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가끔 번역물을 올리는 블로그입니다.
2ndboost

태그목록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제 10화【초등학교 편 ⑧ 후편】



  ◆

  머나먼 옛날, 기원 전 460년――고대 그리스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을 무렵――지중해에 떠 있는 작은 섬에, 한 남자가 태어났다.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현대 의사에게 지금도 『의학의 아버지』라 칭송받는다.
  그는 그때까지 저주나 천벌이 원인이라 여겨진 병을 과학적 고찰에 의해 분석, 근거 없는 미신에서 떼어내, 현대 의학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하지만, 그 위업과는 또 별개로,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은 모든 의료 관계자...... 아니, 의를 뜻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것은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성스러운 맹세. 그가 태어나 약 2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맹세는 전혀 퇴색하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에 계속 머물고 있다.


「――으읏, 으흐윽」


  찌는 듯이 더워 잘 수 없는 아프리카의 밤. ......뭔가,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문득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인 심플한 디지털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짙은 어둠 속을, 디지털 시계의 녹색 부분만이 아련하게 비춘다.


「......흑」


  들이켜는 공기마저 찌는 듯 덥게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다시 퍼지는 소리......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다. 간이 주택에 만든, 의료 캠프 시설의 얇은 벽을 통해 들리는 소리.
  그것은 옆방――세리실의 방에서 들려오는 오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일찍이 내가 매일 저녁 하고 있던 것과 같은, 구토 섞인 정말 괴로운 소리.


「세리실......」


  식은땀을 흡수해 무거워진 시트를 벗겨내며, 조수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린다. 수 시간 전, 마지막에 한 수술에 관한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동시에, 입 안에 넘쳐흐르는 씁쓸한 침. 어금니를 꽉 다물며, 그 침을 삼킨다.
  마지막 환자는 세리실이 아는 사람――그녀가 이 NGO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친해진 소녀――였다. 소녀가 피투성이로 옮겨져 왔을 때 세리실의 새파래진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 10세이면서, 남동생 4명을 위해 날마다, 시가지에서 야채를 팔던 밝은 소녀였다. 그러나...... 노후화, 그리고 전쟁에 의해 취약해져 갑자기 무너진 건물에 깔린 것 같다. 불운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고. 하지만, 인프라가 아무 것도 정비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기도 했다.
  상가의 어른에 의해 소녀가 의료 캠프에 옮겨졌을 때는 이미 의식 불명, 뇌좌상, 대퇴부 개방성 골절, 그리고 대량 실혈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나와 세리실은 3시간, 모든 기술을 발휘해서 계속 발버둥쳤지만...... 그러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좀 더 빨리 캠프에 도착했으면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도 가난한 이 나라에서는, 기와 조각과 돌을 들어낼 수 있는 중기계의 수가 적고, 또 연료마저 항상 부족. 사고가 일어나도 신속한 구조는 바랄 수 없다. 구급 구명의 전제부터, 선진국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


  피로 때문에 저린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에서 방의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세리실의 오열은 그칠 기미가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넘쳐 나오는 듯한, 애절하기 짝이 없는 그 소리.


「......무슨 말을 해야」


  빠득, 하는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어금니를 씹으며 발을 내디딘다.
  결국, 타인인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애초에 세리실이 앞으로도 의사를 계속할 거면, 이것은 그녀 스스로가 넘어야 할 고통이기도...하니까.
  하지만 예전의 나처럼, 쓸데없다고 생각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평소부터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조수를, 남이라고 냉정하게 딱 잘라낼 수 없다.
  내 방을 나와 어슴푸레한 복도를 걸어, 옆방...... 문 앞에 선다.


