적 있는 병실 침대――히이라기 진료소의 싼 침대――거기에 앉아 있는 내가 있었다. 그 때와 같은 파자마 차림으로......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미소를.


「웃고 있어...... 그림 속의 나, 나, 웃고......」


  구겨지지 않게 소중히, 무엇보다도 소중히, 도화지를 가슴에 안는다. 이렇게 상냥한 미소가 되어있었다...... 가슴에 따스한 마음이 퍼져간다. 강렬한 부끄러움과 온몸이 떨리는 기쁨.
  아아, 또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왜 저 애는 항상, 항상 날 도와주는 걸까.


「더, 좋아....하게 되잖아. 바보......」


  살짝 투덜댄다. 내일부터 분명 노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 같은 상냥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하고 굳게 바란다. 언젠가, 그렇게......그의 곁에서 상냥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마음, 가슴의 아픔과 달콤한 기쁨이 뒤섞여 온몸으로 퍼져간다.


「히이라기 군」


  살짝 중얼거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집에서 쉬는 건 오늘로 끝나고, 내일부터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또 가슴을 펴고 늠름하게 살아가자.
  앞으로도 틀림없이 노력할 수 있다. 도화지를 가슴에 안으며, 나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제 10화 【초등학교 편 ⑧보충】 춤, 그 후



  ◆



「히이라기 군, 히이라기 군도 참...... 살짝 한 장난이었는데, 이렇게 약하다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위잉~위잉~하고 머리에 직접 울린다. 몸이 뜨겁고 둥실둥실해서, 정말 기분 좋다. 나는 큰 침대 같은 소파에 드러누운 상태로 정말 즐겁다.
  거기에 엄청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감돌고 있다. 머리 밑에 있는 베개에서 올라오는 그 향기. 매끈매끈한 감촉에 부드러워서...... 어쩐지 그립다. 나는 무심결에, 고양이처럼 뺨을 베개에 부비적거리며 문지른다.


「――?! 꺄앗, 앗. 얘, 안 돼, 안된다니까. 술 먹인 건 미안해. 아, 정말 안 돼, 꺄아......으읏」


  머리 위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소리. 조금 난처해하는 것 같지만 왠지 비음이 섞인 듯, 약간 요염한 한숨. 둥실둥실한 꿈같은 기분으로 멍하니 눈을 뜬다.


「어라? 공주다. 왜 공주가?」

「잠깐, 누가 공주야? 앗, 바보. 머리를..... 우,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허벅지에 스쳐서...... 읏」


  올려다보자, 마치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신에자키의 얼굴. 조금 난처한 듯,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지만, 여전히 엄청난 미소녀라고 생각한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 섀도로 꾸민 눈동자. 흑발에 얹은 관. 귀에서 빛나는 귀걸이. 매끈매끈한 도자기 같은 피부.
  모든 것이 기적 같이 아름답다. 머리가 둥실둥실한 상태로, 그녀의 얼굴을 넋을 잃고 보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


「예쁘다...... 꿈속에서도 역시 신에자키는 엄청 미인이야.」

「――읏!? 우으읏. 바, 바보 아냐! 그, 그런 말 엄청 취했을 때 해봤자, 기, 기쁘지 않......거든. 여, 여기, 여기 보지 마」


  이것은 꿈일 거다. 시야가 흔들리는 채로,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면――그때마다 머리 위에서 「꺄앗, 읏」하고 귀여운 소리가 들리는 게 재밌다――벽 한쪽이 장미로 장식된 호화로운 방이 보인다.
  언제 잠든 거지? 춤이 끝나고, 긴장과 피로로 목이 말라 신에자키가 미소 지으며 준 주스를 마셨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것이 꿈이라 해도, 굉장히 좋은 향기에 싸이고 베개는 부드러워서 행복. 곤란한 점이라면 머리를 움직일 때 위에서 나는 공주의 소리뿐.


「꺄앗, 앗, 잠깐. 앗, 욱신욱신하.....니까......안 돼!」


  진짜 이 베개는 뭐지? 평소 쓰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다. 나는 꿈결 같은 기분으로 양손으로 베개를 쓰다듬는다. 적당히 둥그스름한 두 원기둥 쿠션이 붙은 디자인...... 거기에 스르륵 접해간다.
  팽팽하면서도 겉은 부드러운데 속은 탄력이 있다. 그래, 이렇게 손으로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을 정도다.


「......진짜, 이, 이잇, 우쭐대지 ㅁ......앗, 아, 안 돼, 더 안쪽으로 가면, ――!!」

「응? 빨간 베갯잇?」


  신에자키의 목소리를 전부 무시하면서 계속 움직이는 손가락 끝에, 갑자기 닿은 빨간 천. 수자처럼 윤기 나는 옷감에 반들반들하고 고급스런 감촉. 흐릿한 시야로 봤더니, 내 베개는 그 빨간 천속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얗고 매끈매끈한 두 베개, 그것이 빨간 천 안쪽으로.
  뭔가와 비슷하다...... 그래, 마치 허벅지같이?


「어? 이건?」

「부탁이얏, 정말로 안 돼! 그만! 앗, 들여다보면 안 돼! 보이니까, 보여버리니까아!」

「우와아아앗」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화아아악 하는 느낌으로 필사적으로 스커트를 가리던 신에자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단번에 몸을 일으킨다.
  지금가지 베개라고 여기고 멋대로 만졌던 것의 정체...... 그건, 그녀의 허벅지였어? 하고 경악하면서.


「아, 뭐 그래도.... 꿈이니까 상관없나」

「바, 바보!」


  하지만 놀랐던 것도 잠시. 결국 꿈일 뿐이니까......라고 안도하고, 나는 신에자키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도 그럴게,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 드센 공주가, 내게 무릎베개를 해줄 리 없다.
  게다가......


「앗, 자, 잠깐. 또!? 으읏, 정말!」


  풀썩하고 나는 다시 허벅지에 머리를 두려 한다. 그랬더니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신에자키는 내 머리를 양손으로 들어 허벅지로 끌어다주었다. 거기에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는 서비스까지......
  ――이것이, 꿈 말고 대체 뭐란 말인가?


「으읏...... 아, 또 손대면......응읏!?」

「아하하, 꿈속의 공주는 귀여워」


  아래서 올려다보는 신에자키의 얼굴도, 역시 엄청 예쁘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어딘가 난처해하는 표정...... 그것이 정말 순진해 보여서, 귀엽다.
  나는 어쩐지 약간 불타오른 기세에 힘입어, 그녀를 좀 더 곤란하게 해보고 싶어졌다.


「귀, 귀엽다니! 놀리지 마...... 거기에 또 공주라고, 얘, 아앗, 읏」

「왜냐면 진짜 귀여운걸. 그래도, 좀 시끄러우려나」

「――!? 아읏」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허벅지를 만진다. 그 매끈매끈한 감촉을 즐기며, 재빨리 왼손을 신에자키의 입가로 뻗었다. 다시 불평하려는 그녀의 입술로.
  내 예민한 손가락――왠지, 찡하고 감각이 달아올라서 조금 둔하지만――으로, 공주의 도톰한 입술 위를 덧쓴다.


「응응읏......」


  새침한 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역시 좀 시끄럽다. 잠깐 조용히 안 될까? 라고 생각하면서, 부드럽고 젖은 감촉의 붉은 입술을, 놀리듯 긁는다.


「......응읏, 읏」


  손가락이 입술에 닿을 때, 움찔, 움찔하고 살짝 몸을 떠는 공주.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검지손가락으로 집요하게 만져간다.
 아주 약간 자란 손톱...... 그걸로, 빨갛게 젖은 입술 끝을 스륵하고 부드럽게 문지른다. 꼬옥 단단히 다문 신에자키의 입술. 그것이 내 손가락에 반응해서, 아주 조금 힘이 풀어진다.


「후후, 역시 귀여워」

「응응읏」


  희미하게 젖고 뜨거운 입술. 폭신폭신한 감촉을 듬뿍 만끽하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이번에는 입술 전체를 손가락으로 더듬어간다. 손가락 끝이 닿을까 말까...... 빠듯한 거리로 간질이듯이.


「읏, 응, 응응읏」


  신에자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움찔움찔 몸을 떤다. 젖은 눈으로 나를 열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결코 싫어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꿈속이라 그런.... 거겠지.
  현실에서 이런 짓을 하면, 100번은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다.....기보다는, 그 공주가 이렇게 하는 대로 얌전히 당할 리가 없다.
  어쩐지, 몸이 불타듯이 뜨거워서 오싹오싹하다. 기세를 탄 나는――꿈이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천천히 일어나, 신에자키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신에자키, 계속해도 돼?」

「어? 아.......」


  입술을 어루만지며, 조롱하듯 속삭인다. 귓전까지 새빨갛게 물든 신에자키...... 글썽글썽한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보고 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일 거다.
  오른손으로 매끈매끈한 허벅지 위를 더듬으며, 왼손으로 젖은 입술 위를 덧그린다. 그렇게 하면서, 약간 심술궂은 느낌으로 귀에 대고 살짝 속삭인다. 때때로, 내 입술로 신에자키의 귓불을 머금고, 살짝 빨아들이며.


「앗, 응응응으읏........!! 응읏!」

「똑바로 들어봐. 응? 계속 이렇게 손대도 돼? 아니면 그만할까?」


  움찔하고 몸을 떨며, 비단 장갑에 싸인 손가락을 뻗어 내 셔츠에 매달리는 공주. 겨우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녀는 젖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입을 연다.


「이........ 앗..........응읏, 응, 마, 마음대로 ㅎ, 해! 응읏, 이, 변태, 앗, 앗......」


  내 손가락 끝――내가 생각하기에도 무서울 만큼 섬세하고 정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허벅지 안쪽, 아랫입술의 부드러운 부분을 매우 살짝 어루만지듯이 손대어간다. 그리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신에자키의 목덜미, 예쁘게 묶인 흑발 언저리에 입술을 댄다.
  신에자키의 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반응이 있던 곳을 집요하게, 그러나 가볍게 계속 터치한다. 그리고,


「――읏, 앗, 아앙!」

「흐음, 그래? 그럼 그만할게. 아무리 꿈이라도, 공주가 화내면 무서울 것 같고......」

「어?! 앗.....응.......우으」


  속삭인 뒤, 갑자기 손을 떼고 소파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 꾸욱......하고 살짝 잡히는 내 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신에자키가 뭔가 말하고 싶었는지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작은, 스쳐가는 소리. 눈을 돌리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식으로.


「네가, 그렇게 꼭 하고 싶다면, 계, 계속해도..... 좋아.」


  새침함, 곤란함이 섞인 표정을 띠는 공주. 왠지 매우 귀엽고 기특해서, 무심코, 짓궂은 말을 하고 말았다. 이런, 내 등, 몸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어떻게 할까?」

「......으, 으으, 이잇 심술쟁이, 변태! 으으으읏......」

「후후, 농담이야. 공주가 너무 귀여워서, 미안해」


  마치 울 것 같은 분위기였던 공주의 몸을 뒤에서 드레스와 같이 꼭 껴안는다.
  왼손을 다리, 오른쪽 검지와 엄지손가락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두고,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리고 요염한 흑발 언저리에서 대담하게 열린 등――매끈매끈하고 새하얀 피부――를 할짝......하고 혀로 핥았다.


「――――!! 응으으읏!!」


  무심코 연 입술, 순간 그 안에 놀리듯 손가락을 넣자, 대답하듯 젖은 혀로 구석구석 빠는 그녀. 내 손가락과 할짝할짝 움직이는 신에자키의 혀가 얽힌다. 매우 뜨거운 타액이 휘감기고, 쪽쪽하는 소리가 방에 울려 퍼진다.
  나도 지지 않게 목덜미에서 어깨, 등까지를 간혹, 입술로 들이마시며 혀를 쓴다. 신에자키의 몸이 움찔하고 반응하는 여러 부분, 거기를 중점적으로, 마치 개발해가는 것처럼.


「읏......응응읏, 응읏, 햐웃, 앗, 응으읏」

「공주, 귀여워...... 엄청 귀여워」

「또, 또 공주라고......앗, 앗, 앗앗, 응읏, ......아앙」


  입 안에 들어있는 내 손가락을, 살짝살짝 부드럽게 깨무는 공주. 달라붙듯 빠는 부드럽고 뜨거운 혀. 손가락 끝부터 내 몸 전체에 짜릿한 감각이 지나간다.


「히이라기 군, 히이라기 구우운! 앗, 아아앗, 히이라기 구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는 내 왼팔에, 장갑에 싸인 양손으로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롭다. 손가락을 머금은 부자유스런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안겨오는 뜨거운 몸. 그 모든 것이 몸속을 불태우고, 이상한 욕망이 생겨난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른다. 하지만, 몹시 바라는 게 있다. 나도 사정을 모르겠다......꿈, 이라서?


「히이라기 군, 앗, 아앗, 앗......하고 싶어, 하고 싶어어!」

「......응?」

「이대로, 억지로, 억지로 빼앗아......! 앗, 아앗, 내, 내 처음을, 앗, 아앙!」


  주륵...하고 타액의 투명한 선이 늘어지며, 공주의 입술에서 내 손가락이 떨어진다. 나를 돌아보고, 젖은 눈동자, 반쯤 열린 입술을 보이는 그녀. 조금 전까지 손가락이 유린했던 신에자키의 입속, 그 속에는 타액이 듬뿍, 그리고 새빨간 혀가 보였다.
  그렇게, 유혹하듯 입 속의 빨간 혀가 움직이고......


「응......!」

「응으읏!!」


  꿈속이니까......라는 대담함, 그리고 온몸에 독처럼 도는 열기로 아무 생각 없이, 나는 본능적으로 신에자키의 입술을 탐냈다. 꼬오옥, 하고 그녀의 양팔이 내 목을 아플 정도로 조인다.
  매우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달콤한 향기가 몸속에 퍼져간다. 그리고, 뜨겁게 젖은 혀가 몇 번이나 내 입술 위를 덧쓴다.


「읏, 응읏」

「응응으읏」


  소파 위, 자신을 잊고 열중해, 서로의 몸을 꼭 껴안아 입맞춤을 계속한다. 숨 쉴 수 없는 괴로움.....그런 건 압도적인 달콤한 저림 앞에 사라진다.
  꿈틀거리는 공주의 혀, 그 엄청난 부드러움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연다. 그 순간, 스륵.....하고 비집고 들어가는 뜨겁고 부드러운 혀과 달콤한 타액. 머리가, 몸 전부가 불타간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쾌락이, 내 전신을 번개처럼 태워간다.


「읏, 응응읏, 응응응!! .....읏! 응으읏!!」


  서로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입술과 입술, 혀과 혀가 하나로 얽힌다. 모든 것을 잊고, 쾌락과 서투른 고통, 그 둘을 황홀 속에서 계속 맛본다.
  내 몸에 뭉개진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 본능적으로 그곳을 양손으로 더듬는다. 움찔하고 경련한 뒤, 마치 꽉 누르듯 몸을 바싹 대는 신에자키. 손가락에 달라붙는 것처럼 매우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 손댈 때마다 울리는 공주의 요염한 한숨.


「응, 응응......」


  모든 것이 틀림없는 꿈.
  ――하지만 내 의식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얗게, 흩어지고...... 마치 스위치가 끊긴 듯이.


「응, 앗.....읏, 히, 히이라기 군? 왜, 왜 그래? 응? 응?!! 어, 어어!?」


  빙글빙글 계속 도는 의식. 뇌의 어디선가, 산소 결핍, 그리고 알콜의 상승효과라는 소리가 들린다. 슬슬 잠에 떨어져가는 감각.
  완전히..... 꿈속에서, 또, 잠든다..... 이런, 모든 게 엄청난 꿈......이라는 걸 멍하니 느낀다.


「으으으으읏, 이, 이잇, 변태!! 이렇게 어중간하게, 두, 두고 봐!! 증말!」


  화내듯, 어딘가 토라진 듯한 목소리. 하지만 폭신, 하고 다시 부드러운 무릎에 상냥하게 머리가 실린다. 그리고 입술에 천천히 닿는 부드러운 감촉. 낼름....하고 닿은 뜨거운 혀, 달콤한 숨.


「바보...... 고맙다는 말도 못했잖아. 춤, 서툴렀어도 정말 기뻤는데」


  작은, 정말로 작은 속삭임.
  ――아아, 역시 꿈속의 신에자키는 최고로 사랑스럽다. 나는 달아오른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 10화【초등학교 편 ⑧ 후편】



  ◆

  머나먼 옛날, 기원 전 460년――고대 그리스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을 무렵――지중해에 떠 있는 작은 섬에, 한 남자가 태어났다.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현대 의사에게 지금도 『의학의 아버지』라 칭송받는다.
  그는 그때까지 저주나 천벌이 원인이라 여겨진 병을 과학적 고찰에 의해 분석, 근거 없는 미신에서 떼어내, 현대 의학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하지만, 그 위업과는 또 별개로,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은 모든 의료 관계자...... 아니, 의를 뜻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것은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성스러운 맹세. 그가 태어나 약 2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맹세는 전혀 퇴색하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에 계속 머물고 있다.


「――으읏, 으흐윽」


  찌는 듯이 더워 잘 수 없는 아프리카의 밤. ......뭔가,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문득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인 심플한 디지털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짙은 어둠 속을, 디지털 시계의 녹색 부분만이 아련하게 비춘다.


「......흑」


  들이켜는 공기마저 찌는 듯 덥게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다시 퍼지는 소리......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다. 간이 주택에 만든, 의료 캠프 시설의 얇은 벽을 통해 들리는 소리.
  그것은 옆방――세리실의 방에서 들려오는 오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일찍이 내가 매일 저녁 하고 있던 것과 같은, 구토 섞인 정말 괴로운 소리.


「세리실......」


  식은땀을 흡수해 무거워진 시트를 벗겨내며, 조수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린다. 수 시간 전, 마지막에 한 수술에 관한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동시에, 입 안에 넘쳐흐르는 씁쓸한 침. 어금니를 꽉 다물며, 그 침을 삼킨다.
  마지막 환자는 세리실이 아는 사람――그녀가 이 NGO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친해진 소녀――였다. 소녀가 피투성이로 옮겨져 왔을 때 세리실의 새파래진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 10세이면서, 남동생 4명을 위해 날마다, 시가지에서 야채를 팔던 밝은 소녀였다. 그러나...... 노후화, 그리고 전쟁에 의해 취약해져 갑자기 무너진 건물에 깔린 것 같다. 불운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고. 하지만, 인프라가 아무 것도 정비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기도 했다.
  상가의 어른에 의해 소녀가 의료 캠프에 옮겨졌을 때는 이미 의식 불명, 뇌좌상, 대퇴부 개방성 골절, 그리고 대량 실혈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나와 세리실은 3시간, 모든 기술을 발휘해서 계속 발버둥쳤지만...... 그러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좀 더 빨리 캠프에 도착했으면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도 가난한 이 나라에서는, 기와 조각과 돌을 들어낼 수 있는 중기계의 수가 적고, 또 연료마저 항상 부족. 사고가 일어나도 신속한 구조는 바랄 수 없다. 구급 구명의 전제부터, 선진국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


  피로 때문에 저린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에서 방의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세리실의 오열은 그칠 기미가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넘쳐 나오는 듯한, 애절하기 짝이 없는 그 소리.


「......무슨 말을 해야」


  빠득, 하는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어금니를 씹으며 발을 내디딘다.
  결국, 타인인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애초에 세리실이 앞으로도 의사를 계속할 거면, 이것은 그녀 스스로가 넘어야 할 고통이기도...하니까.
  하지만 예전의 나처럼, 쓸데없다고 생각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평소부터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조수를, 남이라고 냉정하게 딱 잘라낼 수 없다.
  내 방을 나와 어슴푸레한 복도를 걸어, 옆방...... 문 앞에 선다.


「세리실, 나다. 괜찮아?」

「우으, 으으, ......서, 선배?」


  가냘픈 목소리가 난 뒤, 1, 2분 정도 침묵이 계속되고 그리고 철컥하는 열쇠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몹시 운 새빨간 눈동자, 흐트러진 금발로 망연해하는 세리실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움직이지만, 그보다 먼저 눈물이 뚝뚝 하얀 피부 위로 떨어져, 말로 할 수 없는 오열이 새어나올 뿐.
  입고 있는 파란 파자마는 눈물로 진 얼룩 투성이에 평소의 다부진 세리실의 모습은 없었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세리실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는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이처럼......


「서, 선배...... ㅈ, 저......」


  말할 수 없는, 아니,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나,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는 건가......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가락을 데워주듯, 나는 손바닥을 위에 덮었다. 그것은, 여기가 타오르듯 더운 아프리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갑게 얼어 있었다.
  내 시선 끝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입술. 크고 푸른 눈에서 끝없이 굵은 눈물이 넘쳐 떨어져간다.


「괜찮아? 세리실, 무리하게 얘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단지, 걱정됐을 뿐이야.」


  부드럽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지...... 사죄하듯 작은 머리를 숙이는 그녀.


「서, 선배...... ㅈ, 제 목소리 때문에 깨워서...... 죄, 죄송해요. 꿈에서, 꿈에서 그 애를 봐......봐서. 활기차게, 그렇게 활기차게, 잘 웃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죄송해요 선배, 하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오열을..... 머, 멈출 수.....없어서. 시, 시끄럽게 해서, 저, 정말로...... 나 같은 것보다 선배가, 훨씬, 훨씬 지쳤을 텐데......」


  다시 꿈이 또렷이 생각난 탓인지, 온몸을 벌벌 떠는 그녀. 가볍게 패닉이 된 모습.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
  달래듯이, 그 가녀린 어깨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본다. 한 마디 한 마디 타이르듯, 천천히 말을 꺼낸다.


「들려? 괜찮아, 난 별로 상관없어. 네가 걱정이야. 침착해, 우선 물을 마셔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녀린 몸. 그것을 반 억지로 안아 침대에 앉힌 뒤, 미네랄워터 병을 건넨다. 속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아직도 사죄의 말을 하려는 그녀.  그것을 억지로 시선으로 말리고, 물을 마시도록...... 몇 번이고 반복한다.


「......네」


  한숨 섞인 소리 뒤, 마치 아이처럼 양손으로 병을 들고, 떨리는 입술에 입을 대는 세리실.
  일단 물을 입에 머금자, 목이 말랐으리라...... 꿀꺽, 꿀꺽하고 조용히 마시기 시작했다.


「세리실, 난 요령 좋게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넌 정말 잘 하고 있다. 결코 무력한 사람이 아니야. 자신을 탓하지 마」

「......」


  조금 안정된 모습을 확인하고, 세리실이 앉은 침대에서 멀어져 입구 옆의 벽에 기대며 그렇게 이야기한다. 좀 더 뭔가 그녀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찾지만, 결국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한다.
  일찍이, 세르게프가 내게 해준 말은, 무수한 경험을 쌓았기에 할 수 있는 것.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해봤자, 그것은 틀림없이 얄팍해서 그녀의 마음에 닿을 리 없다.


「그럴......까요? 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했어요. 여기서, 겨우, 겨우 친해진 애 한 명도 구할 수 없어...... 이런, 이런!!」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간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처럼 가녀린 몸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들고 있는 그녀. 가슴에 쌓인 격정을 토해내듯 말을 계속한다.
  자기를 탓하는 것처럼, 상처 입히는 것처럼.