「세리실, 나다. 괜찮아?」

「우으, 으으, ......서, 선배?」


  가냘픈 목소리가 난 뒤, 1, 2분 정도 침묵이 계속되고 그리고 철컥하는 열쇠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몹시 운 새빨간 눈동자, 흐트러진 금발로 망연해하는 세리실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움직이지만, 그보다 먼저 눈물이 뚝뚝 하얀 피부 위로 떨어져, 말로 할 수 없는 오열이 새어나올 뿐.
  입고 있는 파란 파자마는 눈물로 진 얼룩 투성이에 평소의 다부진 세리실의 모습은 없었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세리실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는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이처럼......


「서, 선배...... ㅈ, 저......」


  말할 수 없는, 아니,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나,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는 건가......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가락을 데워주듯, 나는 손바닥을 위에 덮었다. 그것은, 여기가 타오르듯 더운 아프리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갑게 얼어 있었다.
  내 시선 끝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입술. 크고 푸른 눈에서 끝없이 굵은 눈물이 넘쳐 떨어져간다.


「괜찮아? 세리실, 무리하게 얘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단지, 걱정됐을 뿐이야.」


  부드럽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지...... 사죄하듯 작은 머리를 숙이는 그녀.


「서, 선배...... ㅈ, 제 목소리 때문에 깨워서...... 죄, 죄송해요. 꿈에서, 꿈에서 그 애를 봐......봐서. 활기차게, 그렇게 활기차게, 잘 웃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죄송해요 선배, 하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오열을..... 머, 멈출 수.....없어서. 시, 시끄럽게 해서, 저, 정말로...... 나 같은 것보다 선배가, 훨씬, 훨씬 지쳤을 텐데......」


  다시 꿈이 또렷이 생각난 탓인지, 온몸을 벌벌 떠는 그녀. 가볍게 패닉이 된 모습.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
  달래듯이, 그 가녀린 어깨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본다. 한 마디 한 마디 타이르듯, 천천히 말을 꺼낸다.


「들려? 괜찮아, 난 별로 상관없어. 네가 걱정이야. 침착해, 우선 물을 마셔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녀린 몸. 그것을 반 억지로 안아 침대에 앉힌 뒤, 미네랄워터 병을 건넨다. 속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아직도 사죄의 말을 하려는 그녀.  그것을 억지로 시선으로 말리고, 물을 마시도록...... 몇 번이고 반복한다.


「......네」


  한숨 섞인 소리 뒤, 마치 아이처럼 양손으로 병을 들고, 떨리는 입술에 입을 대는 세리실.
  일단 물을 입에 머금자, 목이 말랐으리라...... 꿀꺽, 꿀꺽하고 조용히 마시기 시작했다.


「세리실, 난 요령 좋게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넌 정말 잘 하고 있다. 결코 무력한 사람이 아니야. 자신을 탓하지 마」

「......」


  조금 안정된 모습을 확인하고, 세리실이 앉은 침대에서 멀어져 입구 옆의 벽에 기대며 그렇게 이야기한다. 좀 더 뭔가 그녀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찾지만, 결국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한다.
  일찍이, 세르게프가 내게 해준 말은, 무수한 경험을 쌓았기에 할 수 있는 것.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해봤자, 그것은 틀림없이 얄팍해서 그녀의 마음에 닿을 리 없다.


「그럴......까요? 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했어요. 여기서, 겨우, 겨우 친해진 애 한 명도 구할 수 없어...... 이런, 이런!!」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간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처럼 가녀린 몸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들고 있는 그녀. 가슴에 쌓인 격정을 토해내듯 말을 계속한다.
  자기를 탓하는 것처럼, 상처 입히는 것처럼.