「저, 저, 의사가 되어 경험을 쌓으면...... 분명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정말 바보였어요. ......지금, 지금 와서...... 정말 무서워요. 또...... 또, 못 구하면 어떡하지. 무서워요. 내일 수술...... 아니, 의사라는 일이」


  타인의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에 침식된 조수의 모습. 그것은 예전의...... 아니, 평소에는 잊었다고 여기는 나 그 자체다. 친한 이를 눈앞에서 잃어버린, 그 충격이 그녀의 마음을 산산조각 부수려 하고 있다.
  ――외과의에게, 『가족 절개(身内切り)』 즉, 친밀한 사람, 가족을 수술하는 것은 최대의 금기로 여겨진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외과의에게 수술이라는 것은, 항상 어떤 의미로는 내기이기 때문이다. 수술 중에 외과의에게 항상 강요되는 선택지.
  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을 경우...... 그것이 친밀한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때, 외과의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평생 계속 후회하게 된다.
  ――그 때 이렇게 했으면, 사랑한 사람은 살았을 것이다......라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계속 탓하고, 이윽고 메스를 잡을 수 없게 되어간다. 자신의 결단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수술 중에 결단을 못 내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외과의...... 그것은, 이미 의시라고 할 수 없다.


「세리실. 나는 아직 미숙해서 너를 달래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너무나 추운 듯 떨고 있는 세리실. 그 가녀린 어깨, 새하얀 뺨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간다.
  예전에...... 세르게프가 해준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문지른다. 어둑어둑한 방안, 나와 그녀의 숨결, 그리고 파자마의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이 퍼진다.
  그대로 10분 정도 흘러, 조금 호흡이 안정된 조수에게 느긋하게 말을 건다. 최근, 내가 느낀 바를. 도용한 말이 아니고, 나 자신의 말로.


「하지만...... 그래, 세리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기억해?」

「네.......」


  조금은 침착하기 시작한 그녀. 허약하지만, 약간이나마 힘이 느껴지는 대답이 들렸다.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그치듯 말을 계속한다. 내 말이...... 어떻게든 조수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그 중에 『의(医)의 서약으로 이어진 사람을 자신의 형제라 여기고, 아낌없이 자신의 의술을 전하는 것』이 있지.」

「......」


  눈물을 조금 흘리며, 천천히 끄덕이는 세리실. 흔들리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얼굴에 스친다.


「요즘, 그 뜻을 조금 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히포크라테스도 분명, 살리지 못한 환자를 많이 진찰해 왔을 거야. 의술의 한계, 고통, 무력함을 뛰어난 의사니까 더욱,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건 후대 의사들도 완전히 같다는 걸 알았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같은 의를 익히는 사람들은 형제처럼 서로 지지하고 지식을 높여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전에, 의사가 되었을 때 맹세한 성스러운 문언. 위대한 『명의』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맹세.
  피부색이나 국적, 종교, 어떤 것도 초월해서, 의를 익히는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단결해야 한다.
  갑자기 덮치는 불합리한 죽음에 우리들 의사는 너무나 무력하니까. 혼자서는 견디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세리실, 그 고통,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는, 너만이 느끼는 게 아니야. 나도, 그리고 전 세계의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느리고 있어. ......하지만, 언젠가. 그래, 미래에는 반드시 좋아진다. 반드시 의학은 진보한다. 이 고통이 쓸데없지 않다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들은 무력하며, 그리고 항상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야.」

「네......」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만, 괴로울 때는 내게 말해줘. 그리고 또 조수로서 나를 도와줬으면 해. 너의 힘이 필요하니까, 환자를 돕기 위해서.」

「네, 선배......」


  조금 안심한 듯 중얼거린 뒤, 세리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내 어깨에 기댄다.
  그 중량감, 그리고 따스함과 평온한 숨소리를 느끼며, 나도 느긋하게 눈동자를 닫았다. 잘 전해졌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세리실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에서 나갈 때까지, 나는 조금이나마 평온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잠들어 있는 사쿠라. 마치 녀석이 내 어깨에서 숨소리를 내는 듯한...... 그런 기묘한 착각을 품은 채.


  ◆◆


  신에자키가.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그것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어안이 벙벙하게......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우선 집의 외관――이라고 할까, 저택이라고 불러야겠지――부터 다르다.
  집으로 마중하러 온 도서관 사서님이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벽. 성? 이라 한순간 생각할 만큼 넓은 뜰을 둘러싼 새하얀 벽돌. 그 벽돌 건물의 입구인 쇠창살로 된 문이, 그야말로 영화 같은 것에서 본 서양풍 저택 그 자체로.......


「히이라기 님, 이쪽입니다. 사오리 아가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히익, 아......넷!」


  총총 걸어가는 사서님에게 뒤처지지 않게, 나는 빨리 걸어간다. 하지만 그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저택의 내장이 또 엄청나다.
  동물 털로 만든 긴 빨간 카펫은 폭신폭신하고, 구두인 채 걷고 있는 것에 공포마저 느낀다. 그리고 매우 긴 복도에 장식된 조각이나 큰 그림들. 거기에 결정적으로 복도 안쪽에서 흐르는 클래식 음악. 집......이라기보다 미술관.


「네, 이쪽입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꼬불꼬불 구부러진 복도를 나아가, 안내된 곳. 조각이 새겨진 황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문 앞.
  활짝 미소 지은 사서님은, 나를 기다리게 한 채 노크하고 안에 혼자 들어갔다. 틀림없이, 신에자키에게 내가 찾아온 것을 말하는 거겠지.
  생일 파티이기 때문에, 일단 가져온 신에자키에게 줄 선물을 단단히 가슴에 안는다.
  심장이 엄청 두근두근하고 시끄럽다. 농담 같은 이 저택과 비교하면, 이런 선물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눈앞에서 문이 열리고, 사서님이 모습을 보였다.


「히이라기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후훗, 그러면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시니 자, 안으로」

「으......ㄴ, 네. 실례합니다.」


  한 걸음 발을 디딘 순간, 우선 눈에 비친 것은 방안에 장식된 장미꽃, 꽃, 꽃의 홍수였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장식된 엄청 넓은 방의 여기저기에, 벽이 안 보일 만큼 대량의 장미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뭐야, 여전히 멍해 있어서는. 불만이라도 있어?」

「어......? 우, 우왓, 아, 신에자키!? 아, 그, 그게.......」


  시야 한 쪽의 꽃, 그 안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 그쪽으로 눈을 돌린 나는 말이 막힐 뻔하게 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드레스로 몸치장한 공주, 신에자키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대량의 꽃마저, 한 순간 퇴색한 것처럼 느껴진다.
  ――요염한 흑발은 정중하게 묶여, 반짝반짝 빛나는 티아라로 꾸며져 있다. 드레스는 진한 주홍......어깨가 대담하게 노출되어, 풍부한 앞가슴이 열린 디자인. 초등학생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가슴골이 선명히 보여, 눈을 둘 데가 없어서 매우 난처하다.
  평소부터 어른스럽고, 늠름하며 아름다운 그녀. 하지만, 오늘 밤은 드레스에 맞춰 화장을 살짝 한 탓일까, 강렬한 색기...... 같은 것마저 느껴진다.
  정연하게 갖춰진 눈동자는, 검은 아이 섀도로 장식되어 나를 날카롭게 보고 있다. 조금 불쾌한 듯 다문 입술은 붉은 빛이 강해, 요염한 느낌조차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등골을 쭉 뻗은 채, 가터벨트가 붙은 하얀 스타킹에 싸인 긴 다리를, 슥......하고 뻗어 내게 다가온다.


「흥, 의외로 슈트도 어울리잖아. 얘, 우물쭈물 하지 마! 자」

「......어? ㅁ, 뭘?」


  화내는 건지, 조금 뺨을 붉힌 채 매우 당연한 듯 오른손을 눈앞으로 뻗어오는 그녀. 하얀 장갑에 싸인 손가락. 나는 넋을 잃고 보며 뭘 해야 할지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에스코트――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문까지 안내――하면 될 뿐. 그런데,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에......


「어? 잠깐, 히, 히이라ㄱ, 꺄악...... 어, 어머...... 앗, 어머!?」


  패닉이 된 나는, 영화에서 본 장면――공주님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 기사――을 떠올리고, 무심결에 신에자키의 손등에 자신을 잊고 입술을 대고 말았다.


「앗, 꺄아......응......바, 바보! 히, 히이라기 군, 저기...... 응, 아, 아냐, 아니니까....... 아.....응응읏」


  순백의 실크로 만든 장갑에 싸인 공주의 손.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내 입술에 닿은 보슬보슬하지만 부드러운 감촉. 더욱이 비할 데 없을 정도로 좋은 향기가 긴 손가락 끝에서 감돈다.


「......읏, 히이라기 군, 앗, 응읏」

 
  시간으로 치면, 그저 몇 초간이었을 테지만, 입술을 떼어놓은 내 가슴은 부풀어 터질 만큼 세게 뛰고 있었다. 기세로 해버렸지만, 엄청나게 쑥스럽다.
  인사는 이거면 괜찮았으려나? 하고 심호흡을 하며 눈앞의 신에자키를 응시한다.


「아, 신에자키, 이거면...... 괜찮아?」

「응.....? 아.....에!?」


  나는 조금 겁내며 공주를 바라봤으나, 반응이 없다.
  뺨은 치크해서인지, 붉게 물들어 역시 엄청 예쁘다. 공주님이 할 것 같은 티아라와 진홍 드레스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방의 샹들리에에 비춰지는 큰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물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앗...... 응...... 뭐, 뭐어 그럭저럭이네. 읏.......히이라기 군, 그럼 다음은 회장으로 에스코트 하도록 해.」

「어? 으, 응 이렇게?」


  내 왼손에 신에자키의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재빨리 얽혀온다. 바로 옆에 새침한 표정으로 서는 그녀. 목덜미부터 많이 노출된 가슴, 그것이 시야에 또렷이 들어가, 당황해서 앞만 본다.


「잠깐, 걸음이 빨라. 봐...... 좀 더 이쪽으로 와서. 응, 그렇게, 보폭을 나한테 맞추고...... 주의해, 넘어지지 않도록.」

「아, 응」

「손, 놓지 않기야. ――앗, 차, 착각하지 마, 매너, 매너니까!」

「아, 응」


  엉망진창 가까운 거리에서 감도는 달콤한 향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아름답게 꾸민 공주에게 긴장할 뿐인 채, 흠칫흠칫 문을 열고 걸어간다. 내 왼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 그리고 때때로, 꼬옥......하고 쥐어오는 부드러운 감촉. 쿡쿡하고 살짝 웃으며 뒤따라오는 사서 누나.
  모든 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마치, 동화 세계에 섞여든 듯한 이상한 기분인 채로 회장까지의 긴 복도를 계속 걸어간다.
  그리고 완전히 들떠 있던 나는, 모처럼의 생일선물을 그녀의 방에 놓고 온 것을, 회장에 겨우 도착할 때까지 깨닫지도 못했다.


  ◆◆◆


  신에자키의 생일파티. 그것은 많은 어른들이 북적거려서,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회장의 중심에 있는 신에자키――그리고 모친, 현 신에자키가 당주――에게 끊임없이 인사가 차례차례로 온다. 그 근처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는, 클래식 연주가 실제로 되고 있어 여러 사람들이 춤을 계속 추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냐면, 눈에 띄지 않도록 벽 옆에 선 채 우물우물 요리를 맛보고 있었다.


「저기 봐, 쟤가...... 진료소의......」

「응, 왜 여기에? 그 여자의.......」


  결코 따뜻하지는 않은 시선과 소곤소곤하고 속닥이는 여러 말.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요리를 먹는다. 가끔, 신에자키가 시선을 보내지만, 그녀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인사의 방해는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끄덕일 뿐.
  요리, 디저트는 매우 호화롭고 종류도 다양. 그런데, 왠지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서 누나가, 가끔 나를 타인의 시선에서 지키듯 움직여 줬지만 그래도 있기 불편했다.


「히이라기 님, 아가씨에게 말을 건네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런 식으로 소외된 채로, 맛있는 것도 아닌 식사를 계속 하던 내게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속삭임. 놀라서 뒤돌아보자, 사서 누나가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누나도 회장에 맞춰 차려입었지만, 다른 손님에 비해 소극적――검은색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단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누나의 귀여운 분위기에 어울린다.
  그러나, 그런 차림보다 나는 들은 말에 놀라 무심코 대답했다.


「어, 어째서!? 하지만 보세요, 저렇게 어른들이 그녀의 생일 축하를......」

「히이라기 님, 잘 보세요. 그 사람들은 아가씨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주님에게 하고 있어요. 방에 장식된 꽃...... 그 퇴원축하도 전부 그래요. 장미는 당주님이 좋아하는 꽃이니까요.」

「네!?」


  주변에 들리지 않게 배려한 속삭임. 그 내용에 놀라, 나는 신에자키가 서 있는 쪽을 보았다.
  많은 어른들이 서서, 담소하고 있는 그 공간. 하지만 확실히, 사서님이 말하는 대로, 공주는 흥미 없는 듯이 서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파티일 텐데......
  거기에, 그러고 보니 공주의 친구――추종자들 중――는 어디에 있지? 오늘 밤 파티에도 없다. 아니, 그 뿐만 아니고 요즘 들어, 신에자키와 같이 있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아가씨의 다른 친구――반 친구들의 모습이 없는 것이 신경 쓰이나요? 지금, 사오리 아가씨는 당주님의 재혼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아가씨는 혼자입니다. 지금, 공개적으로 사오리 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일족은 없습니다. 이번 파티에 와주신 동년대의 친구는, 히이라기 님 단 한 분입니다.」

「.......그렇, 구나」


  내 시선 끝에 서 있는 신에자키. 그녀는 어른으로 가득 찬 상태, 주변에 아무도 아군이 없는 상황이면서도, 굳세게 가슴을 펴고 다부진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늠름하며 아름답게.......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아름다움, 다부짐이, 얼마나 빠듯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 수술에서 봤던 부친을 향한 눈물, 진료소에서 해버린 나 자신의 잔혹한 거짓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라고 그 때 맹세했다.


「고마워요, 사서님. 저, 신에자키에게 가볼게요.」

「네,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서님이 아니라, 제 이름은 스이센바라 미즈키(水仙原みづき). 잘 부탁해요.」


  응원하듯 등을 툭하고 가볍게 두드려준 사서님――이 아니고 스이센바라 누나. 싱글벙글한 미소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내게 사양 없이 빤히 꽂히는 호기의 시선. 그것을 무시하며, 척척 발을 내디뎌간다. 많은 어른이 나란히 서 있는 회장의 중심을 향해. 아름답게 서 있는 신에자키를 목표로, 똑바로.


「잠시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 엣!?」


  인파를 밀어 헤치고 간신히 그녀 옆에 겨우 도착한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신에자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놀란 표정이, 이런 때지만 조금 귀엽다.


「어머, 외부인...... 실례, 딸에게 무슨 용무지요?」

「히이라기 군......」


  하지만, 신에자키의 몸을 가리듯 비집고 들어간 사람의 그림자.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 처음으로 보는 신에자키가 당주의 모습.
  역시 부모 자식이라는 느낌으로, 얼굴 생김새는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몸매도, 색기를 주변에 뿌리는 요화 같다. 공주보다 더욱 대담하게 드러낸 진홍 드레스, 큰 가슴, 호리호리하고 잘록한 허리, 길고 가느다란 다리. 여왕......이라는 표현이 딱 맞아, 무심코 압도될 것 같다.


「신에자키......사, 사오리의 친구로서 이야기를」

「그래요? 딸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군요. 자, 용무가 끝났으면 돌아가세요.」

「어, 엄마! 나도 히이라기 군하고.......」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식으로 차가운 시선을 딸에게 던지고 억지로 이야기를 끝내려는 모친. 큭......하고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신에자키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외로운 듯이 내게 머리를 숙이려고.......
  하지만, 나는 팔을 세게 뻗어, 그런 공주의 손을 억지로 붙잡는다.


「꺄악, 히, 히이라기 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라고 그 때 맹세했다. 언젠가 잔혹한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전해 그녀에게 미움 받아 경멸되는 그 날 까지는.


「아직 용무는 있습니다! 춤을 권하러 왔습니다. 사오리 양, 저와 춤을 춰주시지 않겠습니까?」

「――!?」


  ――요즘 들어 방과 후, 코이와 사쿠라, 둘을 연습대 삼아 반복한 춤. 매우 미숙해서 솔직히 사람 앞에 보일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매너만은 알고 있다.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거절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춤추는 본인의 의사가 존중된다. 주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 많은 손님이 있는 가운데, 신에자키가 당주가 사교계의 매너를 깰 리가 없다.


「......ㄴ, 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히이라기 군.」


  놀란 내 오른손에 흠칫흠칫 신에자키의 손이 포개진다. 다정하게 감싸듯이 꼭 쥐며, 천천히 두 명이 발을 내디딘다. 뒤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끼지만, 솔직히 어떻든 상관없다. 이곳에서 멀어져 근처 회장으로 그녀를 에스코트 해간다.
  가슴은 두근두근하고 계속 시끄럽게 뛰고, 목은 바싹바싹 마른다. 무도회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엄청 대담한 일을 해버렸다는 자각이 든다.
  신에자키도 놀라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힐끔힐끔하고 시선을 보낸다. 손을 잡은 채인 우리들은, 그렇게 시선이 얽힐 때, 강렬하게 쑥스러워서 말없이 걸어갈 뿐.
  하지만, 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히이라기 군, 고, 고마워. 정말 기뻤어.」

「다리, 밟으면 미안해! 먼저 사과해둘.....응? 뭔가 말 했어?」


  타이밍 나쁘게, 얼굴을 돌리며 뭔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그녀와 겹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한 순간, 얼굴을 귀신처럼 붉힌 신에자키가 강한 힘으로 잡아당긴다.


「――――으으으읏!!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바보, 다리, 밟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자, 곡이 시작될 거야!」

「어? 앗, 잠깐 잡아당기지 말아줘」


  왼손을 호리호리한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오른손을 부드럽게 다시 잡는다. 정면에서 똑바로 신에자키를 바라보지만, 시야에 아무래도 가슴골이 들어와, 뇌가 끓어오를 것 같은 기분.


「......읏! 저, 저기...... 좀 더, 왼손으로 꼭 해.....주렴!」


  그런 내 마음도 알지 못하고,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넣으.....라고 명령하는 공주. 반 자포자기로 힘을 주자, 풍부한 두 개의 부푼 곳이 내 가슴에 뭉개진다. 폭신폭신 부드러운 감촉. 게다가 그 수술 때, 실컷 이 가슴을 본 영상이 떠오른다. 불쑥 위를 향해 부푼 곳과 그 정점에 있던 연분홍색의......


「우와앗」

「얘, 스텝이 엉망진창이야. 제대로 해」


  균형이 무너질 뻔한 몸이, 합기도 같이 이상한 체중이동으로 교정된다. 도대체, 어느 쪽이 리드 역인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그저 자신을 잊고 열중해서 스텝을 계속 밟았다.
  눈앞에 있는 신에자키의 얼굴, 그 새침한...... 그러면서도, 조금 즐거운 듯한 미소를 바라보며.




  ・제 10화 【초등학교편⑧ 전편】


  ◆


  소독액이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냄새에 싸여, 나는 얕은 잠 속에서 계속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꿈을 꾸지 않는 잠은 오래간만이다. 마치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것 같은 깊은 평온함을 느끼며, 느긋하게 잠을 계속 탐낸다.


「......그래서, 사오리 아가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전화로는 문제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안심해주세요. 용태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검사 결과, 뇌나 뼈에 이상은 없었습니다. 단지 알려드린 바와 같이, 우폐가 손상되어 3시간 전에 긴급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는 안정, 그 밖의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은 마취 효과로 자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신 긴급 처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멀리서 들리는 소곤소곤하는 말소리.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여자의 목소리――성인 여성이라는 느낌이 나는 침착한 분위기――와 어머니의 목소리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격함이 느껴졌다. 마치 분노를 숨긴 듯.


「우선, 신에자키 사오리 양은 타박에 의한 긴장성 기흉이었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태였으리라 추측됩니다. 리사이클 센터에서 보고를 받아 여기에 차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26분. ......결론으로서는, 미지의 의사에 의한 빨대를 쓴 긴급 처치가 없었다면 지극히 중대한 결과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 정도였습니까...... 처치는, 선생님의 눈으로 봐도 문제가 없었다고요?」

「예...... 문제 없... 아니요, 오히려 훌륭한 처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단, 몇 가지 납득이 안 되는...... 네,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지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겠다. 마치 먼 외국말처럼 밖에 들리지 않는다. 포근포근하고 편안한 잠에 빠진 채, 멍하니 그 소리를 계속 듣는다.


「우선 무엇보다도, 환자――사오리 양――을 방치하고 자취를 감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 생명의 위험이 있는 환자를 방치하고 사라졌는데 수술은 했다는 것은 같은 의사로서 믿기지 않습니다. 혹시 용태가 급변했다면...... 왜 수술을 했으면서 자취를 감췄을까요?」

「학교 선생님...... 즉 마을 어른들에게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저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긴급 처치의 도움을 아키라――제 아들입니다만――초등학생에게 시켰다는 점입니다. 아키라의 왼쪽 어깨에 남은 환자의 손톱자국으로 보아, 흉강천자 시에 사오리 양의 몸을 억누르는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만」

「예, 아키라 군. 한 번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매우 성실한 소년이라 생각했습니다. 피로로 잠들어 있다고 들었는데, 아가씨를 도와 주셨군요...... 그것이 문제라는 건?」


  어머니의 목소리에, 역시 노기가 조금 섞여 있다. 평소 나나 사쿠라에게는 결코 내지 않는 목소리.
  항상 미소 짓던 어머니가, 이렇게 무서운 소리를 내다니......


「이것은, 제가 부모이기 때문에, 냉정한 판단이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초등학생에게 시킬 정도면, 왜 어른을 부르게 하지 않았을까요? 근처 시설에 학교 선생님들이 계셨는데요. 구명,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게다가 눈앞에서 수술까지...... 살아났으니 다행이지, 만일의 경우 아들은...... 아키라는 평생 후회하게 되었겠지요. 자신이 동급생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고. 도움이라고는 해도 아이에게 안이하게 생명을 짊어지게 하다니......」

「......그 점으로 봐서도 방금 전 같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의 어른과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의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도 용서할 수 없다?」

「예. 무슨 이유가 있어도, 꺼져 가는 생명보다 자신의 사정을 우선하다니. ......다만, 긴급 구명 기술의 우수함은 인정합니다. 불안정한 곳에서의 수술, 게다가 마취도, X-ray도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혈관이나 신경 등에 상처를 내지 않고 최소한의 절개를 했습니다.」


  어디선가 감도는 커피 향. 따뜻한 시트에 싸여, 나는 여전히 얕은 잠속에서 떠돈다.