「저, 저, 의사가 되어 경험을 쌓으면...... 분명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정말 바보였어요. ......지금, 지금 와서...... 정말 무서워요. 또...... 또, 못 구하면 어떡하지. 무서워요. 내일 수술...... 아니, 의사라는 일이」


  타인의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에 침식된 조수의 모습. 그것은 예전의...... 아니, 평소에는 잊었다고 여기는 나 그 자체다. 친한 이를 눈앞에서 잃어버린, 그 충격이 그녀의 마음을 산산조각 부수려 하고 있다.
  ――외과의에게, 『가족 절개(身内切り)』 즉, 친밀한 사람, 가족을 수술하는 것은 최대의 금기로 여겨진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외과의에게 수술이라는 것은, 항상 어떤 의미로는 내기이기 때문이다. 수술 중에 외과의에게 항상 강요되는 선택지.
  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을 경우...... 그것이 친밀한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때, 외과의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평생 계속 후회하게 된다.
  ――그 때 이렇게 했으면, 사랑한 사람은 살았을 것이다......라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계속 탓하고, 이윽고 메스를 잡을 수 없게 되어간다. 자신의 결단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수술 중에 결단을 못 내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외과의...... 그것은, 이미 의시라고 할 수 없다.


「세리실. 나는 아직 미숙해서 너를 달래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너무나 추운 듯 떨고 있는 세리실. 그 가녀린 어깨, 새하얀 뺨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간다.
  예전에...... 세르게프가 해준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문지른다. 어둑어둑한 방안, 나와 그녀의 숨결, 그리고 파자마의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이 퍼진다.
  그대로 10분 정도 흘러, 조금 호흡이 안정된 조수에게 느긋하게 말을 건다. 최근, 내가 느낀 바를. 도용한 말이 아니고, 나 자신의 말로.


「하지만...... 그래, 세리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기억해?」

「네.......」


  조금은 침착하기 시작한 그녀. 허약하지만, 약간이나마 힘이 느껴지는 대답이 들렸다.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그치듯 말을 계속한다. 내 말이...... 어떻게든 조수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그 중에 『의(医)의 서약으로 이어진 사람을 자신의 형제라 여기고, 아낌없이 자신의 의술을 전하는 것』이 있지.」

「......」


  눈물을 조금 흘리며, 천천히 끄덕이는 세리실. 흔들리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얼굴에 스친다.


「요즘, 그 뜻을 조금 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히포크라테스도 분명, 살리지 못한 환자를 많이 진찰해 왔을 거야. 의술의 한계, 고통, 무력함을 뛰어난 의사니까 더욱,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건 후대 의사들도 완전히 같다는 걸 알았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같은 의를 익히는 사람들은 형제처럼 서로 지지하고 지식을 높여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전에, 의사가 되었을 때 맹세한 성스러운 문언. 위대한 『명의』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맹세.
  피부색이나 국적, 종교, 어떤 것도 초월해서, 의를 익히는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단결해야 한다.
  갑자기 덮치는 불합리한 죽음에 우리들 의사는 너무나 무력하니까. 혼자서는 견디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세리실, 그 고통, 생명을 짊어지는 공포는, 너만이 느끼는 게 아니야. 나도, 그리고 전 세계의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느리고 있어. ......하지만, 언젠가. 그래, 미래에는 반드시 좋아진다. 반드시 의학은 진보한다. 이 고통이 쓸데없지 않다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들은 무력하며, 그리고 항상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야.」

「네......」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만, 괴로울 때는 내게 말해줘. 그리고 또 조수로서 나를 도와줬으면 해. 너의 힘이 필요하니까, 환자를 돕기 위해서.」

「네, 선배......」


  조금 안심한 듯 중얼거린 뒤, 세리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내 어깨에 기댄다.
  그 중량감, 그리고 따스함과 평온한 숨소리를 느끼며, 나도 느긋하게 눈동자를 닫았다. 잘 전해졌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세리실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에서 나갈 때까지, 나는 조금이나마 평온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잠들어 있는 사쿠라. 마치 녀석이 내 어깨에서 숨소리를 내는 듯한...... 그런 기묘한 착각을 품은 채.