「틀림없이 베테랑 의사라는 말입니까?」

「예, 틀림없습니다. 여기, 이 좁은 곳인데...... 제2 늑간 쇄골 중선으로 전혀 빗나가지 않고 한 번에 접근했습니다. 성인이라면 몸도 커서, 뼈의 틈새가 넓기 때문에 조금은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에자키 사오리 양은 발육이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 성인보다 매우 좁은 늑골 틈새에, 타 조직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빨대를 넣었습니다. 오한이 날 만큼 탁월한 수술 기술...... 굉장히 경험이 풍부한 외과의입니다. 그 정도인데, 그런 인물이 환자를 방치하고 떠난 건.....」

「......그렇군요.」


  잠시 동안의 침묵. 내 귀에 닿았던 소리는 그치고, 답답한 무음이 지배한다. 그러나, 몇 분 뒤......그 침묵을 찢고, 어머니가 아닌 쪽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이 일은 비밀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상황을 볼 때, 사오리 아가씨를 조치한 사람은, 전 신에자키가의 의사, 친부인 테츠오 씨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에자키가가 의뢰한 흥신소에 의하면, 5년 전에 신주쿠에서 확인된 이후, 발견되지 않은 것 같지만요.」

「아니요,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친이――아무리 긴급 처치를 했다고는 해도――친딸을 방치하고 사라질 리가......」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건 신에자키가의 문제입니다. 관여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거북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가벼운 헛기침을 한 뒤, 여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지만 지금, 신에자키가 당주님――사오리 아가씨의 어머님――은 재혼 준비로 매우 바쁘십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불씨를 지필 여유는 없습니다. 이번이 만일 테츠오 씨의 처치는 아니었다 해도, 재혼이 정식으로 결정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풍파는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즉, 이 긴급 처치를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가씨를 긴급 처치한 사람은 우연히 지나가던 아무 관계없는 의사였다...고. 게다가 원래, 형사사건이 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긴급 피난, 감당할 수 없는 처치였다고 선생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신에자키가 입장에서는, 선의의 제 3자였다고 판단합니다. 결코 전 부친이 살린 것이 아니다. 사오리 님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남자와 접점 따위는 없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부디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온 침묵. 나는 수면과 각성 사이를 계속 헤매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어딘가 한숨이 섞인 듯한 소리.


「......저는 의사입니다. 당부 받을 것도 없이, 환자의 병상에 관한 일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오리 양이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 할 경우, 그것을 전하는 것도 또 의사로서의 책무입니다. 그걸로 좋습니까?」

「예, 실은 아가씨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선생님에게 그런 부탁을 해도 소용없겠지요? 그걸로 괜찮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아가씨가 눈을 뜨면 다시 연락해주실 수 있습니까? 병원을 옮길 준비도 해야 하고, 자세한 상황도 사오리 아가씨에게 듣고 싶기 때문에」

「알겠습니다. 저녁까지 도서관, 그 이후는 휴대폰이면 됩니까?」

「아니요, 도서관이면 됩니다. 오늘밤은 저기서 묵을 테니까요. 그러면 선생님, 사오리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드님도 몸조심을, 아가씨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다망한 신에자키가 당주님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또각또각하고 바닥을 걷는 하이힐 소리, 그리고 문이 열린 뒤, 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민하는 듯, 슬퍼하는 듯...... 그것은,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기분을 내뱉는 듯한, 그런 답답한 한숨이었다.



 ◆◆



  그것은 갑작스러운, 너무나 갑작스러운 기상이었다. 진흙 같이 깊은 잠에서 단번에 깨어나, 너무 또렷해진 의식 때문에 반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며 눈을 떴다.
  나는 몸에 걸쳐진 하얀 시트를 젖히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기... 여긴 진료소?」


  멍하니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본 기억이 있는 하얗고 무기질적인 침대 위. 틀림없이 어머니 진료소에 있는 침대다.
  시각은 낮이리라, 창 밖에서 하얀 커튼을 투과하는 눈부신 태양광이 찌르고 있었다. 나는 청바지, 그리고 상반신은 진료소에 둔 푸른 유카타라는 언밸런스한 모습이다. 게다가 왼쪽 어깨에는 창상용 폴리우레탄 필름이 붙어 있었다.
  ――왜 이런 차림을, 거기에 왜 진료소 같은 곳에? 티셔츠는...... 아니, 애초에 뭘 하고 있었지? 어째서 왼쪽 어깨에 상처가......앗!?


「신에자키!!」


  단숨에 되살아나는 기억. 여러 장면이 머리에 순간적으로 떠오르지만,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다. 신에자키는 무사한가? 그 생각만으로 초조해진다.
  아직 잠에 취한 듯한 나른한 몸에 힘을 넣어 침대에서 바닥으로 발을 내딛는다. 힘이 약간 안 들어가는 손, 조금 아픈 왼쪽 어깨를 무시하면서, 병실 칸막이가 된 하얀 천을 잡아당긴다.
  독특하게 새된 소리를 내며 열리는 하얀 천. 그리고 몇 미터 옆의 침대를 나누는 희미한 녹색 커튼이 보였다.


「히이라기 군, 일어났어!?」

「――!? 신에자키! 거기 있어? 저기, 괜찮아!? 이 커튼 열어도 돼?」

「앗, 아...... 자, 잠깐 기다려...... 기다리세욧. 멋대로 열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녹색 커튼 너머에서 울리는 신에자키의 목소리. 평소대로 늠름하지만, 요염하고 그리고 매우 건강해 보여서...... 나는 크나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응」


  1, 2분 뒤 부스럭부스럭하고 뭔가를 정리하는 소리가 그치고, 겨우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힘차게 커튼을 열었다.


「――읏」


  그 순간, 나는 놀라움과 기쁨에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침대에 그 몸을 일으키고, 활기 있게 나를 바라보는 신에자키의 모습을 정신없이 보는 채로......
  목덜미부터 우측 어깨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평소 그대로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어딘가 기쁜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흑발은 가녀린 몸에 스르륵 흘러내리고, 파자마는 광택 있는 검은 옷감에 프릴이 붙은 호화로운 것. 고스로리 같지만, 그게 엄청나게 어울린다. 확실히 공주님,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나온 듯한 모습.


「뭐니? 그런 데 멍하니 서서는. 바보 아냐? 자, 여기에 앉으렴. 커튼을 계속 열어놓으면 눈부시잖니.」

「앗......응. 신에자키. 몸은 어때?」


  녹색 커튼을 닫고 신에자키에게 안내된 곳――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의 빈 공간――에 앉아서 말한다.


「몸은? 히이라기 군에게는 듣고 싶지 않아! 알고 있어? 너 거의 하루 내내 자고만 있었으니까. ......아무튼, 난 건강하지만! 넌 어때?」

「아, 그래!? 아니 난 건강해. 엄청나게 상쾌해. 그런가... 그렇게 자고 있었던 거구나.」


  그 수술 뒤, 급습한 졸음에 견디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낸다. 요즘 들어 꿈 때문에 피로가 겹쳤던 것, 7km 걸은 직후에 한 수술, 그 굉장한 긴장을 다 참지 못하고 쓰러진 건가......


「응? 하루 내내라는 건, 학교...... 앗! 거기에 어머니는?」

「바보구나,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이미 시작했어. 지금이라면 점심시간 전, 4교시일 때잖니? 그리고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이라면 왕진하러 가셨어. 급환이라고...... 후훗」

「앗, 왜 웃는 건데. 으으, 학교 땡땡이 쳤다고.」


  입가에 손을 대고 싱글벙글 미소 짓는 신에자키.


「어머, 미안해. 파파도 매일 바쁘게 지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이 알코올 냄새...... 병원에 자주 숨어들어가서 혼난 것도. ......정말 그리워. 후후, 거기에 아침, 네 침대 굉장했단다. 사쿠라 양과 칸나즈키 군이 병문안 왔었어. 상당히 이른 아침부터.」

「어?」


  사쿠라와 코이가 왔었나 하는 놀라움과, 신에자키가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표정의 부드러움에, 무심코 말이 막힌다. 그런 나를 보면서, 쿡쿡하고 미소를 띠며 계속 말하는 공주님.
  내가 앉은 침대의 위치와 그녀가 앉은 곳이 옆이라, 조금 허둥지둥하고 말았다. 신에자키가 우아하게 몸을 움직일 때, 뭐라 말할 수 없이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어느 쪽도 학교를 쉬고 너의 간병을 하고 싶다고 했었어. 뭐, ‘단순한 피로니까 걱정하지 말고 학교에 가렴’이라고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에게 듣고 마지못해 납득했던 것 같지만. 후후, 그래도 학교에 갈 때의 두 명의 얼굴,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

「그, 그래. 아, 그런데 신에자키는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거야?」


  평범한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건강하다는 그 무엇보다 큰 증거라, 그저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정말 즐거웠다.
  게다가 왠지, 신에자키도 평소보다 언행이 부드러워서, 이야기하기 매우 쉽다.


「그러네, 평소에는 6시부터 합기도 연습을 해서, 늦어도 4시 30분에는 일어나고 있어. 그래서 눈이 빨리 뜨였고, 아무개 씨는 칠칠치 못하게 자고 있어서 지루했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었어. 상처도 덕분에 괜찮다고 하고」

「윽...... 합기도, 헤에」


  합기도......라는 단어로, 어제의 일――실족할 뻔한 나를 도와주었던 묘한 동작――을 떠올린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우아했던 몸과 긴 손발,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예리한 눈동자의 아름다움.
  바로 옆에서, 흑발을 왼손으로 귀에 걸치며 미소 짓는 신에자키. 검은 프릴이 붙은 파자마가 역시 잘 어울린다. 조금 더운 탓인지, 고스로리풍 파자마의 버튼을 풀어서 아름다운 쇄골 라인이 보이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이 빨려 들어갈 정도로 하얀 피부. 그곳을 보고 두근두근한 나는 깨닫지 못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밝은 분위기, 거기에 숨겨진 불안정함, 신에자키의 여린 면을.


「저기, ......그런데 히이라기 군. 그, 조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니?」

「응, 뭔데?」


  20분 정도 느긋하게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던 우리들. 하지만 갑자기, 신에자키의 말투가 바뀐다. 철컥하고 스위치가 바뀐 것처럼...... 그것은 조금 전까지의 온화한 분위기와는 달리, 어딘가 어둡다.
  띠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조금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표정이 되는 그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쩐지 말하기 어려워서, 마치 무서워하는 것 같은 분위기.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3분 정도 침묵한 뒤, 아름다운 얼굴을 숙이고, 오도카니....하는 느낌으로 겨우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조금 들었는데, 너. 내가 실족한 곳에서 어른 남자를 만났지? 그 사람 뭔가 말하지 않았어? 그게, 내 생일이라든가......」

「어?」


  너무나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 조금 무서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평소 느낌과는 전혀 다른,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 가녀리고 덧없는 인상.


「아,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어떻든 좋아. 그래...... 그 사람, 건강해 보였어?」


  조금 비음이 섞인 허약한 소리. 기원하듯 양손을 끼며,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
  하지만 나는 잘 대답하지 못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신에자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미, 미안. 신에자키. 무슨 말을......」


  그저 시간 벌기처럼 횡설수설하게 입을 연다. 하지만, 신에자키는 듣지 못하고 말을 계속한다. 몸에 가득 찬 불안을 쏟아내듯이, 내게 매달리듯이.


「아침에 말인데, 나. 히이라기 군의 어머님에게 들었어. 그 때, 긴급처치를 해 준 의사가 있다고, 그걸 너도 도와줬다고! 그 사람이 내 파파야, 날 도와줬던 사람이! 저기, 파파. 아픈 느낌은 아니었어? 제대로, 확실히 잘 지내고 있었어? 알려줘, 나. 파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걱정이야! 사소한 거라도 알고 싶어.」

「아......」


  둑이 터진 듯 넘쳐 나오는 그녀의 말. 마치 애원하는 듯한 소리.
  그리고, 나는 퍼즐 조각이 채워진 것처럼 이해했다. 어제의 수술...... 그걸 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왠지 신에자키의 아버지가 한 일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건......」


  확실히 내가 수술한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 한심하게도 설명하기 전에 나는 잠에 빠져 버렸다.
  당연히, 나 같은 초등학생이 수술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의사가 그곳에 있었을 거라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왠지, 신에자키의 아버지가 수술을 한 셈이 되었다고.


「그 때, 너무 아파서, 정말로 아파서...... 이제 죽는 편이 좋다고까지 생각했어.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억나.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힘내, 힘내!』라고 필사적으로 크게 외치는 소리. 나를, 그 소리가 구했어. 마치 꼭 껴안긴 것처럼 행복했어. 그래도, 역시 착각이었는지도......」


  수술할 때, 신에자키가 강하게...... 마치 매달리는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를 갈구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항상 빠듯하게 계속 노력하는 그녀.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오늘의 신에자키가, 온화하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는 정말 좋아하는 아버지가 도와줬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세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기서 진실...... 수술을 한 사람은 나였다고 말해도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때, 정말 행복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정말 좋아』라고 중얼거린 신에자키. 그것은 전부 거짓말, 그녀의 착각이었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했어? 나, 파파한테 또 폐 끼쳤어...... 계속 보고 싶다고 바랐는데, 보러 와 주지 않았어. 아니,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역시 어떻든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딸이라 나, 날, 역시 방해라고...... 어쩌지, 파파한테 미움 받으면 나, 어떻게......」


  마지막은 이미 질문조차 아닌, 그저 오열이었다.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그녀의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 검은 옷으로 떨어져간다. 그 아름다운 빛이 내 마음에 도려내듯이 꽂힌다.


「신에자키」


  그녀는 나와 같다. 언제나, 항상 생각하던, 나는 어머니에게 폐가 되는 존재, 방해인 건 아닌가? 신에자키의 슬픔을, 내 아픔인 것처럼 똑똑히 느낀다.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충동. 자극 받은 대로 그녀의 하얀 손을 감싸듯이 잡고, 말을 짜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필사적이라 별로 얘기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 아버님은 건강해 보였어. 거기에, 생일 축하한다고. 신에자키를 많이 좋아한다고. 살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말했어. 어떻든 좋을 리가 없어! 절대로, 폐라니! 절대로! 신에자키를 방해라니, 싫어할 리가 없잖아!」

「......응」


  나는 최악에 잔혹한 거짓말쟁이다. 이 거짓말이 발각되는 순간, 신에자키는 나를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미워하고 경멸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는 충동에 지배된 채, 울고 있는 그녀의 양손을 꼭 쥐었다.
  내 뺨에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울 자격 따윈 없다, 최악의 거짓말쟁이인 주제에...... 지금까지라면, 상관없다고 결론짓고 진실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믿을 수 없다고 해도, 딱히 어떻든 상관없다면서 아무 흥미도 없이 차갑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에자키의 마음이 망가지는 것이 무섭다. 이 최악의 거짓말로 인해, 언젠가 더 큰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도 지금, 그녀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자기혐오.
  그 속에서, 내 진정한 마음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려고 할 말을 찾는다.


「나도, 신에자키가 살아서...... 정말, 정말로 기뻐. 미안해, 신에자키. 그래도......나도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고마워, 고마워. 히이라기 군」


  서로 맞잡은 우리들의 양손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떻게 말해야 했는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해야 할 때가 온다.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 될 거라고......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커튼 너머로 밝은 햇빛이 비치는 침대 위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양손을 잡고 말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계속 기다렸다. 조금 코를 톡 쏘는, 익숙한 알코올 냄새에 싸이면서.



 ◆◆◆



  리사이클 센터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일주일이 흘렀다.
  ――결국, 나는 최악의 거짓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어머니가 잠시 상황을 물었을 때도, 『모르는 남자를 도와줬어. 하지만 필사적이라 거의 기억나지 않아.』같은 대답만 반복. 신에자키는 후교의 큰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가방은 그 때 코이가 들고 가준 것 같아, 사고 다음 날에 학교에서 받았다.


『아키라, 고민 있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말해봐』


  라고 했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맥 빠질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돌아와, 나는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아 진짜, 왜 그렇게 째려보는 건데. 게다가, 왜 코이까지 여기에 있는 거냐고!」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 수요일 방과 후, 우리 집.
  웬일인지 나는, 소꿉친구인 사쿠라와 친구인 코이의,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싱글벙글하고 미소 짓는 사람은 어머니 뿐, 사쿠라와 코이는 기분이 안 좋은 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로 빤히 흘겨본다.


「시끄러 아키라. 사쿠라랑 놀려고 온 거야. 그런데 그 나비넥타이는 뭐야! 엄청 이상해, 전혀 안 어울려! 진짜 바보 아키라라는 느낌」

「맞아 아키라 오빠. 엄청 안 어울려. 틀림없이 비웃음 받을 거니까 안 가는 게 어때? 지금부터 거절 전화를 걸면 되잖아, 응? 선생님하고 칸나즈키 선배, 넷이서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그렇게 무서운 짓,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악전고투하며 턱시도를 몸에 맞추는 내 고생을 모르고, 멋대로 떠벌려대는 둘.
  반바지에 티셔츠의 러프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은 채, 내 마음에 드는 쿠션을 멋대로 안고 있는 친구, 그리고 아까 전부터 여기저기 잡아당기며 방해하는 소꿉친구를 흘겨본다.
  하지만, 그보다 기분이 안 좋은 시선으로 되돌아와, 당황해서 눈을 돌렸다.


「자, 둘 다. 아키라를 그렇게 괴롭히면 안 돼. 후훗, 여길 봐 아키라, 모처럼이니 사진 찍어둘 테니까.」

「잠깐, 어머니까지...... 아아, 진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찰칵찰칵하고 셔터를 마구 누르는 어머니. 이런 턱시도 차림...... 엄청 부끄러운데 전혀 아랑곳없이 연사한다.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나는 턱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 장의 종이를 만진다. 그렇다, 이 얇은 종이가 모든 원흉이다. 광택이 나는, 그야말로 고급스런 감촉의 하얀 종이. 정중하게 붉은 밀랍으로 봉해진 그 내용.......

「아-아~ 그런데 말이야, 아키라만 파티에 초대받는 건 뭐야? 치사해! 으으으윽, 나도 가고 싶었어. 예쁜 드레스, 호화로운 요리, 거기에 디저트!」

「맞아, 치사하다구! 칸나즈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왜 오빠만!? 저기, 오빠. 진짜로 신에자키 선배랑 무슨 일인가 있었던 건 아니지?」

「시끄러, 바보 사쿠라. 아무 일도 없다고 계속 말했잖아! 다만, 일전의 감사를 겸한다는 걸로...... 거기에 원래 초대받은 사람은 어머니고. 어머니가 만약 급환이 올 수도 있다고 거절해서, 별 수 없이 내가 가게 된 거잖아.」

「자~! 여기 봐, 아키라. 이쪽으로, 엄만 다음에는 미소를 찍고 싶어. 응? 방긋 웃어봐, 응. 그렇게. 잠시 그대로, 그대로!」


  사쿠라와 코이에게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설명을 반복하며, 어머니의 카메라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는다.


『신에자키가 차기 당주 신에자키 사오리 탄생 12년 기념 파티 초대장』


  주머니에 든 하얀 종이에는, 금색 글자로 그렇게 쓰여 있다. 하지만, 초대장이라기보다는 소환장......이라 말하는 편이 정확한 것 같다. 사쿠라와 코이, 그리고 어머니를 상대하면서, 나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의 일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주, 금요일 방과 후. 사쿠라를 사쿠라의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바래다준 뒤에 간 읍립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
  여전히 귀엽게 미소 짓는 사서 님에게 인사를 하고, 의학서실로 들어갈 허가를 받았다. 실은 신에자키와 같이 가야 했지만, 그녀는 후교시의 병원에서 입원중이라 어쩔 수 없다.
  혹시 안 된다고 거절할 수도? 이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순조롭게 사서 님이 허가를 해줘서 나는 매우 기분 좋게 의학서를 읽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뭐지? 하고 뒤돌아 본 내 시선의 끝에는......


「신에자키, 어째서!?」


  거기에 서 있던 사람은 사복을 입은 신에자키였다. 평소의 교복이 아니라, 흰색의 심플한 원피스에 검은 핸드백을 들고 있다. 옷단은 매우 짧고, 거기서 뻗어 나온 긴 다리에는 흰색 롱 삭스, 신발은 검은 하이힐. 머리에는 빨간 헤어밴드를 단, 틀림없는 아가씨.
  오른쪽 어깨에 이미 붕대는 없고, 거즈가 붙어 있었다. 안색도 좋아서, 매우 건강해 보인다. 그 때의 가녀린 느낌은 조금도 없고, 날카로워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넘쳐 나오고 있었다.


「뭐야, 나빠? 지금, 집에서 요양 중이야.」

「아, 아니. 전혀 나쁘지 않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다. 무슨 일로, 아......혹시 여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그게, 미, 미안. 조심해서 읽을 테니까. 정말 미안.」


  가늘고 길게 째진 눈동자로 찌릿하고 흘기는 그녀. 기분이 안 좋은지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얼굴은 화난 듯 약간 붉다.
  당황해서 의학서를 닫고, 그녀에게 머리를 숙인다. 신에자키에게 아버지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책을 읽어버린 것은――아무리 그녀가 입원중이라 생각했다고는 해도――내가 나쁘다.
  역시 화내고 있구나......하고 내심 한숨을 쉬면서, 약간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그녀를 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바보」

「어?」

「――읏, 아무것도 아냐! 여전히 짜증나!」


  하얀 원피스를 통해 보이는 노출된 어깨, 호리호리한 팔로 팔짱을 끼고 뭔가 초조한 듯 손가락 끝을 움직이는 그녀. 발끝에는 이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돌이 붙어 있어서 매우 사랑스럽다. 그래, 겉보기만은......


「아아 정말, 몰래 빠져나와서 시간이 없어! 자 여기!!」

「어? 뭐야?」


  빠르게 말하며,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하얀 물건을 꺼내는 그녀. 그것을 엄청난 기세로 내 눈앞으로 쑥 내민다.


「이건.....뭐야?」

「됐으니까 받으렴, 자.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으, 응」


  완전회복, 평소대로 유아독존 모드인 신에자키. 기세에 눌리며, 나는 그 하얀 종이를 받는다.


「다음 주 수요일. 18시부터니까. 만약 안 오면 알지?」

「저기, 우선 뭐가 뭔지......」


  하얀 종이는 편지 봉투, 게다가 붉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어서 솔직히, 난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나를 밀어붙이듯 말을 계속했다.


「그럼 나 돌아갈 테니. 저기...... 조금은 댄스 연습 해두세요.」

「네......?」


  또각또각하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의학서실에서 나가는 그녀. 그 뒷모습조차 터무니없이 균형 잡혀서 손에 든 편지를 무심결에 잊고 바라보았다.
  ――내가, 그것이 초대장이라는 것을 이해한 때는 20분 뒤. 뭐가 이상한지, 쿡쿡하고 계속 웃는 사서님과 둘이서 봉투를 열었을 때였다.