  ◆◆


  신에자키가.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그것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어안이 벙벙하게......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우선 집의 외관――이라고 할까, 저택이라고 불러야겠지――부터 다르다.
  집으로 마중하러 온 도서관 사서님이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벽. 성? 이라 한순간 생각할 만큼 넓은 뜰을 둘러싼 새하얀 벽돌. 그 벽돌 건물의 입구인 쇠창살로 된 문이, 그야말로 영화 같은 것에서 본 서양풍 저택 그 자체로.......


「히이라기 님, 이쪽입니다. 사오리 아가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히익, 아......넷!」


  총총 걸어가는 사서님에게 뒤처지지 않게, 나는 빨리 걸어간다. 하지만 그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저택의 내장이 또 엄청나다.
  동물 털로 만든 긴 빨간 카펫은 폭신폭신하고, 구두인 채 걷고 있는 것에 공포마저 느낀다. 그리고 매우 긴 복도에 장식된 조각이나 큰 그림들. 거기에 결정적으로 복도 안쪽에서 흐르는 클래식 음악. 집......이라기보다 미술관.


「네, 이쪽입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꼬불꼬불 구부러진 복도를 나아가, 안내된 곳. 조각이 새겨진 황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문 앞.
  활짝 미소 지은 사서님은, 나를 기다리게 한 채 노크하고 안에 혼자 들어갔다. 틀림없이, 신에자키에게 내가 찾아온 것을 말하는 거겠지.
  생일 파티이기 때문에, 일단 가져온 신에자키에게 줄 선물을 단단히 가슴에 안는다.
  심장이 엄청 두근두근하고 시끄럽다. 농담 같은 이 저택과 비교하면, 이런 선물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눈앞에서 문이 열리고, 사서님이 모습을 보였다.


「히이라기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후훗, 그러면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시니 자, 안으로」

「으......ㄴ, 네. 실례합니다.」


  한 걸음 발을 디딘 순간, 우선 눈에 비친 것은 방안에 장식된 장미꽃, 꽃, 꽃의 홍수였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장식된 엄청 넓은 방의 여기저기에, 벽이 안 보일 만큼 대량의 장미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뭐야, 여전히 멍해 있어서는. 불만이라도 있어?」

「어......? 우, 우왓, 아, 신에자키!? 아, 그, 그게.......」


  시야 한 쪽의 꽃, 그 안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 그쪽으로 눈을 돌린 나는 말이 막힐 뻔하게 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드레스로 몸치장한 공주, 신에자키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대량의 꽃마저, 한 순간 퇴색한 것처럼 느껴진다.
  ――요염한 흑발은 정중하게 묶여, 반짝반짝 빛나는 티아라로 꾸며져 있다. 드레스는 진한 주홍......어깨가 대담하게 노출되어, 풍부한 앞가슴이 열린 디자인. 초등학생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가슴골이 선명히 보여, 눈을 둘 데가 없어서 매우 난처하다.
  평소부터 어른스럽고, 늠름하며 아름다운 그녀. 하지만, 오늘 밤은 드레스에 맞춰 화장을 살짝 한 탓일까, 강렬한 색기...... 같은 것마저 느껴진다.
  정연하게 갖춰진 눈동자는, 검은 아이 섀도로 장식되어 나를 날카롭게 보고 있다. 조금 불쾌한 듯 다문 입술은 붉은 빛이 강해, 요염한 느낌조차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등골을 쭉 뻗은 채, 가터벨트가 붙은 하얀 스타킹에 싸인 긴 다리를, 슥......하고 뻗어 내게 다가온다.


「흥, 의외로 슈트도 어울리잖아. 얘, 우물쭈물 하지 마! 자」

「......어? ㅁ, 뭘?」


  화내는 건지, 조금 뺨을 붉힌 채 매우 당연한 듯 오른손을 눈앞으로 뻗어오는 그녀. 하얀 장갑에 싸인 손가락. 나는 넋을 잃고 보며 뭘 해야 할지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에스코트――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문까지 안내――하면 될 뿐. 그런데,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에......


「어? 잠깐, 히, 히이라ㄱ, 꺄악...... 어, 어머...... 앗, 어머!?」


  패닉이 된 나는, 영화에서 본 장면――공주님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 기사――을 떠올리고, 무심결에 신에자키의 손등에 자신을 잊고 입술을 대고 말았다.


「앗, 꺄아......응......바, 바보! 히, 히이라기 군, 저기...... 응, 아, 아냐, 아니니까....... 아.....응응읏」


  순백의 실크로 만든 장갑에 싸인 공주의 손.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내 입술에 닿은 보슬보슬하지만 부드러운 감촉. 더욱이 비할 데 없을 정도로 좋은 향기가 긴 손가락 끝에서 감돈다.


「......읏, 히이라기 군, 앗, 응읏」

 
  시간으로 치면, 그저 몇 초간이었을 테지만, 입술을 떼어놓은 내 가슴은 부풀어 터질 만큼 세게 뛰고 있었다. 기세로 해버렸지만, 엄청나게 쑥스럽다.
  인사는 이거면 괜찮았으려나? 하고 심호흡을 하며 눈앞의 신에자키를 응시한다.


「아, 신에자키, 이거면...... 괜찮아?」

「응.....? 아.....에!?」


  나는 조금 겁내며 공주를 바라봤으나, 반응이 없다.
  뺨은 치크해서인지, 붉게 물들어 역시 엄청 예쁘다. 공주님이 할 것 같은 티아라와 진홍 드레스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방의 샹들리에에 비춰지는 큰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물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앗...... 응...... 뭐, 뭐어 그럭저럭이네. 읏.......히이라기 군, 그럼 다음은 회장으로 에스코트 하도록 해.」

「어? 으, 응 이렇게?」


  내 왼손에 신에자키의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재빨리 얽혀온다. 바로 옆에 새침한 표정으로 서는 그녀. 목덜미부터 많이 노출된 가슴, 그것이 시야에 또렷이 들어가, 당황해서 앞만 본다.


「잠깐, 걸음이 빨라. 봐...... 좀 더 이쪽으로 와서. 응, 그렇게, 보폭을 나한테 맞추고...... 주의해, 넘어지지 않도록.」

「아, 응」

「손, 놓지 않기야. ――앗, 차, 착각하지 마, 매너, 매너니까!」

「아, 응」


  엉망진창 가까운 거리에서 감도는 달콤한 향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아름답게 꾸민 공주에게 긴장할 뿐인 채, 흠칫흠칫 문을 열고 걸어간다. 내 왼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 그리고 때때로, 꼬옥......하고 쥐어오는 부드러운 감촉. 쿡쿡하고 살짝 웃으며 뒤따라오는 사서 누나.
  모든 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나는 마치, 동화 세계에 섞여든 듯한 이상한 기분인 채로 회장까지의 긴 복도를 계속 걸어간다.
  그리고 완전히 들떠 있던 나는, 모처럼의 생일선물을 그녀의 방에 놓고 온 것을, 회장에 겨우 도착할 때까지 깨닫지도 못했다.


  ◆◆◆


  신에자키의 생일파티. 그것은 많은 어른들이 북적거려서,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회장의 중심에 있는 신에자키――그리고 모친, 현 신에자키가 당주――에게 끊임없이 인사가 차례차례로 온다. 그 근처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는, 클래식 연주가 실제로 되고 있어 여러 사람들이 춤을 계속 추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냐면, 눈에 띄지 않도록 벽 옆에 선 채 우물우물 요리를 맛보고 있었다.


「저기 봐, 쟤가...... 진료소의......」

「응, 왜 여기에? 그 여자의.......」


  결코 따뜻하지는 않은 시선과 소곤소곤하고 속닥이는 여러 말.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요리를 먹는다. 가끔, 신에자키가 시선을 보내지만, 그녀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인사의 방해는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끄덕일 뿐.
  요리, 디저트는 매우 호화롭고 종류도 다양. 그런데, 왠지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서 누나가, 가끔 나를 타인의 시선에서 지키듯 움직여 줬지만 그래도 있기 불편했다.