・제 9화 【초등학교 편 ⑦ 후편】

 
  ◆



  태초의 대지 아프리카, 그 NGO 의료캠프에 내가 부임하고 난 지 2년 수개월. 아직 짧은 기간이지만,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임상을 경험했다.
  최근에는 갓 부임했을 때에 비해서 조금은 기술이나 정신면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려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 뜨는 밤이 있었다. 깜깜하고 좁은 독실 안에서, 화악하고 찌는 듯이 더운 침대 위. 온몸에서 땀이 흘러, 마치 시체처럼 차가워진 내 몸을 양손으로 붙들고, 딱딱하고 어금니를 떤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할 수 없었던 많은 환자들.
  안이하게 자신을 탓하는 것은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신 차리고 받아들인다......고는 생각하지만, 우연한 순간이나 꿈속에서 마치 칼로 가슴을 도려내진 듯한 통증을 느낀다. 마음이 부서질 것 같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억누르지 못하고 후회한다.
  ――혹시 그 때, 좀 더 다른 접근방식을 썼으면 그 애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시 환자의 우선순위를 오인했던 게 아닌가? 애초에 내가 아니라 다른 의사의 기술이라면 그 부모와 자식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러 생각이 가슴에 흘러넘쳐, 어둠 속에서 홀로 고뇌를 되풀이한다. 내일의 수술을 대비해서 자야한다는 건 알지만, 물결처럼 밀어닥치는 후회가 계속 가슴을 꽉 조인다.


「......사쿠라, 어머니」


  선진국의 고도구명 구급센터조차 10% 이하의 Probability of Survival value(예측 구명률)밖에 없는 증례가 도중에 끊이지 않게 옮기는 일상.
  몸에 큰 창상을 몇 가지 입은(중증 다발 외상) 환자가 동시에 몇 명이나 와서 난처했을 때, 누구부터 그리고 어느 부위부터 처치하는가? 그것은 거의 도박과도 같다. 거는 것은 환자의 생명.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와 압박이 삐걱삐걱 정신을 침식해간다.


『나, 어른이 되면 엄마 같은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아키라......』


  코 안에서 되살아나는 톡 쏘는 소독액 냄새...... 어릴 적 기억. 의어머니가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셨을 때 내가 불쑥 했던 말. 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별로 기쁜 표정을 보이지 않았던 의어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된 지금이라면 그 표정의 이유를 안다. 어딘가 난처한 듯, 그리고 슬픈 듯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어머니도 의사로서, 이 피를 토할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어머니......」


  결단을 내리지 못해도, 판단이 늦어도, 우선순위를 잘못해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도, 속도가 부족해도――환자는 쉽게 죽는다. 그것은 당장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로프를 건너는 줄타기. 정신을 쥐어짜서, 할 수 있는 한계의 끝까지 최선을 다해도, 눈앞에서 사라져간 생명은 이루 다 세지 못한다.
  내가 의사인 한 틀림없이...... 이 무력감, 자기혐오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구한다고 믿으면서 계속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결코 의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지 않는다. 비록 빠듯한 줄타기의 연속이라도, 후회하는 일 투성이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사쿠라......」


  여기서 무너지면, 사쿠라가 눈을 떴을 때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사쿠라, 그리고 중요한 몇 가지를 버리고 의사가 된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대체 눈을 뜰 소꿉친구를 무슨 낯짝으로 만나야 하지?
  머리에 어머니와 사쿠라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침대로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정신과 몸을 쉬게 해야 한다. 내일, 또 빠듯한 선택이 재촉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 때,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


  신에자키가 쓰러진 장소를 본다. 주변은 약간 평평해서 위험은 없다고 판단.


「신에자키!!」


  큰 소리를 내며 옆으로 달려가지만 대답은 없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서, 손목 조금 위――요골동맥――로 손가락을 대어 호흡을 확인한다. 신에자키의 반듯한 얼굴에 묻은 선혈. 하지만 그건 많은 출혈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심장이 움직이고 있는가? 자발 호흡을 하고 있는가? 를 확인하는 게 최우선이다.


「좋아...... 맥은 있어. 하지만!!」


  내 손가락 끝에 닿은 가느다란 손목의 맥. 그것은 미약했지만 두근두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호흡이 분명히 이상하다. 핑크색이었던 신에자키의 입술은 조금 새파래지고, 호흡은 핫핫 하는 느낌으로 얕다.


「신에자키!! 들려?」

「.....」


  아름다운 얼굴을 고통으로 찡그리는 그녀. 머리를 다쳐서인지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가녀린 양 어깨를 들썩이며, 얕은 호흡을 반복하고 있다.
  ......위험하다. 나는 크게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오른손으로 목을 촉진하면서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연다. 하지만 호흡을 방해할만한 이물은 보이지 않고, 목에 뭔가가 찬 상태도 아니었다.


「기도는 통해, 있는데...... 더 넓게 통하는 각도로 움직여볼까? 아니, 안 돼. 머리를 다쳤어, 경추가 손상될 우려가」


  패닉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행동을 확인하기 위해 중얼거리며,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서, 빨리 지퍼를 연다. LED 펜라이트, 가위, 붕대, 테이핑 테이프, 껌 테이프, 자를 몇 개 정도, 스포츠용 휴대 산소캔 등을 서둘러 꺼낸다.
  이마의 상처로 보아――출혈은 크진 않지만――실족 도중에 머리를 다쳤던 것이라 추측된다. 지금 당장은 생명에 연관되진 않겠지만, 머리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경수가 손상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경추를 고정하기 위해 신에자키의 목에 자를 구부린 것이나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써서, 그 부위가 혈관을 압박하지 않게 테이핑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한다. 옮겨도 경추에 머리 부분의 무게가 가해지지 않도록.


「좋아, 바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리사이클 센터로 달려가서 연락, 어른의 힘을 빌려 그녀를 차에 옮겨 태운다. 거기서 산길을 빠져나가 어머니의 진료소까지 20분 정도인가. 여기서 움직이는 시간을 포함하면 총 30분은 걸릴 것이다.
  심장은 움직이고 있다. 출혈은 많지 않지만,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머리에 상당히 강한 충격을 받았을 우려가 있다. 급성경막외혈종일 가능성도 있다. 빨리 머리 부분을 CT스캔해야 한다.
  아니 하지만......하고 발을 멈췄다. 무언가가 나를 잡아 세웠다. 걱정되는 것은 호흡. 이 증상은......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바로 시설로 달려가서 어른을 불러오는 것. 또는 지금 당장 신에자키를 진단하는 것. 어느 쪽이든 헤맬 시간은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간만은 지나간다.


「아니, 역시 호흡이야. 무엇보다도 호흡을 우선, 이 증상은 위험해.」


  급성경막외혈종일 수도 있지만, 우선 호흡이 먼저다. 머리라는 것은 의외로 튼튼해서, 시간 유예는 있다. 구명에서 가장 우선되는 ABC, Airway(기도확보), Breathing(호흡), Circulation(심장마사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평소 무의식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호흡이라는 행위. 그러나 호흡이 정지하고 단 5분만 지나도 뇌세포가 죽기 시작한다. 아니, 그 전에 호흡이 멈추면, 몇 분 이내에 심장정지가 병발된다.
  CPA(cardiopulmonary arrest) 심폐 정지상태가 되면 인간은 3분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고, 목숨은 살아나도 뇌에 평생 사라지지 않는 후유증이 남는다.
  보통 아이라면 어른을 불러 병원에 옮기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다를 것이다. ......게다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생명은 유지될 것인가?
  나의 이 지식은 무엇 때문에 있지? 사람을 구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신에자키! 미안, 셔츠를 자를게!」


  가위를 써서 주저 없이 그녀의 하얀 프릴 셔츠 그리고 그 아래, 반들반들한 하얀 속옷을 자른다. 일일이 버튼을 풀 시간은 없다. 드러나는 옅은 핑크색 브래지어에 조금 동요하면서 그것마저 재빨리 잘랐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 다만 우측 흉부에 내출혈이 있다. 그리고 땀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땀이 맺혀 있다. 호흡은 처음과 변함없이 얕고 빠르다. 이제 곧 호흡정지가 될 것 같은 기색. 그 원인, 신에자키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원인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듯 침을 삼키며, 양손을 그녀의 양 옆구리, 폐 위 쪽으로 대어간다.


「젠장...... 우흉부에 피하기종이 있어. 설마 이건」


  신에자키의 큰 유방 옆에 댄 내 손가락 끝에 닿는 독특한 감촉. 피와는 전혀 다른,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옴폭옴폭한 느낌――피하기종――피부 아래에 공기가 비집고 들어가, 마치 종기처럼 되어 있었다.
  이 증상은 상처 같은 곳으로 공기가 비집고 들어갈 때도 발생하지만, 눈에 띄는 창상은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호흡이상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청진기가 없는 게 안타깝다. 분해서 이를 갈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으며,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고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면서 타진해간다. 내 손가락 끝에 반응해서, 그녀의 폐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반향음...... 그것을 듣고 놓치지 않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우폐가, 틀림없어...... 타박에 의한 긴장성 기흉」


  ――기흉은, 간단하게 말하면 폐에서 공기가 가슴 속으로 새기 시작하는 병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지금 신에자키에게 일어나는 것은 외상성일 것이다. 실족했을 때, 우흉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건가.
  가까이 있는 스포츠용 산소캔을 열어 그녀의 새파래진 입술에 꽉 댄다.
  기흉일 경우 무리하게 공기를 넣는 인공호흡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되지만, 고농도의 산소를 자발적으로 마시게 하는 것은 위안 정도의 효과가 있다. 의료용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스포츠용 산소캔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는, 어머니가 있는 곳까지도 무리......인가?」


  긴장성 기흉은 극적으로 진행된다. 빨려 들어간 공기는 신에자키의 우폐 밖에서 계속 끝없이 부풀어 올라, 곧바로 정상인 좌폐만이 아니라 심장까지 압박한다. 어머니의 진료소까지 30분...... 그 사이에 긴장성 기흉에 의한 압박으로 심장정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젠장!!! 어쩌지?」


  우물쭈물할 시간은 없다. 여기서 시설에 어른을 부르러 가도,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신에자키의 생명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눈앞에서 자꾸자꾸 새파래져가는 그녀의 얼굴.
 만약 여기가 병원에, 손에 16게이지(약 1.2mm)의 주사바늘이 붙은 주사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흉강천자를 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
  ――흉강천자――우선 쇄골 중앙에서 바로 밑으로 선을 그어, 바로 아래에 있는 제2 늑간 틈새에 바늘을 찔러 넣는다. 흉벽을 넘어 주사기로 폐와 가슴 틈새에서 고인 공기를 뽑아내는 의료기술.


「뭔가, 뭔가 없을까?」


  신에자키의 아름다운 얼굴은 새파래져, 스포츠용 산소를 거의 들이마시지도 못하게 되었다. 망설일......망설일 시간은 없는데, 아무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여기서 우물쭈물할 거면, 바로 어른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주사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차로 출발해서 어머니가 있는 진료소까지 신에자키가 버틸지 어떨지? 안 돼, 늦는다. 기적을 바라는, 너무도 확률이 낮은 선택이다.
  가방 안을 휘저어, 뭔가 없을까? 하고 필사적으로 계속 생각한다.
  죽는다......바로 아까 전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침착하고 여유로웠던 그녀가.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나의 양 손을 잡아, 예리한 시선으로 걱정해준 신에자키가......죽는다.
  두렵다, 생명의 선택, 결단이 터무니없이 두렵다. 그리고 신에자키가 죽는 게 무섭다. 어차피 무섭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을.


「젠장, 안 돼. 신에자키!! 절대로 죽게 하지 않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가방 속에서, 어디서나 팔고 있을만한 약, 메스, 작은 라디오 펜치, 알콜――도서관에 있던 손가락용 살균 알코올을 채운 것――이 들어간 플라스틱제 물병, 작은 드라이버, 그리고...... 우유팩에 붙어 있던 빨대를 꺼낸다.
  그것들을 청결한 거즈 위에 두고, 촤아악하고 병에 든 알코올을 전부 뿌린다. 내 양손에도 끼얹어 임시적으로나마 살균을 마쳤다.


「미안해, 신에자키」


  그녀의 우측 흉부, 쇄골의 정중앙에서 아래로 기세 좋게 갈색 약을 바른다. 갈색 약의 성분은 포비돈 요오드――외과 수술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소독약과 완전히 같다――이다.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각오를 다지며, 요오드의 살균작용이 발휘될 때까지의 30초간을, 메스를 든 채 가만히 기다린다.


「호흡미약......」


  핫핫하는 느낌으로 가까스로 계속되던 그녀의 호흡. 그러나 그것은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약해져간다.


「25, 26, 27......」


  하지만 아직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왼손가락 끝에 닿은 신에자키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 겨드랑이 동맥은 약하지만 확실히 맥박치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그녀의 몸은 살기위해 전력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29, 30! 수술개시!!」


  그대로, 그녀의 몸을 억누르고 주저 없이 오른손에 든 메스를 휘두른다.


「――으으읏!!」


  힘차게 벌떡!! 하고 튀어오르는 신에자키의 몸. 격통이 퍼져가는 것이리라. 억누른 내 왼팔 너머, 왼쪽 어깨에 손톱을 세운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징조다. 통증에 반응한다는 사실....... 그것은 경추에 상처가 없는 증거이고, 무엇보다도 육체가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거니까.
  나는 왼쪽 어깨에 그녀의 손톱이 파고들어, 우지직 피부가 찢어져도 상관하지 않고 단번에 메스를 움직인다. 오른쪽 유방 근처를 약간 절개해서, 제2 늑간격까지 드라이버가 닿기 위한 터널을 만들어간다.
  그대로, 라디오 펜치로 절개한 부분을 열어서 고정......


「아프겠지만...... 그래도, 절대로 죽게 하지 않을 거니까!!」


  가는 드라이버에 빨대를 씌운 것을, 기세 좋게 찔렀다. 지지직하고 근육이나 조직이 저항하는 감각...... 그것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지점――흉벽 너머, 폐에서 빠져나간 공기가 고인 곳――을 향해서.


「우으으으으읏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읏!!!」

「신에자키, 신에자키!! 힘내! 힘내!!」


  시간으로 따지면 1, 2초겠지만, 마치 5분같이 느껴진 고통의 순간은, 그러나 갑자기 끝났다.
  스윽....... 저항이 가벼워져 닿은 반응을 느끼고 빨대만을 남긴 채 드라이버를 뽑아간다. 그 순간, 빨대에서 기세 좋게 공기가 슈우슈우하고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에자키의 호흡이, 깊고 확실히 재개되어간다. 입에 씌운 산소캔을 자발적으로 들이마시고 있다.


「좋아, 흉강천자..... 완료!」


  약국에서 산 항생제가 든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절개한 부분 앞을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 찔러 넣은 상태인 빨대가 구부러지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담아 붕대를 감는다.
  그 사이에도, 그렇게나 새파래졌던 신에자키의 안색이 점점 회복되어간다. 뺨에 붉은 빛이 돌고, 온화해져서 평상시의 호흡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선, 호흡에 연관된 위기는 벗어났다고 생각된다.
  수술 중에 느끼던 통증도, 단단히 고정된 지금은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뭐, 서투르게 손댔다가는 격통이 느껴지겠지만...... 하지만, 신에자키의 몸이 통증을 느끼고 반응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징조다.


「좋아, 나머지는...... 신에자키, 신에자키. 들려? 들리면 눈을 떠봐!!」

「우으...... 파, 파파야?」


  맥박, 호흡의 안정을 확인. 경부 교감신경이 마비됐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동공반사 테스트를 하려고 LED 펜라이트를 쥐고 확인.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확실히 반응이 있다. 호소에도 반응하고 있고, 약간 의식――지금이 언제고, 여기가 어디인가?――에 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지금 바로 위험하다는 건 아니다. 사지의 마비 같은 것도 없어 보인다.
  후우......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 때.


「아키라, 어디야?」

「코이!? 코이, 마침 잘 됐어! 여기야! 선생님과 어른을 몇 명 불러와. 신에자키가 다쳤어.」

「어? 무슨.....아, 우왓!!」


  바스락바스락 나뭇가지를 제치고 모습을 나타낸 친구. 여러 가지로 바삐 돌아다녔는지, 오렌지색 티셔츠는 땀에 젖어 코이의 맨살에 붙어있다. 그리고 나와 신에자키의 모습이 보였는지, 놀란 듯이 입에 손을 대고 말문이 막혀 있다.


「아키라!? 왼쪽 어깨! 뭐, 뭐야 그거. 피투성이잖아!! 괘, 괜찮아?」

「뭐? 무슨 말을...... 됐으니까 선생님을」

「어? 공주까지 쓰러지고......근데, 우왓, 붕대! 거, 거기에 크, 큰...... 그게 아니라 왜 공주는 옷을 안 입은 거야」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며 얘기하는 코이. 그 말로 나는 조금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신에자키는 지금, 상반신이 알몸(오른쪽 가슴은 붕대가 감겨 있지만)으로, 그......초등학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왼쪽 가슴이 노출되어 있고. 예쁜 연분홍색 돌기까지 내 시야에 확실히 들어와......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촉진할 때는 그 부드럽게 부푼 곳을 손댔을 터......


「우와아아아앗, 어, 어쩌지? 그래, 우선 내 티셔츠를......」

「꺄악! 아, 잠ㄲ...... 앗...... 바보 아키라! 내, 내 앞에서 벗지 마! 아, 우와아앗, 정말」


  코이의 비명을 흘려보내며 티셔츠를 벗어서, 신에자키의 가슴에 걸친다. 그리고 내가 잘라낸 하얀 프릴셔츠와 껌 테이프로 붙였다. 그 때, 욱신욱신하고 왼쪽 어깨부터 팔까지 찌릿한 통증을 느낀다. 보면, 거기에는 신에자키의 손톱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래... 아플 거야. 그래도, 아무튼 어떻든 상관없어. 그것보다 코이, 부탁이니까 빨리 선생님을 불러줘. 신에자키가 실족한 것 같아서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해.」

「아, 으, 응. 알았어...... 가, 갔다 올게.」


  힐끔힐끔 내 가슴을 본 후, 더 없을 만큼 새빨간 얼굴로 달려가는 코이.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 나는 널려있는 도구들을 전부 가방에 넣는다.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신에자키의 맥을 만일을 위해 손대면서, 그녀의 이마에 흐르던 피(거의 멈췄다)를 물티슈로 닦으려고 가까이 갔다.


「파파? 우으, 추워.」

「미안해, 신에자키」


  이마의 상처를 물티슈로 조심스럽게 닦고 있을 때, 눈을 살짝 뜨고 중얼거리는 그녀. 의식이 조금 뚜렷하지 않은 걸까. 나를 아버지로 오인한 것 같아, 매우 부드러운 미소로 올려본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어리광부리듯이 손을 뻗어, 그 희고 긴 손가락을 내 손가락에 휘감았다.


「시, 신에자키!?」

「파파...... 역시 내 생일 축하하러 와줬어. 기뻐......정말, 정말 기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비춰진 신에자키의 그 표정은 매우 아름다워서, 나는 무심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신에자키의 미소는 보고 있는 동안에 사라지고, 그리고 외로워서 참을 수 없는 슬픈 표정이 되었다.


「아아..... 파파. 나 말이야, 나...... 매일 노력하고 있다구? 매일, 굉장히 괴로워서...... 울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 그래도......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매일 일을 참고 노력하던 파파의 딸인걸.」


  그녀의 얼굴...... 그것은 평소 같이 딱딱한 표정이 아니고, 마치 어린 아이. 눈동자에 눈물을 살짝 띄고, 내게 필사적으로 말을 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고, 그저 말이 없는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그러니까...... 부탁이니까 돌아와줘 파파. 이제 일 때문에 늦어도 뭐라고 안할게. 또 내 생일을 잊어도 화내지 않을 거니까. 공부도 좀 더 노력할게. 연습도...... 부탁이야......파파. 나, 나......힘들고, 외로워서 못 참겠어. 부탁......부탁이야, 파파」

「신에자키......」


  어린 아이 같이 앳된 소리. 내 가슴이 꼭 조이는 것처럼 아프다. 사쿠라와 알게 되기 전, 홀로 어머니의 귀가를 계속 기다린 매일 밤을 떠올린다. 저것과 같은 외로움을...... 아니, 양가의 자녀라는 압박이 있는 만큼, 신에자키 편이 괴로웠을 것이다.
  거기에 지금, 그녀에게는 사이가 나쁘다고 소문난 어머니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완벽해서 매우 다재다능한 그녀는, 그러나 위험할 정도로 빠듯하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에자키, 괜찮아. 친구가 되자? 지금부터는 나도 같이 힘낼 테니까.」


  들리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하고,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소녀, 그 눈물을 멈추고 싶어서. 손을 세게 잡아 상냥하게 피로 더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런 내 말이 닿았는지, 그녀는 눈물을 띄우며, 허약한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말이야,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어. 후후, 파파랑 조금 닮았으려나. 한 번 정한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아가는 서투른 사람. 얄밉다고 생각했었을 텐데......하지만, 나만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줬어. 요즘, 그를 생각하면 조금..... 외롭지 않게 돼.」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천천히 닦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당황스러워 보이는 발소리.


「파파...... 너무 좋아. 또, 만나러 오기야, 고마워.」

「신에자키, 널 구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로 기뻐.」


  마지막에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구조하러 온 선생님들을 큰 소리로 계속 부르려한다. 하지만 체력을 너무 소모한 탓인지, 휘청휘청하고 나무에 기대고 말았다. 머릿속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다.


「구할 수 있어서......다행이야.」


  질질하고 나무 밑에 주저앉는다. 졸리다...... 엄청 졸리다. 가방을 단단히 껴안은 채, 천천히 눈동자를 닫아간다.
  스르륵 어둠 속으로 의식이 끌려간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코이와 당황한 어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잠 속으로 떨어져갔다.