「히이라기 님, 아가씨에게 말을 건네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런 식으로 소외된 채로, 맛있는 것도 아닌 식사를 계속 하던 내게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속삭임. 놀라서 뒤돌아보자, 사서 누나가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누나도 회장에 맞춰 차려입었지만, 다른 손님에 비해 소극적――검은색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단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누나의 귀여운 분위기에 어울린다.
  그러나, 그런 차림보다 나는 들은 말에 놀라 무심코 대답했다.


「어, 어째서!? 하지만 보세요, 저렇게 어른들이 그녀의 생일 축하를......」

「히이라기 님, 잘 보세요. 그 사람들은 아가씨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주님에게 하고 있어요. 방에 장식된 꽃...... 그 퇴원축하도 전부 그래요. 장미는 당주님이 좋아하는 꽃이니까요.」

「네!?」


  주변에 들리지 않게 배려한 속삭임. 그 내용에 놀라, 나는 신에자키가 서 있는 쪽을 보았다.
  많은 어른들이 서서, 담소하고 있는 그 공간. 하지만 확실히, 사서님이 말하는 대로, 공주는 흥미 없는 듯이 서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파티일 텐데......
  거기에, 그러고 보니 공주의 친구――추종자들 중――는 어디에 있지? 오늘 밤 파티에도 없다. 아니, 그 뿐만 아니고 요즘 들어, 신에자키와 같이 있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아가씨의 다른 친구――반 친구들의 모습이 없는 것이 신경 쓰이나요? 지금, 사오리 아가씨는 당주님의 재혼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아가씨는 혼자입니다. 지금, 공개적으로 사오리 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일족은 없습니다. 이번 파티에 와주신 동년대의 친구는, 히이라기 님 단 한 분입니다.」

「.......그렇, 구나」


  내 시선 끝에 서 있는 신에자키. 그녀는 어른으로 가득 찬 상태, 주변에 아무도 아군이 없는 상황이면서도, 굳세게 가슴을 펴고 다부진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늠름하며 아름답게.......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아름다움, 다부짐이, 얼마나 빠듯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 수술에서 봤던 부친을 향한 눈물, 진료소에서 해버린 나 자신의 잔혹한 거짓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라고 그 때 맹세했다.


「고마워요, 사서님. 저, 신에자키에게 가볼게요.」

「네,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서님이 아니라, 제 이름은 스이센바라 미즈키(水仙原みづき). 잘 부탁해요.」


  응원하듯 등을 툭하고 가볍게 두드려준 사서님――이 아니고 스이센바라 누나. 싱글벙글한 미소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내게 사양 없이 빤히 꽂히는 호기의 시선. 그것을 무시하며, 척척 발을 내디뎌간다. 많은 어른이 나란히 서 있는 회장의 중심을 향해. 아름답게 서 있는 신에자키를 목표로, 똑바로.


「잠시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 엣!?」


  인파를 밀어 헤치고 간신히 그녀 옆에 겨우 도착한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신에자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놀란 표정이, 이런 때지만 조금 귀엽다.


「어머, 외부인...... 실례, 딸에게 무슨 용무지요?」

「히이라기 군......」


  하지만, 신에자키의 몸을 가리듯 비집고 들어간 사람의 그림자.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 처음으로 보는 신에자키가 당주의 모습.
  역시 부모 자식이라는 느낌으로, 얼굴 생김새는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몸매도, 색기를 주변에 뿌리는 요화 같다. 공주보다 더욱 대담하게 드러낸 진홍 드레스, 큰 가슴, 호리호리하고 잘록한 허리, 길고 가느다란 다리. 여왕......이라는 표현이 딱 맞아, 무심코 압도될 것 같다.