  ・제 9화 【초등학교 편 ⑦ 전편】



  ◆



  NGO 캠프에 참가한 당초, 상상을 넘은 힘든 현실에 직면한 나는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이건...... 하고 두 손 든 것이 있다.
  ――매일의 식사.
  원래 가리는 건 별로 없었지만, 아프리카의 음식은 얘기가 달라서, 꽤 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의 문화에서, 일본의 쌀에 해당하는 주식은 우갈리라 불리는 음식――흰 옥수수 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은 음식――이다. 하얀 분말로, 일본 요리의 비지의 외형, 먹을 때의 느낌 모두 약간 비슷하고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우갈리를 먹었을 때, 떠오른 것은 운동회의 사탕 먹기 경쟁. 사탕을 필사적으로 찾은 나머지, 입 속에 대량의 가루가 비집고 들어갔을 때의 불쾌감...... 그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뭉친 하얀 그것을 입에 넣은 순간, 입 속의 침이 전부 흡수되는, 푸석푸석한 느낌에 습격당한다. 어쨌든 토해내지 않는 게 고작이다.
  반찬은 무시무시하게 신 토마토와 씁쓸한 양배추 같은 잎으로 만든 야채 볶음. 그리고 턱이 나갈 정도로 엄청 질긴 쇠고기나 양고기. 간도 진한 부분과 싱거운 부분이 나뉘어져, 일본에서의 식사에 익숙했던 내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 자! 사양하지 말고 더 드세요.」


  의료단을 지탱해주는 현지 아줌마 스탭의 미소――나처럼 도움이 안 되는 신입 의사에게도 매우 친절하다――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내심 노고를 참으며 입에 계속 넣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 어쨌든 먹고, 육체에 영양을 보급해야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이건 식사가 아니라 영양 보충제, 맛 따위를 생각해서 어쩔 거냐! 라고 생각하면서 물로 삼키듯이 하루하루 계속 먹었지만, 속으로는 절망할 것 같았다.
  특히 힘든 수술 뒤, 식욕이 없는 위에 무리하게 우갈리를 넣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우 식사 정도로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뇌에 앞서 몸이 거부하는 느낌으로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섭다. NGO에서 보내는 시간이 2년을 지났을 무렵, 난 이렇게 서툴렀던 우갈리를 필두로 한 아프리카의 식사를, 오히려 맛있게조차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갈리가 거의 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거짓말, 희미하게 단 것과 맛있다는 느낌을 즐기고――게다가 만든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입에 넣은 순간에 오늘의 식사 당번 스탭이 누군지 알 정도. 세르게프와 식사할 때 내기해서, 그의 간식――입이 저릴 만큼 쓴 잎이지만 익숙해지면 맛있다――을 빼앗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세리실. 너도 틀림없이 우갈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잘 먹어봐.」

「Non!! 아무리 아키라 선배의 명령이라 해도, 저는 Non!!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몇 번이라도!」


  나와 세리실밖에 없는 식사용 휴게실 안에서, 쿵! 하고 테이블을 치며, 온몸으로 싫다고 표현하는 그녀.
  금발 머리카락, 오똑한 코, 의지를 품은 눈 아래에는 작은 점...... 예전에 마법사 애들이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소녀와 왠지 모르게 닮은 외모. 뭐, 내가 딱히 백인 여자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할 뿐이겠지만......
  어쨌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오기가 서린 표정. 아까 전부터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테이블에 놓인 저녁식사인 우갈리에 손을 대려하지 않는다.


「다른 건 뭐든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우갈리라는 음식만은...... 물론 스탭 분께는 죄송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이건 제 혈통 탓이에요. 그래요...... 요리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 제 몸에 흐르는 그 조국의 피가...... 아무래도 받아들여주지 않아요.」

「아니, 리더 세르게프도 프랑스인이지만, 우적우적 먹던데......」

「monsieur! 뭐라고 하셨죠?」

※ monsieur : Mr.에 해당. ~씨, ~님.

「아, 아니 딱히......」


  하아......하고,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쉰다.
  세리실은 내 외과 제1 조수로서 최근 3개월간, 같은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 살 어리지만, 월반을 계속해서 나와 거의 동시기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녀는 성적 우수라 해도 좋다. 단 NGO의 지옥과도 같은 아수라장에서의 실무경험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수술 중 사소한 부분에서 약점을 보일 때가 있었지만......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유능하고 자신감에 넘쳐, 고집이 세서 한 번 주장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굽히지 않는다.


「그래도 세리실, 오늘은 빵이 없잖아? 안 먹으면 내일이 힘들어져.」

「그......그건 그렇지만요. 그, 그래도, 아키라 선배의 조국인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는 말이 있잖아요」

「쓰는 상황이 달라......」

※ 일본에서도 무사는 밥을 먹지 않아도 이를 쑤신다 : 궁핍한 처지에 있어도 궁핍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존심을 높게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 바꿔 말하면 허세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다.

  할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어는 조금 할 수 있다......는 세리실의 실수를 고칠 힘도 없고,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여기 요리는 반찬이 적어서,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영양도 부족하다. 역시 주식인 우갈리가 필수다. 입에 맞든 안 맞든,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결론짓고 먹을 수밖에 없다.
  다만, 아무래도 우갈리를 먹지 못하는 스탭용으로 빵――옥수수가루가 많이 들어간 무섭게도 딱딱한 것――이 평소에는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 며칠, 보급 부대가 치안 악화로 도착이 늦어져, 오늘 저녁식사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알았어, 세리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게. 안 먹으면 내일, 내 조수는 맡길 수 없어. 알겠지?」

「――!? 그, 그럴 수가......!?」

「현기증이라도 나서, 수술 중에 쓰러지면 어쩔 생각이야?」


  맹렬한 기세로 항의하려고 한 그녀의 기선을 제압하듯이 날카롭게 단언한다. 적절한 반론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우물거리며 분한 듯 고개를 숙이는 세리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어떻게든 생각해낸 타협안을 타이르듯이.


「뭐...... 식사는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어. 알았어, 내가 담당 의사에게 부탁해 둘 테니까, 내일은 리허빌리(Rehabilitation)와 진단을 도와줘. 빵이 오면 또 수술 조수로 들여줄게. 오늘은 반찬을 많이 먹고 허기를 달래, 알겠지?」


  이만큼 설득해도 안 되니까 별 수 없다. 세리실에게는 꽤 세게 말했지만, 실제 우갈리라는 음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서, 베테랑 스탭이라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부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그녀는, 내 눈으로 봐도 실무에서는 많이 노력하고 있다. 식사까지 무리시키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아키라 선배, 알겠어요. 먹을게요. 저, 먹을 거니까」

「아니, 괜찮아. 말이 지나쳤다. 나도 나빴어. 무리할 필요는......」


  푸른 눈동자로 곧게 바라보는 세리실.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귀에 걸치고, 각오한 듯 심호흡을 반복한다. 새하얀 피부와 굴욕 때문일까? 붉어진 뺨.
  그리고 내 말을 끊듯 손을 흔들고는, 어딘가 부끄러운 듯이 작게 중얼거린다.


「괜찮아요. 먹을게요, 저기...... 먹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직접, 제 손을 쓴다...... 는 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식사예절을 배워서......」

「아아, 과연. 스푼을 가져올게.」


  나나 세르게프는 현지 사람들처럼 맨손으로(당연히 손은 씻지만) 우갈리를 반죽해서 적당한 크기로 뭉쳐 먹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을 것이다.
  세리실이 말을 들어준 것이 기뻐서, 나는 스푼을 가져오기 위해 근처에 있는 부엌으로 가려고 일어선다. 그러나 그 때, 내 팔이 세리실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에 살짝 잡혔다.


「아, 저기! 할 수 있으면, 아키라 선배가 반죽해주신 걸 먹고 싶은데요! 그게, 역시 손으로 반죽하는 편이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도 맛있을 테고......」

「그럴까? 스푼으로도 그다지 차이는」

「아뇨, 훨씬 맛있을 것 같아요!」

「아아...... 그래?」


  모처럼 세리실이 타협해줬는데, 여기서 토라지게 하는 것도 좀 그렇다. 나는 테이블에 다시 앉아서, 오른손을 물 티슈로 꼼꼼히 닦는다.
  그리고, 눈앞에 담긴 접시에서 우갈리를 건져, 스시의 샤리만한 크기로 뭉치기 시작한다.


「이 정도 크기라면 포크로 찍을 수 있고, 먹기 쉽겠지?」

「네, 감사합니다. 아키라 선배」


  환하게 미소 짓는 세리실의 접시로, 재빨리 만 우갈리를 몇 개씩 늘어놓아간다. 조금 전까지의 완고함이 거짓말처럼, 어딘가 즐거운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 조금 허둥지둥할 정도로 아름다운 표정.
  그 미소, 아니...... 이곳의 분위기가, 나의 뇌리에 과거의 추억을, 한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아키라 선배, 무슨 일이에요!? 얼굴이 창백한데요?」

「괜찮아.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걱정스러운 듯이 일어난 세리실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아, 심호흡을 반복한다. 또렷이 되살아나는 즐거운 기억...... 그래, 그건 즐거운 기억일 텐데, 어딘가 서글퍼져서.


「정말 괜찮아요? 선배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전혀 슬프지 않아. ......즐거운 기억이야.」

「실례지만, 도저히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걱정스러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보는 그녀. 나는 마치 변명처럼,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머나먼 기억. 생명을 구하는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의사가 되는 것만이 의어머니에 대한 보답이 될 거라 믿어, 공부를 계속하던 그 무렵......


「그게...... 초등학생 때, 그래. 여름방학 전의 기억이야. 수업으로 어딘가의 시설을 견학하러 가게 돼서. 아무튼, 그 때의 나도 성격이 비뚤어진 꼬맹이었고...... 반이 모여서 집단 이동 중이었는데, 영단어장을 몰래 읽다가......」


  이런 일을 이제 와서――게다가 전혀 관계없는 세리실에게――얘기해서 어쩌자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입은 계속 제멋대로 움직여서 말을 뽑아낸다. 마치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세리실은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가파른 시골 산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주의산만이었어, 발밑의 갓길이 허물어졌는데 눈치 채지 못해서. 반에서 혼자 떨어져 행동하던 난, 발을 삐끗해서 실족했지...... 결국 정신 차렸더니 어머니 진료소에 있었어. 오른손 골절...... 지금의 지식으로 말하자면 우상완골외과골절이겠지만......」


  모호한 기억으로는, 전날까지 비가 세차게 내렸다. 상당히 깊은 산 속의 시설 근처에서 가파른 비탈길에서 떨어진 것 같다. 그 정도 상처로 끝난 건, 정말 행운이었으리라.


「그래서 식사도 하지 못해서 사쿠라가...... 아아, 그게...... 여동생 같은 소꿉친구가 간병해줬어. 조금 전 세리실에게 내가 한 것처럼, 눈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준 것을 떠올렸어. 그 때 녀석의 걱정하면서 우는 얼굴이나, 참을 수 없이 맛있었던 주먹밥의 맛, 억지로 간병되어 패닉에 빠진 일 등이 단번에 떠올라서...... 좀 그랬지.」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울어서 토끼처럼 새빨간 눈이 된 사쿠라를 보고, 무심코 웃은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사이가 좋았던 친구――초등학교 졸업 이래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칸나즈키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때가 가장...... 소꿉친구나 친구와 자주 얘기했을 무렵일 것이다. 여름 이후의 나는, 중학교 수험, 그리고 그 뒤의 공부만 보고 완전히 여유 같은 게 없었을 테니까.


「어머, 냉정한 아키라 선배에게도 그렇게 덜렁대는 과거가 있었군요. ......저기, 그런데 그 마드모아젤? 사쿠라라는 분은 그게, 저...... 지금은?」

「사쿠라? 아아...... 일본에 있어. 사정이 있어서, 입원이 좀 길긴 하지만」


  악의 없는 세리실의 말에, 두근하고 가슴 속이 쑤신다. 일본을 출발하기 직전에 본 녀석의 아름다운...... 생기 없는 인형처럼 매우 아름답게 잠자는 얼굴이, 또렷이 생각나 내 가슴을 세차게 뒤흔든다.
  입원했다...는 말에 뭔가를 알아차렸을까? 배려하는듯 상냥한 미소를 띠는 세리실.


「그건...... 빨리 좋아지기를 저도 빌게요. 사쿠라......라는 이름, 결코 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응? 그건 무슨?」


  재주 좋게 포크를 써서 우가리를 입에 옮기는 그녀에게 물어본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꿉친구, 사쿠라와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 여성에게 공통점이?


「제 이름, 할머니가 지어주신 거예요. 할머니의 고향 부근, 우에노 공원의 꽃 이름을 따서」

「그건......」


  NGO로 출발하기 직전, 도쿄의 병원. 소꿉친구가 입원한 방에서 보인 만개한 담홍색 꽃잎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네, 그래요. 사쿠라(桜)는 프랑스어로 세리실(cerisier)이라고 해요. 선배.」


  세리실의 산뜻한 미소. 그것은 어딘가...... 활짝 핀 벚꽃을 떠올려,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


  월, 화, 수 3일간 계속 내린 세찬 비가 거짓말처럼 활짝 갠 오늘, 수요일.
  하지만, 그렇게 화창한 5월 하늘과는 반대로, 우리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일단 포장되어 있지만) 어둑어둑한 산길을 걷고 있다.
  그래, 오늘은 교외 레크리에이션이라 하는 명목상 사회 시설 견학의 날. 아침부터 7km나 걸어 산속의 쓰레기 처리장을 찾아, 하루 견학하는 것이다.


「아하하, 아키라. 왜 그렇게 지친 얼굴이야. 자, 힘내봐. 걷는 건 즐겁잖아.」

「바보, 주변을 봐. 즐거워 보이는 건 너 정도밖에 없잖아? 나 참, 산길이라 빗물이 아직 남았다고. 땅이 엄청 질어, 진짜.」


  오렌지색 티셔츠에 데님 반바지, 마음에 드는 빨간 스니커즈. 산뜻한 물색 배낭을 메고 웃는 친구...... 칸나즈키 코이. 나는 그 친구에게 숨이 가쁜 채로 대답한다.
  요 며칠 계속 내린 비 때문인지, 산길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웅덩이까지 곳곳에 있어서 걷기가 매우 어렵다. 안 그래도 급경사에 어두운 산길...... 출발할 당시에는 활기찼던 동급생들도, 도착 직전인 지금은 지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으으, 다리아파. 발끝이 찡해.」

「후후, 힘내 아키라. 앞으로 조금이잖아. 잡아당겨줄까? 아하하」

「잘도 말한다.」


  내가 입은 흰색 티셔츠 소매를 놀리듯이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는 코이. 정말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여유작작한 표정.
  주위를 보면 아직 여력이 있는 느낌인 학생은 평소에 운동하는 코이 같은 사람들 뿐.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도 7km나 계속 걷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역시, 육상으로 바보처럼 달리는 게 일과인 친구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반이라 옆에서 걷는 코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빈도로 말을 건다...... 싱글벙글 미소 짓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한 명 더. 여유가 듬뿍이란 느낌으로 걷는 학생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릴 적부터 무도로 단련된 공주님......


「히이라기 군? 칸나즈키 군과 쓸데없는 말을 계속 할 틈이 있으면, 좀 더 빠릿하게 굴어주지 않겠어? 내 눈앞에서 러브...... 질질 걷는 것! 같은 반으로서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신에자키의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 차가운......목소리가 등 뒤에서 퍼진다. 평소의 블레이저 코트가 아니고, 데님 미니스커트에 프릴이 달린 흰 셔츠, 검은 스니커즈, 흑발에 빨간 카츄샤를 단 스타일. 등에 맨 큰 배낭에는,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공주가 아니라 여왕님이구만.」

「히이라기 군!? 뭐라고 했니?」


  설마, 내가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나? 지그시...란 느낌으로, 코이를 밀치고 옆에 선 신에자키.
  가느다란 눈썹, 야무지고 요염한 입술, 매끈매끈한 뺨, 무서울 정도로 예쁜 얼굴...... 날카로운 눈빛으로 똑바로 흘겨본다. 도저히 초등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박력.
  모델처럼 반듯한 스타일 때문인지, 프릴이 장식된 셔츠 가슴 부분이 거북할 정도로 부풀어 보였다.


「아, 아니, 아무것도......」

「자, 잠깐. 신에자키. 아키라 옆은 나니까! 원래대로 돌아와, 줄이 흐트러지잖아.」


 뿌우....한 모습으로 볼을 부풀리며, 갈색 얼굴을 조금 붉게 물들인 코이가 큰 소리를 낸다. 신에자키에게 지지 않고, 거침없이 그녀를 밀치고 내 옆에 서는 친구.


「앗...... 어머, 칸나즈키 군. 그렇게 대열이 신경 쓰이면, 반장답게 앞에 서는 게 어때? 나는 이 단정치 못한 히이라기 군을 지도할 테니까.」

「......뭣」


  핑크색 입술은 활짝 미소 짓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신에자키. 코이에게 밀쳐진 곳――즉 내 옆――에 가늘고 긴 발을 뻗어, 슥....하고 비집고 들어온다. 그 동작은 무도를 오랫동안 단련했다는 소문대로, 헛된 동작이 전혀 없이 자연스러웠다.
  코이보다 큰 키, 날씬하고 긴 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찰랑찰랑한 흑발을 귀로 쓸어 올리며, 이런이런......하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아, 아키라! 가만있지 말고 아키라도 말해봐. 응? 응? 내 옆에 있는 쪽이 기운이 나서 빠릿하지? 그치?! 그런걸!」

「어머, 히이라기 군 같은 유형은 따끔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어요. 저라도 실은 옆에는 서고 싶지 않아요. 단지, 터무니없이 칠칠치 못해서 같은 반으로서 할 수 없이. 그렇지? 히이라기 군? 너도 그렇게 자각하고 있지?」


  내 오른쪽에는 신에자키. 그리고 왼쪽에는 친구인 코이가 서서, 거의 동시에 말을 건다.


「아......저기, 아니, 그게......」

「보렴, 그 야무지지 못한 대답. 정말 이러니까.」

「으으으, 아키라! 아키라가 공주한테 확 말해보라구.」


  ――내가 뭔가 나쁜 짓이라도 했던 걸까? 안 그래도 장거리를 걸어서 다리가 아프고, 몸은 피로에 쩔고. 그런데도 이 상황...... 뭔가 탈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적 피로로, 어깨에 맨 가방――안에 든 것은, 사쿠라가 만들어 준 도시락, 물통, 과자, 그리고 후교시에서 구입한 자칭 서바이벌 상품이 들어있다――이 꽉하고 어깨에 먹혀든 생각마저 든다.


「큭, 이쪽은 너덜너덜 다리가 아파서 못 참겠는데...... 어째서 둘 다 그렇게 건강한 거야.」


  어느 쪽이 잘했나 못했나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말을 거는 코이나 자세를 주의하는 신에자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건강한 둘을 동시에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말을 거는 두 명에게서 도망치듯 조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나는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그저 기계적으로 걸으려다가......


「――으앗!?」


  아주 조금――불과 5cm정도――지만 무너져 함몰한 부분에 우연히, 왼발을 헛디딘 나. 균형이 무너진 순간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게 오른쪽 다리 위치를 밟아서 맞추려고....했지만, 거기에 물에 젖은 나뭇가지가 있어서,

  ――빠직, 하는 불길한 소리와 동시에 발밑의 나뭇가지가 꺾여, 내 몸은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길 아래의 급경사면이 똑똑히 보인다. 초록색 풀이 무성한 산의 표면, 끝없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각도. 휘청휘청하고 내 양손이 잡을 것을 찾아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헤매고......


「아키라!」

「히이라기 군!」


  내 몸, 그리고 양팔이 굳건하게 꽉 잡혀 있었다. 중심을 낮춘 태클 같은 자세로, 안전한 방향으로 밀어 넘어뜨리듯이 부딪혀온 사람은 코이. 평소의 귀여운 얼굴이 아니라, 타오르듯 예리한 눈동자.
  양팔을 꽉 잡아준 사람은 신에자키. 미니스커트 안에서 맨다리를 뻗어 슥.....하고 땅을 힘껏 밟는다. 찰랑찰랑한 긴 흑발을 나부끼며, 합기도처럼 묘한 중심 이동으로 내 몸을 안전한 방향으로 비껴주었다.


「괜찮아?! 아키라!」

「히이라기 군!, 상처는 없어?!」


  털썩하고 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 허리에 매달린 친구, 팔을 잡은 신에자키가 동시에 말을 건다.
  두 명의 진지한 목소리, 강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공포로 혼란에 빠질 것 같았던 마음을 달래간다.


「아......으, 응. 고, 고마워. 코이, 신에자키, 살아났어......」


  그렇게 흔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순간, 눈에 비친 경사면이 되살아난다. 저런 경사에서, 균형을 잃은 내가 그대로 굴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이 좋아도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아니,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우으으으으읏, 바보 아키라!! 진짜, 진짜, 진짜아아, 저어얼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

「――읏, 히이라기 군? 내 반에서 부상자 같은 게 나오면 엄청난 웃음거리야. 정말로 당신이란 사람은! 비틀거리지 않게 확실히 감시할 테니까!」


  코이의 반 울 것 같은 얼굴, 신에자키의――화내고 있겠지――붉게 물든 뺨. 전부 거절할 수도 없고, 고분고분하게 끄덕인다.


「자, 잘 부탁합니다......」


  일어나서 어깨에 짐을 다시 메고, 나는 다시 걸어나갔다. 양 옆을 코이와 신에자키에게 끼여 마치 연행되는 범인처럼.


 ◆◆◆


  겨우 시설에 도착, 긴 휴식을 취한 뒤 간단하게 첫 견학을 했다. 그걸로 오전은 끝. 기다리고 기다린 점심식사 시간.
  그토록 기진맥진했던 게 거짓말처럼, 모두 들떠서 친구와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아키라, 그 튀김, 엄청 맛있을 것 같아. 으으......좋겠다.」

「나 참, 먹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자, 좋을 대로 가져가. 그 연어랑 바꿔서.」

「우응. 에헤헤, 언제나 고마워 아키라. 자 여기.」


  쓰레기 처리 시설(리사이클 센터)이라는 명칭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밝은 시설의 부지 안. 친구와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서 마주보고 앉아, 우물우물 입과 젓가락을 움직인다.
  코이의 도시락은 만들어주는 할머니의 취향이 가미되어, 야채 조림이나 생선구이를 중심으로 한 메뉴. 쌀도 현미를 넣어 실로 건강에 좋아.....보이지만, 고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게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우리들, 초등학생에게는 좀 그럴 것 같다.
  그것과는 반대로, 사쿠라가 만들어준 도시락은, 새우 필라프에 튀김, 계란말이, 양배추와 완두콩을 볶은 것, 햄과 양파로 만든 일본식 샐러드로 양이 상당했다.


「오옷, 이 계란말이. 안에 치즈랑 참치가 들어있어. 사쿠라 녀석, 아무리 그래도 칼로리 너무 많잖아. ......아무튼, 맛있긴 하지만.」

「헤에, 도시락 사쿠라가 만들어줬어? 흐응, 당연히 호화롭겠네.」


  밝은 5월의 햇볕을 쬐며 먹는 도시락은 매우 맛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도, 햇볕에 탄 갈색 얼굴로 활짝 미소 지으며, 우물우물하고 볼이 미어지게 밥을 먹고 있다.


「아니, 녀석의 취미일 뿐이야. 돌아가면 빠짐없이 감상을 말해야 한다니까? 못견뎌난다고.」

「아하하, 사쿠라는 귀여운 데가 있구나.」

「어디가 귀엽다는 거야.」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얘기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데, 밖에서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 정말 즐겁다. 햇볕은 따스하고, 풍경은 산속이라는 이유도 있어 신록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귀가하는 것도 7km 걸어간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고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동급생들도, 사이가 좋은 친구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는 모습.
  그런데 거기에......


「앗, 칸나즈키 군, 히이라기 군도. 찾고 있었어. 있잖아, 공주...... 신에자키 못봤어?」

「아, 사이도 시바. 공주? 난 못봤는데...... 아키라는 봤어?」

「아니. 평소에 같이 있던 사람들하고 있는 거 아냐?」


  흑발을 땋아 내린 머리에 안경을 쓴, 그야말로 성실할 것 같은 학생――옆 반의 반장, 사이도 시바가 말을 걸었다.
  약간 부드러운 체형에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그게 아니더라구, 어디에도 없어. 설마 돌아간 게 아닐까? 이래서 고집불통 아가씨는 곤란해.」


  아버지가 소방대원, 몇 년 전에 이 마을에 부임했을 때, 가족과 함께 이사 온 사이도 시바는 이른바 『타지 사람』이다. 하지만 매우 성실하고 착실, 그리고 표리 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하지만, 그래서 신에자키를 정점으로 한 그룹과는 좀 사이가 나쁘......다고 할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상태. 사이도 시바는 신에자키가도, 신에자키가를 추종하는 주변 친척들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


「아 됐어...... 칸나즈키 군이랑 히이라기 군. 공주와 같은 반이지? 혹시 보이면 선생님이 부른다고 전해줄래?」

「응, 알았어.」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사이도 시바. 그 야무진 뒷모습을 배웅한 뒤, 나는 코이와 다시 얼굴을 마주본다.


「흐음, 선생님이 부른다라...... 아, 맞아! 선생님 말로는, 여기에도 수상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 같다고, 아까 얘기했어. 전에는 학교였고, 으으.... 좀 무섭네.」

「수상한 사람이라니...... 그거, 전교조회에서 주의 받은 사람이지?」

「응, 맞아. 아하하, 아키라치고는 드물게 기억하고 있었네. 좀 의외.」

「시꺼」


  코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학교 도서관 창문으로 본 신에자키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찾는 듯 여유가 없는, 마치 미아 같았던 공주의 분위기.


「아무튼 무서운 얘기는 놔두고, 공주. 어디 갔을까. 아까 전에는 즐겁게 보였는데...... 스트레스려나? 엄마가 재혼한다 해서 지금 집이 큰일인 것 같던걸. 공주의 생일파티 준비도, 여러 가지로 문제뿐이라는 소문이고」

「헤에...... 생일파티」


  코이의 얘기에 거의 건성으로 대답.
  머리에 신에자키의 여러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학교 체육관 근처에서 만났을 때, 도서관에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화났던 표정. 그리고......아버지에 대해서 말해줬을 때의 자랑스러운 듯한, 정말로 기쁜 듯한 미소.


「......」

「아키라, 듣고 있어?」


  머리 깊숙한 곳에서, 뭔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맥박 쳐, 온몸에 불타는 듯한 혈액이 흘러든다. 신경이 한계까지 팽팽해진 활처럼 긴장되어 간다. 그것은 마치 전쟁하러 가기 직전의 전사.


  ――움직여라, 손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자, 잠깐 아키라? 괜찮아?!」


  눈앞에 있는 생명을 구하고 싶다, 불합리한 슬픔을 아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바라기 때문이야말로. 『나(オレ)』는...... 그리고 『나(ボク)』는.


「코이, 잠깐 미안.」

「아키라!? 잠ㄲ, 도시락 둔 채로 어딜 가는 거야!?」


  전에 산 서바이벌 상품을 담은 가방만을 들어, 코이의 놀란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달린다. 다리가 가는 방향, 그것은 몸이 알아서 정해주었다.
  뇌리에 풍경이 떠오른다. 그것은 경험한 적이 없는 기억. 마치 내가 체험한 것처럼, 또렷하고 세부까지 현실적이다.

  ――오른 팔이 골절된 데다가 온몸에 강한 타박상을 입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 어머니의 진료소, 침대에 누워있다. 바로 옆에는 사쿠라, 그리고 친구인 코이가 있고, 이것저것 말을 걸고 있었다.


『정말, 바보 아키라. 신에자키가 예전에 아빠랑 자주 캠프하러 온 산이 아니었으면, 구조하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라. 진짜...... 공주한테 고맙다고 해. 정말이지, 이럴 거면 억지로라도 같은 반에 넣었어야 했어!』

『맞아요, 오빤 바보. 등산하면서 단어장을 읽다니......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와.』


  하얀 병실 안, 침대에서 도망쳐서 숨을 수 없는 나를, 이때라는 듯이 꾸짖는 두 명. 화난 듯, 안심한 듯 복잡한 표정.


『10미터 이상 실족했었으니까. 나,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가서. 그 때 공주가, 그 위치――아키라가 떨어진 곳――라면, 처리장 옆의 좁은 곁길을 더듬으면 갈 수 있다고 선생님한테 말해서......』


  ――이건 결코 『나(ボク)』의 기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オレ)』의 추억일 것이다. 어째서 지금, 이런 게 멋대로 떠오르는 거지? 그건 어떻든 상관없다.
  단지 그 기억에 이끌리듯이 나는 달려서, 리사이클 센터 옆, 좁은 곁길로 들어가, 앞을 향해 나아간다.


「신에자키!!」


  거기서 나는 그녀를 발견한다.
  이마에서 흐르는 새빨간 피.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지면에 누워있는 모습을.



  ・제 8화【초등학교편 ⑥ 후편】


  ◆


  ――코이와 처음으로 만났던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른해질 것 같은 더위 속에서, 코이는 다른 현에서 내가 사는 마을의 학교, 같은 반으로 전학 오고, 그리고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딱히 친해진 건 아니고, 그저 아는 사이... 라는 상황이 5학년까지 계속되었다.
  5학년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된 4월, 사소한 일로 어머니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무언가에서 도망치듯이――혹은 의어머니와의 유대를 갈망하듯이――공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뒷모습을 동경해서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순수한 동기만이 아니고, 분노나 공포를 털어놓는 대상으로 공부를, 나아가서는 의사를 목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질척한 앙심과 분노, 그리고...... 혹시 의사가 못되면 의어머니에게 버려지지 않을까? 이런 아무 근거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이 등에 철썩 달라붙어, 어떻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코이가 말을 걸어준 때는, 마침 그랬을 무렵. 날마다,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던 내게, 잘도 얘기할 마음이 들었다고......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저기......히이라기, 기억나? 나, 칸나즈키 코이라고 해. 친구가 되지 않을래?」


  어느 금요일의 방과 후, 주황빛 석양이 내리쬐는 교실에서, 계속 공부하던 내게 똑똑히 다가온 말. 아무도 없는 교실, 붉게 물든 반 친구들의 책상과 의자. 운동장에서 달리기라도 했던 걸까, 땀으로 갈색 피부에 체육복이 붙은 채 활짝 미소 짓는 동급생의 모습.


「왜?」

「왜라니, 그......기억 안 나? 2학년 때, 네가 날 도와줬던 일. 굉장히......기뻤어. 그래서, 뭔가 할 수 없을까 해서」

「그런 거 기억 안 나고, 알 게 뭐야. 쓸데없는 참견.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마.」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굉장히 차가운 태도를 취했다. 그런 지독한 얘기가, 5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코이와 주고받은 말.


「그래. 그래도...... 또 얘기해도 돼?」

「몰라, 마음대로 해. 어차피 상대하지 않을 거니까」


  그때는 내 실력을 알기 위해, 9월에 실시되는 전국 초등학생 통일 모의시험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다른 일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갑자기 말을 건 칸나즈키 코이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전학생에 2학년 때는 반 친구, 3, 4학년은 다른 반이었던 것 정도밖에 모르고 흥미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건방진 애송이였을 거다. 평소 얘기하는 사람은 사쿠라와 어머니뿐, 학급회의 같은 데서도 전혀 발언하지 않고 참고서를 계속 푸는 나날들. 다른 급우들의 반감을 사는 것도 당연했지만, 그것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학교 선생님은 어머니가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인 것, 신에자키가와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신에자키가 이외에 의사가 있다는 것이, 일부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였던 것 같다――을 두려워해 나를 종기처럼 취급해서, 그렇게 불손한 태도도 주의 받지 않았다.


「히이라기. 나, 반장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거 도와줘. 학급회의에서 정해진 거 들었지?」

「뭐어? 뭐야 그게!」

「포기해. 따지고 보면, 네가 전혀 참가 안 했던 탓이고. 후훗, 뭐 나도 도와줄 테니까. 자, 빗자루 들어. 아하하, 둘이서 하면 즐겁고, 빨리 끝난다구, 그치?」


  그렇게 오만한 나를 이것저것 보살펴주고, 가끔 불평하며 마음 써주는 코이. 이따금 반장 권한이라며 억지로 청소나 잡일을 하게 했다. 엄청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명령으로 반 억지로라도 하지 않았다면, 반 애들의 불만이 한 번에 폭발해서, 나는 싸움이나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초등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거기서 미래를 위한 교우관계를 배운다. 그것은 공부 성적과는 관계가 없지만, 어떤 의미로는 공부보다 훨씬 중요한 일. 그런 사회성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코이 덕분에――다소 억지로――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당초, 성가시다면서 코이를 계속 거부했지만, 반장 권한으로 명령되어 일하던 중 조금씩 말을 하게 되어, 그것이 참고서 대신으로 발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헤에, 반장도 현 외 중학교에 진학하는구나. 역시 도쿄 공립 아니면 사립?」

「아, 아마 도쿄였나? 어쨌든 사립이야, 응. 아ㅃ......아니 친척. 그, 옛날에 만난 적 있는 친척이 거기 오지 않을까? 해서. 그래도 고민 중이야.」

  우리들이 사는 시골은 관동 서북부에 있어서, 극히 일부 학생은 도쿄에 있는 중학교에 수험 진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사가 목표인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었을 때에, 코이도 마찬가지로 수험 진학이 목표라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를 서로 얘기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터놓아갔다.
  그렇게 하면서 등 뒤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공포, 불안, 분노 같은 부글부글함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
  그리고 9월, 여름방학이 끝났을 무렵에는 코이는 내 얼마 안 되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5학년 2학기에 접어들어, 점심시간에 사쿠라와 같이――코이와 사쿠라 사이는 꽤 삐걱거렸지만――셋이서 도서실에서 보내는 일도 늘어났을 무렵, 초등학교 전국 모의시험 결과가 발표되고......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



 ◆◆


  후교의 중심 시가지에는, 보행자 전용의 넓고 청결한 도로가 있고――구석에서는 화단이 끝없이 나란히 놓여 있어 각양각색의 꽃이 핀다――거기는 빨간 벽돌 같은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도로는 행사가 주로 열리는 곳이라...... 현재, 많은 커플이 북적이는 상황이다.
  연령은 정말로 다양한데, 가장 많은 층은 고등학생부터 25세 정도까지의 커플이지만, 사이좋은 할아버지 할머니 짝도 있는 한편, 작은 아이를 동반한 부부도 있다. 그리고 수는 적지만, 우리들만 한 나이로 보이는 초등학생 커플도 있었다.
  대충 보기에 총 참가자수, 100조 정도라는 느낌이려나?


「우웃, 아키라. 긴장돼, 내(ボク)......가 아니라, ㄴ, 나(私)」

※ ボク : 남자가 주로 쓰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
   私 : 남녀 모두 쓰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


「코이, 이제 포기하고 평소대로 얘기하는 게 어때? 나(ボク)라고 말해도 들키지 않을 거야. 어딜 봐도 귀여운 여자애로밖에 안 보이는데」


  지나친 인파에 서로 떨어지지 않게 확실히 손잡은 채로, 주변에 들리지 않게 코이의 귀 가까이서 속삭인다.
  산 지 얼마 안 된 물색 헤어밴드를 쓴 친구. 같이 구입한 붉은 프레임의 안경은, 물색 파커의 가슴 부분에 액세서리 대신 달려있다. 핑크빛 입술은 글로즈를 발랐기 때문인지, 반들반들 볼록한 느낌으로 윤기를 띄고, 원래 긴 속눈썹도 뷰러로 곱게 다듬어져 있었다. 크게 뜬 두 눈동자가 더욱 강조되어, 완벽한 여자애, 단발 보이쉬계 미소녀의 모습이다.


「――우우웃, 그, 그래? 그, 그럼 평소대로 얘기할까? 헤, 헤에......아, 아키라 눈으로 봐도, 나(ボク), 귀, 귀엽게 보여? 헤에, 그렇구나. 흐-응......」

「그거야 그치, 빌어먹게 건방진 사쿠라보다 훨씬 귀여워 보여...... 그나저나 봐, 예선 결과 발표야.」
 

  아무리 상급 때문이라고 해도 여장한 것이 부끄럽겠지...... 뺨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친구.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완전 미경험이지만――조금이나마 커플답게 보이려고 에스코트하듯이 코이의 손을 잡아, 둘이서 예선 결과가 붙은 게시판으로 간다.
  예선 결과......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후교 상점가 커플 콘테스트에 예선이 있다는 것이다. 친구가 손에 넣은 팸플릿에 의하면 이번에 제 3회를 맞이하는 이 콘테스트는 해마다 참가자가 늘어나서, 이번부터 접수와 동시에 필기시험이 시행되었다.
  시험 내용이 뭐냐면, 후교시에 관한 문제와 퍼즐 같은 것으로, 일정 성적을 받은 커플만이 본선에 나갈 수 있는 시스템.


「앗, 있다! 해냈어, 있다구 아키라!」

「응, 역시 럭키였네」


  코이가 가리키는 곳, 게시판에 붙은 종이에는 우리들의 등록 번호가 확실히 쓰여 있었다.
  그런데 행운이었던 건, 몇 개월 전 사회 수업으로 후교시에 관한 수업이 있었던 거겠지. 그것 덕분에, 상당히 난관이라고 생각된 예선 시험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퍼즐에 관해서도 감이 예리한 코이와 둘이 의논하면서 풀었기 때문에 불안은 별로 없고, 의외로 합격할 수 있을지도? 이렇게 내심 생각했다.


『그럼, 예선을 통과한 커플 20조는 이쪽으로 와주세요. 반복합니다. 예선을......』

「좋아, 가자구.」

「으응, 지금부터가 실전이야.」


  긴장한 코이가 속삭이는 소리와 동시에, 이어진 왼손을 꼬옥......하고 쥐었다. 친구의 수줍은 듯한 붉은 뺨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젖은 눈동자, 그리고 글로즈로 빛나는 입술. 기쁜 듯이 수줍어하는 미소.


「아, 아아...... 그러네.」


  순간, 진짜 여자애――게다가 엄청나게 사랑스럽다――로 보여, 허둥지둥하며 대답했다. 나는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하고 자신에게 살짝 혐오감 같은 감정마저 생긴다.


「있잖아, 아키라...... 나, 이거 잊지 못할 거야.」


  그 때, 마치 혼잣말처럼 작은 코이의 군소리. 시선을 향하자, 기쁜 듯이 얼굴을 붉히고 미소 짓는 코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아무튼 괜찮으려나......라고 나도 기쁘게 생각했다.


 ◆◆◆


  술렁이는 소음을 들으며, 나는 꿀꺽하고 크게 침을 삼킨다. 특설된 단상에서 아래를 바라보자, 우리들 본선 진출 커플을 보는 많은 시선이 꽂힌다. 그렇게 사양 없는 시선에 노출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긴장한다.
  그런 내 심경을 눈치 챈 듯, 꼬옥......하고 팔을 잡아온 코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있잖아, 아키라, 괜찮아? 나, 기권해도 좋은데」

「아, 아니...... 약간 깜짝 놀랐을 뿐. 괜찮아. 힘내자.」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선을 받고, 내 기분은 분발한다. 마치 장기를 스케치할 때처럼, 다른 일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단상을 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시선, 사양 없는 말을 전부 의식에서 지워간다. ――집중, 이 단상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생각한다.


『그럼 시작합니다. 제 3회 후교시 베스트 커플 콘테스트! 주제는 이거다!』


  사회자의 소리와 동시에, 우리들 20조의 본선 진출자 앞에 대그락대그락하고 긴 받침대가 옮겨진다. 하얀 옷감이 위를 덮어 가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단번에 벗겨진다.


「응? 이건 과자잖아.」

「그러네, 엄청 보통 초콜릿 스틱인데?」


  우리들 앞에 놓인 것은, 접시에 가로놓인 초콜릿 과자 5개 정도. 가느다랗고 사각사각한 막대기 모양의 프레첼에 초콜릿이 코팅된 것.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과자로, 붉은 포장은 누구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룰은 간단, 처음에 입에 물 때 빼고는 손을 일체 쓰지 말고 과자를 전부 먹은 팀이 승리입니다. 단, 도중에 과자가 부러지거나 해서 떨어지면 실격. 그렇게 둘이서 사이좋게 먹는 것입니다. 즉 같은 한 과자의 양단을 서로가 입에 문 채로 시작해주세요. 아시겠죠? 그럼 준비를!』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홀쭉한 막대기 과자의 형태를 보고는 납득했다. 즉 이건......


「그런 거겠지. 코이, 그럼 그쪽 구석을 입에 물어봐. 자, 응ー」

「앗, 그, 그런, 이건...... 아, 아키라...... ㄴ, 나, 마음의 준비가, 우와앗, 에, 그래도...... 키, 키, 키, 키스하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착란한 듯이 머리를 붕붕 흔드는 코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내 얼굴을 더 할 나위 없을 정도로 빨간 얼굴로 바라본다. 순간, 내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눌러 참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작게 단언한다.


「코이, 진정해. 하지만 우리들 남자끼리지? 혹시 입술이 닿는다 해도 인공호흡과 마찬가지잖아. 남자끼리 하는 키스는 안 세어도 되잖아. 자, 그것보다 부러뜨리지 않게 조심해.」

「그, 그, 그, 그런 말도 안 돼. 그래도......나, 나...... 우우웃, 정말, 몰라! 바보 아키라, 후회하지 마!!」


  눈동자를 닫고 에잇하는 느낌으로 입술로 한 쪽 구석을 무는 코이. 알고는 있었지만, 서로의 입술 사이가 20cm도 안 되는 매우 근접한 거리다. 반장의 빨갛고 매끈매끈한 피부, 글로즈가 칠해진 요염한 입술까지 또렷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감도는 레몬 같은 좋은 향기.
  이런, 집중이다. 그래...... 수술에 도전하는 것 같은 집중을!


『그럼 스타트!』


  사회자의 신호로 나는 단번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척척 앞니를 써서 단번에 과자를 먹어가......지만, 눈앞의 코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이 빨갛고, 눈동자를 꼭 닫은 채, 잘 보면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소리를 내서 뭐라 하고 싶지만, 자칫 입을 잘못 움직이면 과자가 떨어진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코이가 이대로 불안정하면 언제 과자가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별 수 없다. 나는 양손을 펴서, 친구의 어깨를 단단히 껴안아 고정하고, 그대로 얼굴을 접근해 과자를 먹어간다.


『오오, 자료에 의하면 지금 대회 이색의 초등학생 커플, 히이라기 아키라 군과 칸나즈키 아이 양, 매우 사이가 좋아서 대회장 분위기도 고조된다!』

「꺄아아아앗」 「우오오오옷!」 「아, 아키라 오빠앗, 칸나즈키 선배에!!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오옷!!」


  다른 환성 따위 신경 쓸 수는 없다. 코이가 빨리 진정되도록, 꼭 껴안은 채 척척 첫 번째를 입술 빠듯이까지 먹는다. 그 틈새, 불과 1cm도 안 될 정도이려나? 진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것 같다.
  입술이 닿지 않게 조심해 혀를 써서, 코이의 입 속으로 과자를 밀어 넣고, 힘을 줘서 가녀린 몸을 꼭 껴안으며, 빨갛게 물든 귓전에 속삭였다.


「코이, 내가 할 테니까, 그대로 가만히 있어, 괜찮아? 기분은 나쁘지 않아?」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 아키라...... 미안. 나, 나, 뜨거워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끄덕......하고 떨면서도 수긍하는 친구.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새 과자를 입술에 물게 한다.


「코이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갈게. 가만히 있어」

「응.....으응.....」


  과자를 입에 물고 뺨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친구. 마치......영화의 키스 씬 같다고 순간 생각해서, 두근하고 심장이 뛴다. ――안 돼, 집중, 집중하자.
  다시 코이의 어깨를 꼭 껴안고,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계속 먹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하나, 또 하나 과자가 사라져간다. 더더욱 높아지는 주위의 환성...... 하지만 전부 무시한다.
  지금 이 순간, 과자를 먹을 때까지는...... 이 세상에 코이와 나밖에 없다. 오늘 본 영화, 아름답지만 조금 슬픈 라스트 씬처럼.



 ◆◆◆◆


  쿵, 쿵하고 리듬처럼 반복되는 선로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말 없는 채 돌아가는 전철 좌석에 앉아 있다. 어느 쪽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눈이 마주치면 코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헤어밴드는 이미 빼고 글로즈도 지워, 평소의 친구와 변함없을 테지만, 나도 어딘가 코이를 의식해서 부끄럽다. 진짜로 정상이 아니다......하고 몇 번째가 될지 모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아, 아키라, 저, 저기...... 미안해. 내, 내가 적극적으로 했으면, 우승은 무리라도, 3등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신경 쓰지 마, 도서 카드 받았고. 거기에 자칫 입상했다면, 사진 같은 게 엄청 찍혔을 거잖아. 분명 큰 문제였을 거야.」


  코이가 간신히 말을 한다. 나는 내 부글부글한 이상한 기분을 바꾸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밝게 대답한다.


「그, 그래? 그래도 확실히 그럴지도. 우승한 커플은, 엄청나게 둘러싸였던걸.」

「응. 게다가 서투르게 눈에 띄면, 지인이 알아챌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 대회장에는 상당히 많은 관객이 있었다. 혹시, 그 중에는 우리들이 아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이는 가명――아이(愛)라는 이름――으로 등록했지만, 혹시 들켰을 가능성도 있다. 뭐, 그 인파에 그렇게 들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모처럼 아키라가 헤어밴드 사줬는데.......」

「나 참, 괜찮다고. 친구잖아.」


  거기서, 나는 팟하고 떠올린다. 멋진 헤어밴드나 화장품을 산 잡화점, 거기서 코이는 확실히......


「그것보다 코이, 너 말야. 관서 중학교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어?」

「......응」

「어째서야? 도쿄에 있는 같은 중학교에 가자고 했잖아!」


  왠지 모르게 고개를 숙인 친구. 그 가느다란 팔을 잡은 채, 나는 점점 더 열을 올려 말한다.


「미안해 아키라, 말을 꺼내기 어려워서, 아빠가 교토에서 살고 있어서, 전부터 오라고 했었어. 거기에, 이대로 여기에 있어도...... 괴로우니까」

「괴로워? 괴롭다는 게 뭔데? 고민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 항상 날 도와주고는, 그런데도 중요한 때는 입 다물기야?!」

「잠깐, 아키라, ......팔, 아파. 그리고......미안. 무슨 일이 있어도 말 못해. 그래도 오늘 일로, 조금 구원받았어.」


  마치 울 것 같은 소리..... 나는 무심코 손을 떼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키라. 나, 이 헤어밴드,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


  전철 창으로 내리쬐는 석양. 거기에 비춰지듯이, 활짝 미소 지으며 말하는 코이. 그것은 매우 사랑스러운 미소인데...... 어딘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심코 꼭 껴안아 위로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억지로 누른다.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냉정을 되찾는다. 코이는 친구인데.


「코이, 5학년 때 말이야. 네가 억지로 말을 걸어줘서...... 정말로 다행이었고, 감사해. 몇 번이나 감사해도 부족해. 사실이야.」

「아니. 요즘 들어, 아키라가 엄청 안정된 느낌이 들어. 분명, 내가 없어도 이제 괜찮아. 응......괜찮아...... 미안......아키라, 조금만......여기, 보지 말아줘......부탁해」


  ――그대로 다시 우리들은 침묵에 싸여, 전철로 집에 간다. 뒤에서 들리는 코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져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이 흐른 뒤, 전철은 역에서 멈춘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이네...... 그 때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니까! 어리광 들어줘서, 저, 정말 고마워!」

「응. 또 보자, 친구.」


  자전거에 뛰어 올라타고,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친구의 등. 그것을 배웅하며, 나는 오늘 산 가방을 어깨에 다시 맨다. 약간 묵직한 무게...... 하지만, 그 무게가 내 정신을 확실히 되찾게 한다.