「신에자키......사, 사오리의 친구로서 이야기를」

「그래요? 딸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군요. 자, 용무가 끝났으면 돌아가세요.」

「어, 엄마! 나도 히이라기 군하고.......」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식으로 차가운 시선을 딸에게 던지고 억지로 이야기를 끝내려는 모친. 큭......하고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신에자키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외로운 듯이 내게 머리를 숙이려고.......
  하지만, 나는 팔을 세게 뻗어, 그런 공주의 손을 억지로 붙잡는다.


「꺄악, 히, 히이라기 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의 편이라고 그 때 맹세했다. 언젠가 잔혹한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전해 그녀에게 미움 받아 경멸되는 그 날 까지는.


「아직 용무는 있습니다! 춤을 권하러 왔습니다. 사오리 양, 저와 춤을 춰주시지 않겠습니까?」

「――!?」


  ――요즘 들어 방과 후, 코이와 사쿠라, 둘을 연습대 삼아 반복한 춤. 매우 미숙해서 솔직히 사람 앞에 보일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매너만은 알고 있다.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거절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춤추는 본인의 의사가 존중된다. 주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 많은 손님이 있는 가운데, 신에자키가 당주가 사교계의 매너를 깰 리가 없다.


「......ㄴ, 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히이라기 군.」


  놀란 내 오른손에 흠칫흠칫 신에자키의 손이 포개진다. 다정하게 감싸듯이 꼭 쥐며, 천천히 두 명이 발을 내디딘다. 뒤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끼지만, 솔직히 어떻든 상관없다. 이곳에서 멀어져 근처 회장으로 그녀를 에스코트 해간다.
  가슴은 두근두근하고 계속 시끄럽게 뛰고, 목은 바싹바싹 마른다. 무도회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엄청 대담한 일을 해버렸다는 자각이 든다.
  신에자키도 놀라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힐끔힐끔하고 시선을 보낸다. 손을 잡은 채인 우리들은, 그렇게 시선이 얽힐 때, 강렬하게 쑥스러워서 말없이 걸어갈 뿐.
  하지만, 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히이라기 군, 고, 고마워. 정말 기뻤어.」

「다리, 밟으면 미안해! 먼저 사과해둘.....응? 뭔가 말 했어?」


  타이밍 나쁘게, 얼굴을 돌리며 뭔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그녀와 겹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한 순간, 얼굴을 귀신처럼 붉힌 신에자키가 강한 힘으로 잡아당긴다.


「――――으으으읏!!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바보, 다리, 밟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자, 곡이 시작될 거야!」

「어? 앗, 잠깐 잡아당기지 말아줘」


  왼손을 호리호리한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오른손을 부드럽게 다시 잡는다. 정면에서 똑바로 신에자키를 바라보지만, 시야에 아무래도 가슴골이 들어와, 뇌가 끓어오를 것 같은 기분.


「......읏! 저, 저기...... 좀 더, 왼손으로 꼭 해.....주렴!」


  그런 내 마음도 알지 못하고,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넣으.....라고 명령하는 공주. 반 자포자기로 힘을 주자, 풍부한 두 개의 부푼 곳이 내 가슴에 뭉개진다. 폭신폭신 부드러운 감촉. 게다가 그 수술 때, 실컷 이 가슴을 본 영상이 떠오른다. 불쑥 위를 향해 부푼 곳과 그 정점에 있던 연분홍색의......


「우와앗」

「얘, 스텝이 엉망진창이야. 제대로 해」


  균형이 무너질 뻔한 몸이, 합기도 같이 이상한 체중이동으로 교정된다. 도대체, 어느 쪽이 리드 역인가? 스스로도 모르는 채, 그저 자신을 잊고 열중해서 스텝을 계속 밟았다.
  눈앞에 있는 신에자키의 얼굴, 그 새침한...... 그러면서도, 조금 즐거운 듯한 미소를 바라보며.