「앗, 아차......」


  그 때, 또 신에자키의 여드름에 대해 묻는 것을 깜박했던 것을 떠올렸다. 할 수 없다, 오늘 밤은 사쿠라가 집에 있을 테니......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하지만, 녀석한테 물어볼까.
  하고, 생각을 정리한 뒤 집을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오빠, 어서 오세요. 엄마가 차로 여기까지 보내줬어요. 같이 돌아가자」

「오, 사쿠라? 헤에, 그거 잘 됐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역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불쑥하고 소꿉친구가 모습을 보였다. 청초한 느낌인 황색 원피스에, 심플한 스니커즈, 싱글벙글 기뻐 보이는 느낌으로 미소 짓는 사쿠라.


「헤에, 그래요? 후후후, 나도 오빠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답니다.」

「왜, 왠지 말하는 게 이상한데? 또 바보 됐어?」

「..........읏, 그럴 리 없잖아요! 자, 빨리 집에 돌아갑시다.」


  꽈악하는 느낌으로 팔을 잡히는 나. 그대로 질질 끌려갈 기세로 간다.
  ――뭐, 뭔가 위험해. 엄청 위험한 기색밖에 안 느껴져.


「사, 사쿠라? 무슨 일이야?」

「아뇨, 아무것도. 아, 맞다. 오빠? 내일 일요일, 『히이라기 아키라 1일 자유권』 쓸 거니까, 각오해 두기예요.」

「에, 에엑!?」


  변함없이 싱글벙글 미소 짓는 사쿠라. 하지만 오랜 세월의 감이 속삭였다. 얘 엄청나게 화났다....고. 그리고, 팟하고 짐작이 간다. 혹시...... 이 녀석?


「사, 사쿠라? 너, 오늘 낮에 어디 있었어?」

「후후, 글쎄? 그건 오늘 밤 차분히 얘기하도록 하죠.」

「오, 오해야, 사쿠라. 오해......」

「어디가 오해인지, 부디, 꼬치꼬치 캐내고 싶네요, 그치? 오빠?」


  새빨간 석양이 찌르는 도로. 집으로 향하는 그 길을, 소꿉친구에게 꽉 붙잡힌 채, 나는 반 처형대로 가는 죄수 같은 기분으로 계속 걸어갔다.

 

 

8초등학교 편 전편

 

 

 ◆

 

사람의 기척이 없는 오래된 역의 대합실, 마치 골동품처럼 너덜너덜한 목제 벤치에 앉아서, 나는 멍하니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은 9, 그러나 시계 바늘은 이미 910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도 뭐 초조해할 건 없다. 920분에 출발하는 전철에 늦지 않으면 되니까. 코이는 금방 올 거다.

 

 

후아암

 

 

길게 발을 뻗고 기지개를 펴면서, 오래된 역 안을 바라본다. 출구 근처에 종이컵으로 나오는 음료 자판기, 입구 옆에는 핑크색 공중전화와 너덜너덜하게 헤어진 전화번호부가 난잡하게 놓여 있다.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등골이 꼿꼿하다) 역무원이, 오래된 투명 유리의 저 편에서, 말없이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감색 제복에는 주름 하나 없이, 제대로 다리미질이 되어 있다.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이 역은 언제 와도 변함없다......는 느낌이다. 어딘가 묘한 안심감 같은 것까지 느끼면서, 내가 멍하니 역무원 분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미안, 그리고 안녕, 나가려다가 할아버지한테 잡혀서 말야.

 

 

조금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사과하면서 코이가 역의 대합실로 뛰어 들어왔다. 자전거 열쇠를 어깨에 맨 가방에 넣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감는다.

 

 

괜찮아. 그것보다 홈에 가자고. , . 먼저 사뒀어.

 

고마워 아키라. 올 땐 내가 낼게.

 

 

하얀 이를 보이며, 화려한 미소를 띤 친구의 손에 표를 건네준다. 전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겠지. 가느다란 목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취미인 육상으로 인해, 건강해 보이는 밝은 다갈색으로 탄 피부, 갈색에 약간 곱슬기가 있는 부드러운 숏컷. 허벅지가 드러나는 데님 숏팬츠, 발 밑은 빨간 하이 컷 스니커즈, 그리고 물색 후드가 달린 파커.

코이에게 매우 어울리고, 그야말로 운동을 매우 좋아하는 느낌인 차림이지만, 중성적이라고 할까.......그것보단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애로밖에 안 보인다.

그것은 코이의 큰 눈동자나 귀여운 얼굴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보통의 반 남자친구와는 다르다. 친구, 칸나즈키 코이에게는 어딘가 묘한 느낌이 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마치 요정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분위기......

, 그런 건 상관없이 코이는 둘도 없는 친구지만.

 

 

으으으, 엄청 기대돼! 계속 보고 싶었던 걸. 진짜 엄청 기다려져.

 

어떨까? 영화라는 건, 예고편이 가장 재미있는 것 같으니

 

증말, 바로 그렇게 심술궂게 말해. 아니 뭐, 그런 영화도 있는데, 오늘은 아니야! 라고 들었어......

 

 

오늘 볼 예정인 영화 얘기를 하며 사람이 없는 홈으로 간다. 큰 몸짓 손짓을 섞으며, 열정적으로 배우 이야기를 하는 친구. 상당히 기대됐는지, 싱글벙글 미소를 띠며 영화 줄거리로 말을 건다.

 

 

......그래서 말인데, 이 시각효과가 엄청난데, 그것만이 아니라...... 근데, 잠깐 아키라, 증말... 제대로 들어줘

 

아하하, 듣고 있다니까

 

 

말을 들으라고 하듯이 내 팔을 잡고 흔들며 말을 거는 코이.

친구이자 반장이기도 한 코이의 취미는 영화감상으로, 꽤 굳건한 신념이다. 국내 영화, 해외 영화, 아시아계를 가리지 않고, 장르는 연애부터 코미디, 스플래터계 호러까지, 영화라는 이름이 붙는 거라면 전부 좋아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들의 마을에는 영화관 같은 세련된 건 없어서, 영화를 보려면 전철로 약 30분 정도 걸리는 근처의 큰 시――후교시로 이동해야 한다.

 

 

, 전철 왔다! 자 아키라

 

, 너무 잡아당기지 마, 그렇게 급하게 굴면 위험해......

 

 

꽤나 기대했는지, 나를 끌고 가듯이 전철로 들어가는 친구. 키가 작고 가녀린 체격 때문에, 이렇게 순진하면 마치 어린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보는듯한 기분이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아키라가 할아버지를 설득해 줄 때까지, 내내 후교시에 못 갔는걸. 지금도 영화관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두근두근하다구

 

 

내 팔을 잡아당기며 어깨 너머로 활짝 미소 짓는 친구, 코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셋이서 생활한다.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는데, 그 할아버지라는 분이, 원래 어떤 대학의 훌륭한 교수에 대단한 위압감이 있는 인물. 부모님이 없는 단 혼자만인 손자――즉 코이――를 응석부리게 하는 일 없이, 엄격하게 길러온 것 같다.

그래서 몇 개월 전까지, 코이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는 게 금지돼서, 후교의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을 별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득이라니 아니, 그런 건 우연이고. 게다가 코이한테는 폐가 됐을 뿐인 것 같은데

 

아니, 폐 같은 게 아냐. 감사해, 고마워 아키라

 

 

지금부터 몇 개월 전, 어머니의 진료소에 건강진단으로 방문했던 코이의 할아버지와 장기로 승부했다, 라고 해도 할아버지는 말을 뺀 핸디캡전이었지만.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든 빠듯이 이긴 나는, ――그 때, 전국 초등학생 능력 모의시험에 관해서 도움을 준 지 얼마 안 된 코이에게 보답하고 싶어서――내가 함께라면, 이라는 조건으로 코이가 후교시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코이의 할아버지는 일부러 나한테 진 것 같지만.

 

 

, 상관없나. 거기에 나도 코이가 쇼핑하는데 어울려줘서, 피차일반이야.

 

후훗, 그렇게 말해주면 기뻐. 그래도 아키라는 의외로 길을 잘 잃어서, 내가 없으면 위험할지도. 아하하

 

시꺼

 

 

서로 웃으며, 나란히 전철 좌석에 앉는다. 나란히 두 대가 달리는 전철 안은 텅텅 비어 있어서 초등학생인 우리들이라도 부담 없이 앉을 수 있었다. 지리리리리.......하고, 고막은 물론 두개골까지 흔들릴 것 같은 소리가 갑자기 끝나고, 쿵하고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럼 오늘 예정은, 우선 아키라가 가고 싶은 데, 그러니까...... 우선 어디던가? 뭔가 많이 있었지?

 

 

어깨에서 내린 가방에서 작은 메모장을 꺼내는 코이. 어제 점심시간에 오늘 예정을 세웠을 때 쓴 것......을 읽어간다. 거기에 이상한 것 같은, 확실히 말하자면 의심하는 듯한 말투가 섞인다.

 

 

그러니까... 낚시도구 가게에, 수예가게, 잡화점, 공구가게, 100엔 숍에 서점. ......저기 말이야 아키라, 어제도 들었는데 뭐야 이건. 서점은 평소에도 갔지만, 그 외가 너무 관련 없지 않아?

 

 

부릅뜬 눈꺼풀, 갈색 눈동자로 뚫어져라.... 내 눈을 들여다보는 친구. 습관인지, 핑크색 입술을 햇볕에 갈색으로 탄 검지손가락과 엄지 사이에 두고서는, 기막히다는 듯이 투덜댄다.

 

 

상관없잖아 딱히. 거기에 나도 취미가 있는 편이 좋다고, 지독하게 말한 사람은 코이잖아.

 

, 그거야 그런데 좀 너무 예상 밖이야. 저기...... 뭔가 고민이나 곤란한 게 있으면 사양 말고 말해보라구.

 

 

체격이 작은 코이가 아래에서 의심하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불만스러운 듯이 볼을 부풀리고 있다. 게다가 눈매가 왠지 토라진 강아지 같이 보여서 나는 무심결에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코이의 순진한 얼굴 생김새가 화내도, 전혀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으으, 뭐야 아키라. 사람이 걱정해주는 데도

 

아하하, 미안미안. 넌 성격은 다부진데, 외모와의 갭이 말이야......, 재미있어서, 무심코

 

뭐야 그건, 무슨 의미? 정말, 걱정해서 손해봤다구, 바보 아키라

 

 

리듬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전철에 흔들리면서, 우리들은 평소처럼 장난친다. 전철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 논과 밭이 펼쳐진 시골 경치가 점차 깊은 산으로 사라져, 그리고 터널에 들어가 후교시에 가까워질 때쯤 민가나 건물이 많아진다.

코이와 영화나 학교, TV 프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자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콘크리트로 된 건물과 공장 굴뚝, 넓은 도로에 퍼진 많은 차 등으로 바뀌어, 도시의 소란까지 들리는 듯했다.

 

 

코이, 곧 도착해.

 

우응, 가자. ......아키라,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된다구? 바로 미아가 되니까 말이야. 아하하

 

잘도 말한다.

 

 

서로 농담하면서, 전철이 정차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이동하는 우리들. 처음 탔을 때에 비해, 조금정도 사람이 늘어난 전철 안을 천천히 나아간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가 줄어가고......쿵하고 마지막에 약간 세게 흔들리고는 완전히 멈췄다.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나며 열리는 문, 단번에 흘러들어오는 배기가스와 아스팔트 냄새...... 도시의 공기. 그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들이마시며 우리들은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

 

 

후교의 큰 역에서 나온 뒤, 우선 우리들이 향한 곳은 낚시 가게. 물론, 지금까지 낚시에 흥미 같은 게 없었던 나는 들어가는 것도 처음. 하지만, 겁내지 않고 거기에 감이 좋은 코이의 도움도 있어서 갖고 싶은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작은 낚싯바늘과 실.

봉합연습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대용품을......이렇게 고민하던 내가 순간적으로 번뜩 떠올린 것이다. 물론 인체에는 쓸 수 없지만, 휘어진 부분을 깎아서 잘 조정하면(의료용 바늘은 반달모양으로 휘어진 것이 많다, 당연히 쓰는 부위에 따라 다르지만) 연습으로 인형을 누비는 데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봉합은 외과의 기본으로, 몇 번이라도 몸에 확실히 익히고 싶다.

 

 

, 근데 말이야, 아키라, 이런 걸 사서, 진짜로 낚시하는 거야? , 나 그 미끼가 꿈틀꿈틀하는 건 좀 서투른데

 

? , 아니, 낚시는 나 혼자서 할 거니까 괜찮아.

 

또 그렇게 말한다. 으으으, 그래도 그 꿈틀꿈틀대는 지렁이는...... 으윽 등골이 오싹오싹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며 바늘을 여러 종류를 산다――그리고 향한 곳은 수예가게나 공구가게가 아니라, 코이가 오자고 제안한 굉장히 큰 홈 센터였다. 뭐랬더라, 전에 정보지에서 봤을 때부터 코이도 계속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점내에는 놀랄 만큼 거대한 공간이 퍼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코이와 둘이 쇼핑카트를 나란히 끌고 가면서, 점원에게 가끔 물으며 사려는 물건을 골라간다.

 

 

아키라? , 뭐야 이건? 가방에 껌 테이프, 결속밴드, LED 손전등, 안전핀, , 바셀린, 여러 크기의 가위가 몇 개 정도에 철사, 여러 펜치, 재봉 세트, 삼각건, 테이핑, 붕대, 거즈, 그 밖에도 뭔지 모를 것들이 가득...... 대체 뭐야?

 

아니, 무심결에 사버렸을지도. 아하하

 

 

쇼핑이 끝난 뒤 나를 걱정스러운 듯이 보는 코이. 확실히 들떠서 너무 사버렸는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상품이 많고 싸서, 그만 사고 말았다. 금액적인 면으로도 모아뒀던 상당한 액수의 용돈을, 반 정도 한 번에 쓴 셈이다.

나와 코이는 같이 후교시에 온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참고서 외에 다른 것을 산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가자기 이런 양이다. 불안하겠지...... 수상하다고 여기는 코이의 등을, 얼버무리듯이 몇 번이나 팡팡 두드린다.

 

 

서바이벌용 물건이야. 올해 여름은 캠프에 가고 싶어서, 저기, 사쿠라와 어머니한테 얘기했어.

 

? , 그래...? 초등학생 마지막인 걸. 헤에...... 선생님이랑 거기에 사쿠라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려나? 생각하면서도 그런 티 없이 말을 하며 가방 속에 적당히 산 지 얼마 안 된 물건을 담는다. 코이에게 들키지 않게 나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반복한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과 순조롭게 도구가 갖춰져 느끼는 고양감이 가슴에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지금부터 기대돼서, 좀 의욕에 넘쳐서 말이야.

 

, 헤에... 오늘 처음으로 들었는데. 흐음...... 캠프인가

 

 

거기에 예상 밖의 귀한 물건도 있었다. 코이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찾은 것이고, 비쌌지만 과감히 구입한 것. 설마 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만큼, 굉장히 기뻐서 히죽거릴 것 같은 얼굴을 감추는 게 고작이다.

그건, 살균이 된 일회용 메스. 게다가 칼끝의 종류도 다양해서, 이런 장소에서 판매되리라고는 처음에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밀 작업을 하는 사람이 커터 대신에 쓰려고 일정한 수요가 있는 것 같아, (몇 개였던 것도 있어서)카운터도 쉽게 통과해서 살 수 있었다.

, 불만이 있다면 꽤 비쌌기 때문에 모든 종류를 살 수 없었다는 것이다――아무래도, 합계 5만엔 정도 들어간다――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다. 소량만이라도 살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이걸로 내 볼 일은 끝났어. 그럼, 영화 보기 전에 밥이었지.

 

......

 

 

산 것을 빈틈없이 넣고, 그 가방의 잠금장치를 나는 어깨에 철컥하고 잠갔다. 어깨가 묵직하지만, 왠지 그리움을 느낀다.

 

 

... 어제 코이가 가고 싶다던 데가 저기 있는 지하 푸드코트였지? 가자고

 

, 아키라, 잠깐, 저기......

 

, 뭔데?

 

 

목적지인 쇼핑몰로 가려고 한 내 등 뒤에, 흠칫흠칫한 느낌으로 목소리가 늘어진다. 뒤돌아보자, 어딘가 침울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친구가 서 있었다.

 

 

......, 나도 마지막이니까 같이 캠프에 가고 싶......은데...... 저기, 그러니까...... 미안! 역시 아무것도 아니야!

 

? 뭐라고? 처음 소리가 작아서 안 들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됐어. , 빨리 점심 안 먹으면 영화에 늦어져. 가자, 아키라!

 

잠깐, 달리지 마

 

 

뭔가를 떨쳐낸 듯이 활기차게 달리기 시작하는 친구.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도 발을 내디뎠다.

 

 

 ◆◆◆

 

 

재빨리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저렴한 초등학생 요금을 내고나서 나는 친구와 큰 영화관 안으로 들어간다. 공개된 지 얼마 안 된 것도 있어서 꽤 혼잡했지만, 운 좋게도 좋은 자리에 있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몇 분간의 긴장,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몇 개 정도의 광고나 영화 예고편에서는 웅성웅성하는 관객석이, 영화 본편이 시작되기 직전, 팟하고 긴장된 듯이 아주 조용해진다. 그 묘한 일체감...... 이름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한순간만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 그 독특한 분위기에는 정말 못 배겨나겠다.

――그리고 시작되는 영화 스토리. 그것은 코이가 추천하던 대로 훌륭했다.

그리고 2시간 뒤......

 

 

흐윽, 슬퍼. 정말로 너무 슬퍼. 저렇게 끝나는 방식은 어때? ? 아키라!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아아 진짜, 우는 건 적당히 그만해둬. 거기에 그렇게 심한 마지막은 아니었잖아.

 

 

영화관 근처에 있는 쇼핑몰 지하, 큰 푸드코트에서 나는 친구의 얼굴 부근에 손수건을 던져서 건네준다. 영화는 화려한 SF연애......라는 느낌의 내용으로, 소문 이상의 시각효과, 알기 쉬운 스토리, 해피엔드지만 어딘가 비극적인 요소도 감돈다....는 느낌으로 매우 재미있었다.

다만, 스토리가 코이의 심금을 울린 것 같아, 이 녀석은 영화관에서 나오고 나서도 계속 울먹이고 있을 뿐이다. 빤히 보는 주변 시선에 노출되며, 나는 친구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계속한다.

 

 

하지만, 라스트 댄서를 좋아한다는 마음마저 주인공한테 말하지 않다니, 그런 거 너무 불쌍해.

 

아니, 그거야 그런데......

 

 

코이가 말하는 라스트 댄서라는 것은 영화 이야기, 주인공에 의해 만들어진, 85%가 생체부품, 10%가 기계, 나머지 5%가 인간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를 가진 인형 초병기의 이름이다.

지금부터 머나먼 미래, 장기간 계속되는 에일리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만들어진 궁극의 병기. 염동력, 텔레포트, 시간가속 능력 등을 중심으로 여러 초능력을 구사하고, 에일리언을 멸망시키는 죽음의 춤을 아름답게 추는 존재, 그리고 인류 최후의 희망...... 문자 그대로 라스트 댄서.

그 시대의 초병기 에너지는 의지가 근원이 되어 있고, 의지를 라스트 댄서에 머물게 하려고 천재 과학자인 주인공이 쓴 것이, 전쟁으로 죽은 연인의 뇌세포.

예상을 아득히 웃도는 병기로서 압도적인 성능을 발휘해 에일리언을 차례차례 격퇴해가는 그녀. 그러나 무슨 우연인지, 의지를 쓰면 쓸수록, 일찍이 인간이었던 달콤한 기억, 주인공을 사랑했던 마음이 라스트 댄서 안에서 되살아난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죽은 단순한 병기에 지나지 않는다......이렇게도 생각하는 그녀. 그리고 얄궂게도, 그 괴로워하는 감정이 그녀의 전투능력을 더욱 향상시켜간다.

주인공인 과학자는, 연인을 살해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에일리언에게 죽는 사람이 줄어들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연구에 계속 몰두하고 있어서, 라스트 댄서의 갈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라스트 댄서도 자신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을 결코 입에 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전의 연인인 주인공이, 죽어버린 자신을 잊고 행복한 새 인생을 걸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괴롭고 슬퍼서, 실은 주인공에게 심경을 털어놓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데, 자신은 사람이 아니니까......이렇게 포기하고 계속 싸우는 그녀. 전쟁이 끝나면, 단순한 병기에 불과한 자신은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춤을 계속 춰간다.

그리고...... 에일리언과 인류의 존망을 건 최종결전이 시작된다.

서로 모든 것을 결집한 총력전 끝에, 전투용 강화 슈트를 몸에 장착한 주인공에게 바싹 다가붙듯이 선 아름다운 라스트 댄서. 여러 격전을 거쳐 드디어 에일리언의 본거지 중심부에 마침내 도착한 두 명, 거기서 고른 선택, 최후의 댄스.

 

 

하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네. 코이가 말한 대로, 전하고 싶은 건 확실히 전하는 게 좋아. , 적어도 노력은 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슬퍼.

 

 

아름다웠던 영화의 라스트 씬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멍하니 에게 지식을 전수받은 밤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때......는 분명, 어머니와 사쿠라를 만나, 뭔가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그건 고마워요라든지, 분명 그런 시답잖은 한 마디겠지만...... 만약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해도, 그것이 한순간이었다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치, . 전하고 싶은 마음은 전해야만 하는 거지........

 

, 왜 그래?

 

 

내가 던진 손수건을 꽉 쥐고 기세 좋게 일어선 코이. 하지만, 갑자기 말꼬리가 약해져선 비실비실한 상태로 의자에 쓰러진다. 아까 전까지 슬퍼하던 것과도 또 약간 다르다, 어딘가 자신에게 푸념하는 듯한 분위기로 입을 연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으면 고생하지 않는다구.

 

,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코이?

 

아무것도 아냐......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올게. 괜찮으니까, 손수건 고마워

 

 

내게 손수건을 돌려주고, 어딘가 침울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향해 걷는 친구. 그 뒷모습은 평소 익숙한 다부진 것과는 전혀 달리, 매우 외롭게 보였다.

조금 걱정하면서도, 드링크나 짐을 둔 채로 자리에서 떨어질 수도 없고, 인파로 사라져가는 청색 파커를 입은, 가녀린 코이의 등을 배웅한다.

 

 

뭐지?

 

 

아까 전의 말투는, 누군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그래서 고백하고 싶다는 거? 모르겠다......

나는 연애 같은 것에 전혀 흥미를 두지 못하고, 공부에만 몰두해왔다. 그래서, 이런 방면으로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소문이지만 코이는 여자에게 상당히 인기가 높다고 들은 것 같다.

 

 

그 녀석, 누군가 좋아하는 걸까, 혹시 사쿠라? 아니, , 그건 어떠려나

 

 

오렌지 주스가 든 컵에 꽂힌 파란 빨대를 쭉쭉 들이마시며 생각한다. 확실히 사쿠라와 반장은 점심시간에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내 느낌으로는 코이에게 실례지만, 사이 좋은 자매로밖에 안 보인다.

아니면 혹시, 반대로 사쿠라가 코이를 좋아한다거나? 아니...... 사쿠라는 아직 애인데다가 순진한 바보다, 나처럼 연애는 생각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 그 사쿠라가 연애라니, 너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게 된다.

 

 

아아 진짜, 이런 건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어라, , 맞다.

 

 

그러고 보니 코이한테 어제 있었던 일――신에자키의 여드름을 지적했더니,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를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다. 그다지 도움은 안 되겠지만, 화장실에서 친구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물어보자......고 생각을 정리한 순간.

 

 

아키라, 이거. 이거 봐봐. 지금 받은 거야, 여기

 

 

인파를 교묘하게 빠져나와, 아까 전까지의 처진 상태가 거짓말 같은 기세로 회복된 코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뭔가에 흥분했는지, 홍조된 뺨,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오른손에는 어떤 종이...... 문자나 일러스트가 인쇄된 광고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쾅하는 느낌으로 테이블 위에 세차게 내려친다.

 

 

침착하래도, 뭔데 이건?

 

잘 읽어봐, 오늘 개최되는 후교시 중앙상공회 베스트 커플 콘테스트야! 놀랍게도 우승 커플에게는 상품권 10만엔. 준우승이라도 5, 다른 상품 다수! 상품권은 후교시에서라면 대부분 가게에서 쓸 수 있대, 영화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말이야.

 

아니...... 그거야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베스트 커플 콘테스트잖아? 우리들한테는 전혀 관계없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친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 하지만 코이는, 전혀 문제없다......는 활기가 가득 찬 미소를 띤 채 당당히 가슴을 편다.

 

 

접수 개시까지 앞으로 30분 있어. 아키라, 수입 잡화점으로 가자

 

? 뭐야,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남은 주스를 서둘러 처리하고, 코이에게 반은 질질 끌려가는 식으로 근처에 있는 멋진 잡화점에 들어갔다. 거기는 여자가 많이 있는 가게로, 수많은 화장품이 샘플과 같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다.

전혀 겁먹지 않고, 재빨리 화장품을 진열한 부스로 향하는 코이.

 

 

그럼, 뷰러랑 립 글로즈, ..... 그리고 빨간 테 패션 안경. , 아직 살 수 있어. 그리고...... 그러니까, 있잖아 아키라! 여기 헤어밴드랑 이 리본 중에 어느 쪽이 좋아?

 

?

 

증말, 시간 없어. 부탁이니까 빨리 골라봐.

 

?

 

 

지나친 급전개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이해하기를 거부한 것 같은 느낌...... 눈앞에는 나를 재촉하는 듯이, 약간 뺨을 부풀리며 나를 바라보는 코이의 얼굴이 있었다. 그건 귀여운 여자애처럼 보인다, ――그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자애라고 생각하겠지......어라, 설마!?

 

 

? 에에엑!? , 코이, !!

 

아하하, 겨우 알았어? , 빨리 준비 다하고 접수해야해. , 어느 쪽이 귀여울까?

 

 

미소를 띠며, 머리에 파커와 맞춘 듯한 물색 헤어밴드를 매는 코이. 나는 놀란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말없이 끄덕인다.

 

 

이거? , 알았어. 그럼 사올게.

 

잠깐, 코이!! 기다려

 

 

그대로 카운터로 가려는 친구의 팔을 꽉 잡는다. 그건 매우 가녀려서, 세게 잡으면 바스락 접힐 듯이 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 친구를 향해 입을 연다. 역시 이건 지나친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코이, 이런 건 이상해. 그만두자고.

 

............

 

 

내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코이. 그 가녀린 몸, 어깨가 살짝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말을 건다.

 

 

? 난처하다고. 이상해......

 

안 이상해!! 이상할 게 없는 걸, 거짓말이야. 이번만 하는 거짓말, 농담이니까! 우승 같은 거 무리라는 건 알아, 농담으로 끝나서 나가고 싶어!! , 초등학교 졸업하면 관서 중학교에 가기로 정해졌어. 이런, 이런 거, 진짜, 평생 무리라고...... .....

 

 

마치 울 것처럼 얼굴을 새빨개진 채 숙이는 코이. 친구의 비통한 목소리에 삼켜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옴짝달싹 못한다.

 

 

, 전하고 싶은 건, 반드시 말해야 하는 거야. 오늘, 그 영화를 보고, 슬퍼서 참을 수 없어서...... 거기에 우연히 이 광고지를 받아서...... , . 부탁이야, 아키라. 가슴 안쪽이 아파. 이번만, 이제 이런 무리한 부탁 안 할 거라구.

 

 

솔직히, 나는 코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 가슴 속까지 욱신욱신 아파서, 코이의 가느다란 팔을 잡은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놓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기...... 상금 만약 받는다면 절반이니까!

 

.......! 우승 목표로 힘내는 거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리하게 생긋 미소를 띠는 코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억지로 친구의 팔에서 물색 헤어밴드를 뺏는다.

 

 

, 아키라!

 

그럼 이건 우승하기 위한 자금투자라는 말이지? 내가 이 만큼은 낸다.

 

「――――으읏!! , , 고마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묘하게 부끄러워서, 코이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카운터로 향한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는 코이의 기색마저, 왠지 조마조마하고 묘한 느낌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카운터 누나의 얼굴이 엄청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왠지, 그런 어떻든 상관없는 일만이, 뇌리에 선명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 7초등학교 편 후편

 

 

 

 

 ◆

 

신에자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도서관 안인데도 불구하고――크게 발소리를 내며 여기서 뛰쳐나가고 난 지 5분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에, 뒤쫓아 가서 사과해야 할까? 하고 고민했지만, 역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바로 돌아와서 지독하게 힐난한다――「이 야만인! 이래서 타지 사람은!」――고 생각했었지만, 예상 외로 아무 소식도 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그렇다면 많이 화나 보였으니까...... 나와는 말도 하기 싫어서 집에 돌아갔을 거라 판단을 내렸다.

 

 

하아......

 

 

뭐 이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한숨을 쉰 뒤, 의자에 앉아서 염원하던 의학책을 읽기로 한다. 다음 주 월요일, 그녀를 만날 때가 무섭지만, 그건 그거.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편 순간,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곰팡내. 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어딘가 그립고 따스한 기분이 되살아난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번. 유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5월의 태양 빛에 비춰지는 책상에 앉은 나는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다.

 

 

......

 

 

순간, 내 의식은 완전히 책에 빨려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은, 해부학의 고전이자 명저로 불리는 한 권의 책.

지금부터 150년 이상 전에 초판이 발행되고, 지금도 여전히 개정이나 수정이 거듭되어, 계속 팔리는 굉장한 책이다. 전편이 영어로 쓰여 있지만, 이래봬도 라고 할 정도로 인체 구조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분명 (오레)도 이 책을 읽으며 공부했음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이 책의 소유자인 신에자키의 아버지도......

 

 

굉장해......

 

 

무심결에 입에서 말이 흘러나온다. 그 정도로 책에 세세한 필기나 고찰, 포스트잇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쓰지 않은 페이지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작은 글자로 빽빽이 임상과 비교한 의문점이나, 경험한 특례에 대한 필기가 되어 있어서 책의 페이지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현기증마저 날 것 같다.

인체......나아가서는 인간, 환자를 이 정도로 진지하게 마주보던 신에자키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의사였겠지......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열의에 지지 않게, 가방에서 요즘 쓰는 모눈노트를 꺼내, 기합을 넣으며 책상 위에 펼친다.

 

 

......좋아

 

 

심호흡을 반복하고, 평소처럼 인체를 이미지. 물려받은 (오레)의 지식은 굉장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약간 흐릿한 부분도 있었다.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의학서를 보고 비교하면서 제대로 가다듬어 간다.

슥슥하고 움직이는 연필 끝에 몸을 맡기듯이 집중하고, 새하얀 노트에 스케치를 해간다. 부족했던 지식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보완되어 가는듯한 충실감――마른 모래가 물을 끝없이 빨아들여가듯이, 내 지식이 채워져간다.

하지만 부족하다......좀 더, 좀 더 여러 지식을 얻고 싶다. 나는 지식과 기술을 수련하고 싶다...... 그것이,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보답할 수 있는 길...... (오레)(보쿠)가 바라는 것.

 

 

......, 콜록!

 

 

그리고 머리에 멍하니 떠오르는 소중한 가족, 사쿠라의 모습. 그것은 지금의 소꿉친구와는 달리, 20세 정도에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었다. 입원용 유카타――부드러운 면소재로 핑크색의 심플한 디자인――조차, 마치 주문해서 맞춘 듯이 어울린다.

가슴은 작지만 아름답게 밸런스를 갖춘 용모. 자란 흑발은 완만하게 넘실거리고, 부서질 정도로 가녀린 어깨 위로 흐른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담홍색의 부드러운 입술, 아주 약간 붉은 기가 오른 뺨, 아치형의 긴 속눈썹, 계속 닫힌 채인 눈동자...... 그리고 온 몸에 삽입된 튜브.

 

 

............?

 

 

집중한 상태로 일심불란으로 연필을 계속 움직이던 내 의식에 한 순간, 어떤 노이즈가 지나갔다.

――누군가, 헛기침한 것 같은...... 설마 신에자키가 돌아왔나? 나는 순간 노트를 덮어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정밀한 뎃생이 그려진 이 노트를, 만약 그녀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

재빨리 넣은 뒤, 아무렇지도 않은 식으로 꾸미고 나는 헛기침이 들린 것 같은 방향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라?

 

 

하지만, 거기에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없다. 시선 끝에는 이 창고와 도서관 본관을 나누는 목제 문이 있을 뿐, 어떤 변화도 볼 수 없다......

 

 

(......아니, 틀려)

 

 

잘 보면 차이가 난다. 아까 전 신에자키가 튀어 나갔을 때, 완전히 닫힐 것이었던 문에, 불과 5센티 정도지만 틈이 벌어져 있었다.

역시 그녀가 왔던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면 사서 누나가 뭔가 볼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5센티 정도의 틈이 신경 쓰인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때, 문의 저편에서 어딘가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매너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문을 닫을 타이밍을 놓쳐, 무심코 그 말을 듣고 만다.

 

 

어머, 사오리 님. 조금 전부터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괜찮아요, 잘 숨겨졌으니까 후훗, 그렇게 긴장하시지 않도록

 

, 아니야. 저기, 잠깐 볼 일이 생각나서, 정말이야. 왜 내가 저런 애한테 긴장해야 하는데

 

 

즐거운 것 같은 목소리와 대칭적으로, 뾰루퉁하게 화내는듯한 목소리. 몇 번이나 들은 적 있는 그 목소리...... 틀림없이 신에자키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건 뭐든 상관없다.

이런...... 하고 침을 삼킨다. 지금, 나는 우연이라 해도 몰래 엿듣는 것 같은 형세이다. 만약 지금 당장 문이 열린다면, 거북하다는 수준이 아니다.

안달나서 빨리 문에서 멀어지려고 한 순간, ......그러나 비정하게도 기세 좋게 열리는 문.

 

 

「――?! 우으......!?

 

, 아아 신에자키. 아까 전에는......

 

 

나와 신에자키의 시선이 바로 정면으로 부딪힌다. ......놀라서 크게 열린 눈동자,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간다.

허리까지 내려온 흑발, 늠름하고 잘 갖춰진 용모, 가느다란 눈썹과 길게 째진 눈동자, 큰 가슴 앞에 있는 붉은 리본, 꽉 쥐어진 주먹, 검은 타이츠에 싸인 긴 다리. 그것들 모두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오라가 뿜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 물러나세요, 나도 안에 볼 일이 있으니까. 뭐야

 

 

서로 눈 맞대기는 바로 끝나고, 신에자키는 난폭하게 단언한 뒤, 내 옆을 빠져나가 빠른 걸음으로 창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살짝 나부끼는 그녀의 흑발.

그 순간......, 내 주위에 달콤한 듯한, 뭐라고 하기 어려운 좋은 향기가 감돌았다.

 

 

후후후, 그럼 사이좋게, 조용히 부탁드릴게요.

 

?

 

 

미소를 포함한 소리와 동시에 스르르 닫혀가는 문 저편에서, 힐끔 보인 사람은 입구에서 만난 사서 분이었다. 싱글벙글 미소를 띠며, 당연하다는 듯이 문을 닫는다.

 

 

우왓, , 잠깐

 

 

이대로라면, 이 공간에 신에자키와 둘만 있게 된다...... 확실히 그녀와는 친구인 코이의 조언도 있어서 지금까지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해, 잘 되면 친구가 되고 싶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역시 너무 갑작스럽다.

게다가 내가 아까 전 팔을 잡고, 얼굴을 너무 가까이 댔던 탓에 분명 화났을 게 틀림없다. 가능하면 의학서를 가지고 밖에서 읽고 싶다...고 생각해서 발을 문에 내디딘 순간.

 

 

잠깐, 어디에 갈 생각? 설마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다는 거야?

 

? ...... 그런 건 아니야

 

 

뒤에서 차가운 듯한, 그러나 분노를 포함한 듯한, 하지만 약간 다른 것 같은......? 잘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할까 어릴 적부터 타인에게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그 박력에 나는 압도되어, 말을 제대로 돌려줄 수 없다.

 

거기에 귀찮다고 피하면, 친구인 코이가 말했듯이, 결국 누구와도 서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적당히 포기하고 뒤돌아서 창고 안쪽으로 발을 나아가게 한다.

내가 아까 전까지 앉았던 의자로 향한다. ......그 바로 옆 의자에는, 긴 다리를 꼰 포즈로 어딘가 시시한 듯이 먼 곳을 바라보는 신에자키가 앉아 있다.

그녀의 시선이, 진짜 한 순간만 내 얼굴을 빠르게 횡단해, 핑크색의 요염함이 담긴 입술이 움직인다.

 

 

저기...... 네가 파파의 책을 찢거나 할까봐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옆에 앉은 거니까. 이제, 불평하게 하진 않을 거야.

 

 

빨간 얼굴인 채로 시선을 창 밖에 두고 턱에 손가락 끝을 댄 포즈로 단언하는 그녀. 그 너무 무례한 말에, 약간 올라온다. 이렇게 소중히 다루어진 책을, 내가 찢을 리가 없다. 가슴에 넘치기 시작하는 메슥메슥한 감정.

그것을 직접, 부딪치려다가...... 신에자키의 손가락이, 진짜 약간이지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긴장한 아이처럼.

어째선지, 자신도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떨고 있는 손가락 끝을 본 순간, 내 가슴 속 메슥메슥함은 스륵....하고 사라져갔다. 단번에 냉정해지는 감정.

그래, 내게 어머니나 사쿠라가 소중한 가족이듯이, 신에자키에게 아버지는 소중한 가족인 거다.

 

 

「――그런 짓 안 한다고 약속할게. 아버지가 매우 훌륭한 의사에, 이 책을 매우 소중히 다뤘던 것을 알아. 그러니까 절대로 파손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아. ......거기에, 신에자키에게 아버지는 소중한 가족이니까, 남기고 간 책을 타인이 보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나라도, 만약 어머니가 사라지고, 그 남겨진 책을 사이가 나쁜 타인이 읽는다면 걱정돼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한 마음을 담아, 진지함이 전해지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신에자키를 본 채로 천천히 말을 꺼낸다.

 

 

그러니까 중요한 이 책들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읽을게. 내게 읽게 해줘서, 고마워. 신에자키

 

「――!! , , 알았다면 됐어. 우물쭈물 하지 말고 빨리 앉으세요,

 

 

아직 화난 게 가라앉지 않은 모양인지, 어딘가 빨간 얼굴인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녀. 하지만――꽤 난폭하지만――일부러 의자를 당겨서, 앉으라고 말해주었다.

아무튼, 어떻게든 화해....라고 해도 될지도 모른다.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나는 천천히 앉았다.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는 그녀가, 빤히...... 곁눈질로 나를 흘겨보면서, 시시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런데 건방지네, 초등학생 주제에 의학서라니. 뭐야...... 영어 공부라도 할 생각?

 

 

너무나 스트레이트한 질문. 그렇지만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보통 초등학생은 의학서는 절대 읽지 않으니까. 하지만, 신에자키가, 영어 공부할 생각? 이라고 물어줘서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나는 대답한다.

 

 

그래, 그거도 당연히 있는데...... , 미래에 나는 반드시 의사가 되기로 정했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읽고 싶다고 생각했어. 취미 같은 거야. 그렇다 해도 이상하다면 이상하지.

 

뭐야, 자각이 있잖아. 그래, 넌 엄청 이상해! 초등학생 주제에 그렇게 강한 결의가 있다니, 정말 건방져, 알고 있어?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빨간 얼굴로 창밖을 보며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 그녀. 곱게 다듬어진 손톱――잘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구슬이 붙어 있다.――을 입가에 댄 채로, 힐끔힐끔 내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그런 건 신에자키도 똑같잖아. 의사가 된다고 정했지? 그렇다면 신에자키라 해도 괴짜야. 하하, 같은 괴짜 동료네

 

「――――!! , 누가 동료라고!? 실례야

 

 

벌떡 소리를 내며 신에자키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상당히 화났는지, 나와 절대로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다.....는 느낌으로, 다른 쪽을 보고 있다.

그대로, 출구로 발을 내딛는 그녀. 하지만, 한눈을 팔던 탓에, 우연히 의자 다리가......

 

 

, 위험해

 

꺄아악!

 

 

휘청......하는 느낌으로 자세가 무너져, 바닥에 넘어질 것 같게 된 신에자키.

――그 순간, 내 양손은, 그녀가 균형을 무너뜨린 것과 동시에 반응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인다. 일어서면서 그녀의 무섭게도 호리호리한 허리에 오른손을 두르고, 찰랑찰랑한 흑발의 감촉을 느끼며, 작은 머리를 왼손으로 받아낸다.

그것과 동시에, 공중을 잠시 헤매던 그녀의 양손이, 버팀목을 바라 내 목을 두른다. 신에자키의 몸――여러 군데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리고 매우 좋은 향기가 난다――을 부드럽게 꼭 껴안을 수 있었다.

 

 

괜찮아?

 

, , ......

 

 

팔 안에서, 엄청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가까이 대는 우리들. 위기일발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 밖의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격렬하게 고동쳐서, 신에자키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하고 바보 같은 생각을 잠깐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쩐지 떨어지기 어렵다. 쑥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서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저기, 히이라기 군, 조금 전에는 미안해. 그러니까...... 조금 실례였을지도

 

 

꼬옥......하고 내 목과 어깨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젖은 눈동자, 붉어진 뺨. 부끄럽다는 듯이 깨문, 젖은 핑크빛으로 빛나는 입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사쿠라 이외의 여자와 얼굴을 맞댄 적은 처음에, 신에자키는 터무니없이 예쁘다.......바보 같이 멍해져서 잘 대답할 수 없다.

 

 

, 저기, 조금 심술맞다....고 할까, , 어째서인지 모르는데, 히이라기 군을 생각하면, 저기...... 가슴 깊숙한 곳이 꽉.......

 

 

무섭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요동친다. 내 품 안에서, 평소에 이렇게 무뚝뚝하던 신에자키가, 엄청 기특해서...... 그 갭 때문일까? 머리가 뜨겁게 끓어올라서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한다.

나를 올려다보듯이 바라보는 그녀도, 떨어지려 하지 않고 입을 계속 움직인다. 그 때, 매우 좋은 향기가 올라와서 그 향기가 또, 내 마음을 녹여간다.

위험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짓을 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 내 전신에 오싹오싹한 감각이 스쳐 지나간다.

 

 

, 신에자키. 저기......

 

? , 뭐니?

 

 

부끄러운 듯이, 수줍은 미소를 띠는 신에자키. 평소 본 적이 없는, 그 표정이 더더욱 내 머리를 끓어오르게 한다. 역시 그녀는 엄청난 미소녀다. 여기서, 이렇게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꿈같다고도 느껴진다.

까놓고 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멍한 채, 머리에 떠오른 것을 무심결에 중얼거리듯이 말로 내뱉고 말았다.

 

 

저기 말인데... 이상해. 여드름이 없어. 아까 전 얼굴을 가까이서 봤을 때는, 신에자키의 이마에 빨간 여드름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깨끗해

 

「――――?

 

 

처음에, 이 방으로 안내받았을 때, 나는 신에자키의 팔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때는 나를 잊고 몰두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의식했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그녀와 얼굴을 엄청 가까이 맞대봤더니, 그 때의 영상이 머릿속에 겹쳐, 그리고 여드름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아까 전에는 툭 튀어나온 빨간 여드름이 있었을 텐데, 지금의 그녀의 이마에는 안 보인다.

신에자키의 피부는 부드럽고, 매우 매끈매끈해서 아름다워서...... 기적과도 같이 생각되어, 나는 그저 그대로 중얼거렸다.

 

 

「――?! 으읏, 너는 참!! 이 괴짜! 정말, 떨어져!

 

? 잠깐, 날뛰면 위험해

 

 

신에자키의 양손이 투닥투닥 내 가슴에 부딪힌다. 뭔가 무례한 말을 한 건가? 생각한 대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날뛰는 그녀에게 애를 먹으면서도, 천천히 균형을 잡듯이 손을 떼어놓는다.

 

 

우쭐하지 마! 너 때문에 화장한 게 아니니까!

 

. 어어?

 

으으읏, 신경 쓰던 걸! 최악, 최악이라구!

 

 

이번이야말로 번뜩......한 날카로운 시선을 뿌리고는, 큰 걸음으로 문 저편으로 나가는 신에자키. 빨간 얼굴, 회색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검은 타이츠에 싸인 스타일 좋은 다리의 잔상이 뇌리에 비친다.

그리고 나는 뭐가 나빴는지 정말 모르는 채, 멍하니 꼼짝달싹 못한다.

 

 

그렇게 심한 말 했나?

 

 

――결국, 그 이후로 신에자키는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2시간 정도――가끔 건성이면서도――확실히 의학책을 읽으며, 뎃생을 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진 저녁에 돌아갈 때, 도서관의 접수처에서,

 

 

, 히이라기 군이지? 전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사오리 아가씨가 다음부터 의학책을 읽을 때도, 너를 전혀 믿을 수 없어서, 앞으로도 감시할 테니까, 나한테 정중하게 말을 걸도록이래. 후후후, 귀엽지?

 

 

전혀 귀여운 게 아니라, 단순한 심술부리기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무심코 우울해진다. 하지만 뭐가 즐거운 건지, 싱글벙글 미소 짓는 사서 누나. 입가에 손을 대고, 쿡쿡 몇 번이나 떠올리고는 계속 웃는다.

 

 

그러면, 히이라기 군, 사오리 아가씨와 둘이 또 오는 거네. 그리고, 여자애에게 상처 주는 말, 하면 안 된단다?

 

...... 하아......

 

 

상냥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온전히 대답을 할 기력도 솟아나지 않는다. 여드름을 지적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였나? 진짜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일은 휴일, 코이한테 물어보자......고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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